충동, 관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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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야!”
명수의 다급한 부름에 방에서 책을 보던 단유가 거실로 나왔다.
“뭔데?”
“이거 봐봐.”
호들갑을 떠는 명수의 모습에 호기심을 느꼈는지 자기 자리에서 배를 깔고 누워 있던 호빵도 일어나 어슬렁거리며 다가갔다. 그러고보니 호빵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다. 포메라니안 종이 보통 12년에서 15년 정도를 산다고 하는데, 호빵은 벌써 6년이 지났다. 그래서일까, 예전처럼 혈기왕성하게 뛰기보다는 느긋하게 걷는 걸 즐기는 것 같았다. 원숙해진 걸까?
명수에게 다가가니, 명수는 보고 있던 모니터를 가리켰다.
“내 인터뷰 실렸어!”
아, 그것 때문에 그렇게 다급히 불렀던거야? 라는 말이 혀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맴돌다 사라졌다. 대신 명수를 가볍게 흘겨봐주고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한편, 경순고등학교 축구부의 주장 인명수는 재작년 U-17에서의 부진을 극복한 모습을 보이며 전반에만 세 골을 넣어, 해트트릭을 달성하였다. 운이 좋았다며 겸손을 보인 인명수는 다음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겠다고 다짐했으며, 또한 앞으로 있을 U-20 월드컵에 참여하게 된다면 제 기량을 120% 보이겠노라고 자신했다.···」
“자신한다고?”
“아니, 그런 말은 안 했는데, 아마 기자님이 좋게 봐 주셨나봐.”
“그래?”
나쁘진 않지만, 아직 국가대표 선발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발언은 자칫 오해를 부를 수 있다. 이를테면 기사의 첫 댓글처럼.
「김칫국 마시는 거 아님?」
하지만 겨우 2~3줄의 인터뷰에 딴지를 걸기엔 명수의 인지도가 부족했다.
「얘 누구?」
그리고 고등부 대회 예선전 경기에 관심을 둔 사람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의 댓글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얼굴을 감춘 익명의 워리어들에 의한 테러를 당해 본 경험자로서 판단한다면, 이 정도는 양호한 편이다.
“인터뷰 길게 했었다며?”
“그건 좀 아쉽다. 나름 멋있게 인터뷰 했었는데. 그래도 괜찮아. 내 첫 인터뷰였으니까.”
“그래. 다음에는 단독으로 인터뷰 실릴 날을 기대할게.”
“이번 대회 우승하면 실릴 수 있지 않을까? 전 경기 해트트릭이라는 대기록을 쌓으면서.”
물론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했다. 아무리 명수가 축구를 잘 한다고 해도, 축구는 혼자 잘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팀과의 호흡이 중요한 경기니까. 명수도 그 사실을 재작년의 U-17 월드컵에서 뼈저리게 느꼈고.
단유는 댓글은 신경 쓰지 마, 라고 충고를 남기고 돌아섰다.
“내가 설마 모르겠어? 예전에 너한테 있었던 거 나 다 기억해.”
당시 단유보다 더 분개하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던 명수의 모습을 떠올리며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명수가 자신을 위로해주었듯, 명수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자신이 명수를 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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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치러진 모의고사는 별 탈 없이 끝이 났다. 아직 성적이 공개되기 전이지만, 그때까지는 모두가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에 더해 2학년들에게는 수학여행이라는 선물이 주어졌다. 덕분에 학교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2학년이 빠졌을 뿐인데, 이렇게 세상 조용해질 수 있나?”
“200여 명의 입이 사라졌으니까 조용할 수밖에.”
“에구, 좋을 때다.”
물론 2학년과 달리 3학년은 그런 조용한 분위기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수능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는 선생님들 덕이었다.
“분위기 휩쓸리지 말고 공부나 해!”
“조용해서 공부하기 더 좋기만 하네. 그렇지? 자, 수업하자.”
어쨌든 이 학교를 다니는 대다수의 학생들의 당면 과제는 대입이었고, 수능을 포기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선생님들의 말씀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늘 그렇지만, 문제는 언제나 사소한 하나의 계기에서 시작된다.
가끔 교실을 둘러보면 공동묘지가 따로 없다 싶을 정도였다. 책상 위에 책을 쌓아두고 그 위에 엎드린 아이들의 굽은 등은 우울한 봉분이었다. 10분의 짧은 휴식 뒤에는 다시 좀비처럼 고개를 들고 멍한 눈으로 칠판을 향하는 아이들.
하지만 세상사가 모두 천태만상이듯, 쉬는 시간이 되어서야 눈을 말똥말똥 뜨고 분주한 이들도 있었다. 살펴보면 그들도 꽤나 바쁜 삶을 보내고 있었다. 고작 10분 밖에 주어지지 않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매점에 가서 컵라면도 먹어야 하고, 아니면 주전부리 삼아 빵과 음료수를 섭취해야 했다. 만약 배가 부르다면 매점에 가는 대신,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인간을 찾아 주로 입에 비축되어 있던 에너지를 소비하며 시간을 보낸다. 물론 소비된 에너지는 다시 이어지는 50분간의 수업시간에 보충한다.
어떤 아이는 문제집을 풀거나 지난 시간에 배운 내용들을 다시 노트에 정리하는데 쉬는 시간 10분을 모두 쓴다. 가끔은 옆 친구에게 묻는다.
“노트 좀 빌려줘라.”
수업시간에 조느라고 빈 여백에 알 수 없는 줄이 그어진 페이지를 찢어 버리고, 친구에게 빌린 노트를 보며 여백을 채운다.
단유는 쉬는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물론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려는 시도도 없었다. 가끔 그런 단유를 보고 ‘사람도 아니다’며 눈살을 찌푸리는 아이도 있었지만, 단유가 3년간 이룬 업적이 그런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쉽게 말하자면,
“저렇게 안 하면 어떻게 1등 하냐?”
였다. 그래서 단유는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실 시비를 거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다들 자기 시간을 보내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그런 단유도 쉬는 시간에 바쁘게 움직여야 할 때가 있었다. 2주에 한번 꼴로 돌아오는 주번 활동 때였다.
주번은 학급비품 정리 정돈, 실내 청소, 학급 분위기 조성에 노력 봉사해야 한다. 전교 1등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학급 번호순으로 돌아오는 차례에 최선을 다해 학급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양보해야 했다.
단유가 학급 주번을 맡을 때는 다른 어느 때보다 깔끔한 교실이 된다. 사실 주번 활동이 뭐 별거 있냐고 말을 할 수도 있지만, 정작 단유가 주번일 때와 아닐 때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명확해서 다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가장 차이를 많이 느끼는 사람은 선생님이었다.
“오늘 주번 단유니?”
라고 물으면, 대답은 다른 아이들에게서 나온다.
“네!”
“역시 단유가 주번이면 칠판이 깨끗해. 먼지 하나 없다니까?”
단유네 학교는 여전히 분필을 사용했다. 그래서 칠판이나 그 주변이 분필 가루로 쉽게 더러워지곤 했다. 그래서 더욱 주번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사실 10분의 휴식시간마다 쓸고 닦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단유가 주번일 때는 마치 칠판이 새것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깨끗한 데다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된 분필과 분필지우개들을 보면 감히 손대서 흩트려 놓기가 꺼려질 정도였다.
평소에는 아무렇게나 묶여 있는 창가의 커튼들도 각을 맞춘 것처럼 보기 좋게 묶여 있고, 교실 뒤 사물함 위에는 번잡한 물건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단유가 ‘결벽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벽증이라면 평소에도 어지럽혀져 있는 교실 주변을 보고 참을 리 없다는 반론이 나왔고, 결국 단유가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깔끔하고 청소를 잘한다는 정도로 정리되었다.
“공부도 잘하고, 청소도 잘하니 도대체 못 하는 게 뭐야?”
선생님은 분필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는 웃으며 모범생 단유를 칭찬했다. 그리고 그런 칭찬을 들으면, 단유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들의 편집적인 호의가 달갑지 않은 까닭이었다.
모든 수업이 끝난 후 ‘너희들이 수학여행 간 거 아니니까, 정신 놓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자’는 선생님의 종례 말씀이 있고, 그 후 청소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은 각자 맡은 부분을 청소했고, 가득 담긴 쓰레기통을 비우기 위해 단유는 분리수거가 된 쓰레기 봉투를 들고 교사(校舍) 뒤편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전 학년의 아이들이 청소하느라 시끌벅적했을 시간인데, 2학년은 수학여행을 가고 1학년도 일찍 수업을 마치고 돌아간 시간이어서 유난히 조용했다. 때문에 드물게 여유로움 마저 느껴지는 오후였다. 조용한 복도를 지나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가는데, 3층의 2학년 교실이 몰린 복도 쪽에서 소음이 들렸다. 정확히는 복도의 끝에 있는 화장실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뭘까, 잠깐의 호기심에 단유는 시선을 흘깃 던졌다. 매우 짧은 순간이었지만, 화장실 앞에 누군가가 서성거리고 있었고 화장실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수명의 아이들이 있을 거라고 판단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은 불필요한 관심이라 생각해서 단유는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상대는 아니었던 모양.
“야.”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단유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 건물을 빠져나갔다. 교사 뒤편에 분리수거장까지 걸어간 단유는 구분된 종류에 따라 쓰레기를 버리고 다시 교실로 돌아가려 했다.
“야, 안 들려?”
뒤따라 온다는 것은 알았지만, 굳이 자신에게 시비를 걸기 위해 오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남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망을 보고 있었던 것이라면, 오히려 숨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따라온 아이는 낯선 얼굴이었다. 하지만 교복에 붙은 명찰을 보니 동급생이었다. 그 아이도 단유의 얼굴이 낯설었는지 가슴에 붙은 명찰을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너 3학년이야? 몇 반이야?”
단유에게 질문을 던지는 아이의 얼굴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애써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한껏 불량스러움을 표현하는 아이는 송곳니를 드러냈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입술을 뒤집고 송곳니가 드러나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다.
“9반.”
“9반? 아, 과중반.”
그제야 왜 동급생임에도 얼굴이 낯설었는지를 이해하는 표정이다. 과중반은 3년 동안 자기들끼리 반을 섞어가며 지내기 때문에 일반반과 대면할 일이 급식실 외에는 거의 없었다. 더구나 쉬는 시간에도 밖엘 잘 나가지 않는 단유였으니, 더욱 그랬다.
“야, 뭔데?”
송곳니의 뒤에서 또 다른 아이가 등장했다. 송곳니보다 머리가 하나 더 큰 아이는 단유보다 키가 컸다. 운동으로 다져진 단유도 몸이 큰 편이긴 했지만, 새로 나타난 아이는 비만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단유보다 좀 더 커 보였다.
“아까 걔.”
“니가 불렀다는 애?”
“새끼가 째려보고 가잖아. 그래서 불렀는데 그냥 째고 가더라.”
속이 시커먼 새끼, 라고 뒤를 붙이는 송곳니를 지나 덩치가 다가왔다.
“너 뭐냐? 우리 학교 맞아?”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데 그런 질문이 나오나 싶었다.
“9반이란다.”
“···아, 과중반?”
단유가 과중반이라는 사실이 덩치를 불쾌하게 만들었나보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다가오는 모양새가 영 불안하다.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일상에 금이 가는 느낌이었다.
“김단유?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아, 걔네.”
“뭐?”
“선생들이 말하던 애 있잖아. 전교 1등.”
“아, 존나 재수 없는 새끼가 얘야?”
“상판도 존나 재수 없게 생겼네.”
당사자를 앞에 두고 만담이나 나누자고 분위기를 만드는 건 아닐 것이다. 틀에 박힌 이 패턴에 진절머리가 났지만, 단유는 되도록 조용히 상황을 무마시키고 싶었다.
“너희들한테 관심 없다.”
“관심? 난 관심이 있는데?”
이죽거리는 웃음을 짓는 덩치의 누런 이에서 구린 담배 냄새가 느껴졌다. 아마도 조금 전까지 흡연에 열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과중반에 존나 재수 없는 새끼가 있다고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렇게 만나서 반갑다.”
손을 내미는 덩치. 단유는 잠시 그 손을 보다가 마주 잡았다.
“그래, 반갑다.”
그렇게 맞잡은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곧 덩치가 팽개치듯 손을 놓으며 말했다.
“새끼, 좆같은 대가리만 굴리는 줄 알았는데 힘 좀 쓴다 이거지?”
왜 이런 애들은 시비를 걸고 싶어서 안달일까?
“아까 어디까지 봤냐?”
애초에 근처도 가지 않았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상대의 멍청함과 무대포 같은 시비에 진절머리가 난다.
“아무것도.”
“좆같은 소리 하네.”
한발 다가서며 단유의 턱을 붙잡는 덩치. 물론 그런 도발에 당황할 단유가 아니었다. 손을 쳐냈더니 예상했던 말이 뒤따른다.
“쳤냐?”
이제는 그냥 우습다. 뒤에서 눈을 빛내며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는 송곳니를 위해서라도 그들을 재미있게 해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