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 관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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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수 선수, 반갑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오늘 표정이 무척 밝네요. 역시 해트트릭을 했기 때문인가요?”
“아, 뭐, 그런 것도 있고요. 그냥 오늘 컨디션이 좋습니다.”
“재작년에 U-17에 합류했을 때가 생각나네요. 이미 중학교 때부터 두각을 드러냈던 선수로 관계자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는데, 그땐 그렇게 빛을 보지 못했어요.”
“그때는 제가 너무 긴장을 많이 해서요.”
“큰 대회에서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인가요?”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닌데요. 고등학교에 갓 올라온 상태인 데다 경험도 다른 클럽 선수들에 비해 적었거든요.”
“아, 경험 부족이라는 사실이 본인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네. 조금 그런 면이 있었죠. 그리고 그때 팀에 저보다 잘하는 선수도 많았고요.”
명수는 중학교 때의 경력으로 U-17에 올랐으나 당시 해외 유소년 클럽에서 활약하던 선수와 포지션이 겹치면서 제대로 활약할 기회를 얻지 못했었다. 그러나 명수는 그 점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았다. 본인이 평소 실력을 내지 못했던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제가 알기로는 U-20 대표로 인명수 선수가 물망에 올랐다고 들었는데요, 오늘 경기에서 보여준 활약은 그런 본인을 어필하기 위함인가요?”
“아뇨. 그런 생각은 없었고요. 그냥 즐기자는 생각만 있었어요.”
“이기려고 하기보다는 즐기려고 했다는 말인가요?”
“네, 뭐 그런 거죠.”
“그럼 오늘 경기 이야기로 넘어가서, 전반 4분에 첫 득점을 했어요. 미리 약속된 플레이였나요?”
“그건 아니고요. 그냥 운이 좋았어요.”
“순전히 운이었나요?”
“보통 전후반 시작과 끝에 집중력이 약해진다고들 하잖아요? 마침 타이밍이 맞았던 거라고 생각해요.”
이후의 득점 상황에 대해서도 짤막한 브리핑과 호응이 이어졌다. 기자는 미리 준비해뒀던 질문지의 질문들을 모두 쏟아낸 뒤, 녹음기를 껐다.
“오늘 경기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기대할게요?”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명수는 허리 숙여 인사했다. 더벅머리의 기자는 미소 지으며 명수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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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에는 귀류법이라는 게 있다. 명제의 반대를 가정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풀어 모순을 끌어낸다. 그러한 모순들로부터 가정이 거짓이기에 본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수학 논리 중 하나인 ‘대우’를 활용한 것이다.
급식실 실장이 정말 잘못을 했고, 그것이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면 과연 그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그 문제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언뜻 생각하면 그렇구나, 하고 넘길 이야기지만 좀 더 고찰해보면 빈틈이 많다.
우선 실장이 잘못했더라도, 불만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것은 수직화된 직장 내 서열관계에서 있을 수 있는 가정이다. 윗사람이 부당한 지시나 명령을 내리더라도 아랫사람이 이 지시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있는 경우가 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학교 내에서 선생님의 지시에 대해 아이들은 대체로 순순히 따르는 편이다. ‘선생님’이라는 직급에 대해 가지는 선입견도 영향을 미칠 테고, 오랜 관습을 통해 윗사람의 지시를 온당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교육받은 학생들의 태도 역시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내일까지 숙제해 와.”
라는 말과,
“내일까지 보고서 작성해.”
라는 말이 다르게 들릴 수 있을까?
“저 오늘 다른 과목 선생님들도 숙제를 많이 내주셔서 내일까지는 힘들겠는데요.”
“지금 밀린 업무가 많아서 내일까지는 힘들 거 같습니다.”
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
“선생님 너무 한 거 아냐? 내일까지 이걸 어떻게 다 해?”
“이 부장 너무 한 거 아냐?”
하지만, 과연 이런 상황에서 전혀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주어진 과제를 수행해낼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더라도 ‘궁시렁’거리면서 어설프게나마 불만을 표하지 않을까? 당사자 앞에서야 순응하는 태도를 보인다 하더라도, 불만은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조선 시대 노비들이라도 못된 주인에게는 불만을 품었을 것 같다.
두 번째는 과연 단유는 그가 말한 것처럼 급식실 사람들이 불만을 품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단유의 말을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가 안 된다. 비록 정원이 그의 죽마고우라도 되어서 오랜 시간 함께한 것은 아니라 해도, 단유가 결코 허언이나 실언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확신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유의 말은 믿는다. 단유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단유는 분명히 그 사람들에게서 그가 확신하는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확신의 문제다.
분명 그 상황은 싸움을 말리기 위해 뛰어들어야만 했고, 거기에서 그 사람들은 어떤 다급함, 혹은 주저함을 보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불만을 드러낼까? 그리고 만약 드러나지 않았다면, 단유는 어떻게 그들이 불만이 없었음을 확신할 수 있을까?
“단유야.”
“응?”
야자를 준비하던 단유에게 정원이 다가갔다. 눈을 껌뻑거리며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 단유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한참을 기다렸다가 물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단유는 정원을 보며 이게 또 왜 이러나, 하는 눈빛을 보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니가 그랬잖아. 급식실에서 모여있던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자면 넌 그 사람들의 표정을 읽었다는 뜻이잖아? 그래서 내가 하루 종일 애들 얼굴을 살펴봤는데, 솔직히 애들이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잘 모르겠더라고. 넌 어떻게 본 거야?”
단유는 얕은 한숨을 쉬며, 정원의 어깨를 짚었다.
“정원아.”
“응.”
“어쩐지 오늘 온종일 얌전히 있는다 싶었더니, 계속 그 생각을 했던 거야?”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이야.”
“어제 내가 너한테 그 말을 한 이후로 지금까지, 거의 하루 이상을 그 생각만 했다고?”
“응.”
단유는 정원을 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보면 예전에 자신도 그런 때가 있었다. 안 풀리는 문제가 있으면, 풀릴 때까지 밥 먹는 것도 잊고 문제에 몰두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당장 공부해야 할 것도 여러 가지였으니까. 학과 공부는 물론이고 모의고사 준비에, 개별 과제와 조별 과제, 번역일도 해야 하고 마법을 위해 몰두했던 개인 학습도 해야 했다. 거기에 최근에는 소설책을 번역하는 일까지 맡았다.
그래서 만약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거나, 쉽게 이해하기 힘든 책을 읽게 되면 거기에 몰두하기보다는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렸다. 다른 책을 읽거나, 다른 문제를 풀거나, 아니면 집안일을 했다.
집중력의 문제라기보다는 효율의 문제다.
“다다음 주면 모의고사야.”
“알아. 알아도 이건 꼭 해결해야 속이 편해질 거 같아.”
문득 일요일에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 하던 명수가 ‘불편!’을 외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람을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해. 말로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들 하지. 하지만 사람이 단지 언어로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까? 갓 태어난 아이들, 말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지 떠올려봐. 단순히 울고 웃는 표정으로 모든 의사를 전달하는 거 같지만, 사실은 그 표정 안에 다양한 의미가 숨어있다고 해. 제삼자는 모르는 것을 어머니들은 안다고들 하잖아. 배가 고픈 건지, 답답한지, 짜증이 났는지, 아니면 졸려서 그러는지 얼굴을 보면 안다고.”
정원이 눈을 깜빡이며 단유의 말에 집중했다.
“성인도 마찬가지야. 70여 가지의 근육들이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표정을 보면 그 사람의 감정이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지. 물론 100%는 아니야. 하지만 어느 정도는 유추가 가능해. 특정 조건 하에서는 말이야.”
“특정 조건?”
“포커페이스란 말 알지? 도박사들이 자신의 패를 상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짓는 무표정. 그런데 뛰어난 도박사들은 그런 무표정 속에서도 상대의 패를 읽는다고들 해. 좋은 패를 받았는지, 아닌지를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표정의 변화에서 읽어낸다고들 하지. 그게 가능한 이유는 도박판이라는 특정한 상황에서 유추해낼 의미가 특정되어 있기 때문이야. 말도 안 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의 표정을 읽으라고 하면, 사람의 표정을 읽는데 선수인 도박사들이라도 제대로 해내기 어려울 거야.”
“말하자면, 넌 어제 그 상황에서 불필요한 조건들을 제하고 특정한 의미만 골라 읽어냈다는 거네?”
“골라 읽어냈다기보다는 보여야 할 감정들이 보이지 않았다는 정도가 되겠지.”
싸움이 벌어졌고, 싸움을 말리는 상황에서 웃음을 터뜨릴 사람은 없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라며 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무마시켜 보려는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웃음이 즐거워서 웃는 웃음은 아닐 테다.
“넌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어릴 때 사람을 많이 관찰했었어.”
“왜?”
“···성격이 배배꼬여서.”
자신의 생존을 위협할 상대가 주위에 널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늘 위기의식을 느끼며 주위를 경계했다.
“에이. 말도 안 돼.”
“뭐가?”
“넌 내가 본 중에 제일 착한 사람이야.”
“내가?”
“아무리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해도 대답을 해주려고 하잖아. 그게 착하다는 증거야.”
어설프다. 단유는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겨우 그런 거로 착하다고 말하면 안 되지. 그리고 오히려 난 나쁜 사람에 속해.”
“니가? 왜?”
대답하지 않았다. 지난 과거에서 단유는 결코 착한 사람이라면 하지 않았을 일들을 했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지식을 내세우며 마치 지혜로운 척을 했고, 성급했던 결정으로 손에 피를 묻히기도 했다.
과거를 생각하니 괜히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배우고 익혀도, 여전히 모자란다는 생각을 갖는 건 바로 과거의 자신이 행했던 일들이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치열하게 자신의 빈속을 메꾸듯 지식을 습득하는 중이다. 하지만 언제쯤에나, 어디까지 익혀야 만족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왜 말을 하다 말아?”
정원은 교실을 나서는 단유의 옆에 붙었다.
“있잖아.”
입술을 달싹거리던 정원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거, 나도 가르쳐줄 수 있어?”
“뭐?”
“사람 표정 보고 읽는 거. 배울 수 있는 거지?”
“왜 배우고 싶은데?”
“그냥···배워두면 좋지 않을까 해서.”
소심해진 표정으로 말을 건넨 정원은, 그 스킬이 있으면 앞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을 꺼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고백했다.
어렸을 때, 종종 말실수로 친구들에게 핀잔을 듣거나 심한 경우 맞기도 했었다. 농담이라고 꺼냈는데, 친구는 기분이 나쁘다며 등을 돌리기도 했고, 반갑다고 인사를 했는데 분위기 파악 못 한다고 욕을 먹었다.
정원은 그 친구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쁜 건 그 친구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였어.”
친하게 지내고 싶지만, 실수할까 봐 가깝게 다가가지 못하는 정원이었다. 키도 작고 왜소했던 정원이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얼마나 용기를 냈던 걸까? 속으로는 많이 떨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떨림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름 열심히 얼굴을 꾸몄을 것이다.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하기 그지없었고, 그래서 단유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슬쩍 옆을 보니 눈치를 보던 정원이 눈을 아래로 내리까는 모습이 보였다.
“가르쳐줄게.”
“정말?”
“사실 가르쳐줄 것도 없어. 요령은 간단하거든.”
“뭔데?”
“바르게 보는 거야.”
정원은 단유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보며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