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 관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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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는 해트 트릭을 기록한 이후에도 쉬지 않았다. 공격진은 신이 난 것처럼 상대를 압박하며 명수를 지원했고, 수비진도 물샐 틈 없는 전략으로 상대의 역습을 철저하게 막아냈다. 그리하여 전반 끝나기 전, 명수가 어시스트한 공을 골로 연결시킴으로서 4:0이라는 엄청난 스코어를 기록했다.
“후반에는 좀 쉬어라.”
“더 뛸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그 정도면 충분히 눈도장 찍은 것 같으니까 거기까지 해. 오늘만 뛰고 말 거냐?”
딱히 상대를 위해서 명수를 빼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명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명수를 후반에서 빼는 것이 좋겠다는 게 감독의 생각이었다. 명수는 아쉬움을 삼키며 교체되었다.
명수가 빠졌어도 팀은 여전히 강했다. 오히려 전반에 명수가 날뛰어준 덕분에 상대적으로 체력을 많이 보전한 팀이었기에 후반전에도 상대가 매섭게 날아오르지 못하게 막아낼 수 있었다.
최종 스코어 6:0. 가끔 최약팀과 최강팀이 상대하면 이런 스코어가 나긴 했다. 말하자면 상대는 대회 참가팀 중 최약팀으로 인증을 받은 셈이었다.
“벌써 씻었냐?”
세면도구를 들고 샤워실로 들어가려던 선수들은 말끔한 얼굴로 대기실에 앉아 핸드폰을 두드리는 명수를 보며 물었다. 명수는 손 끝으로 볼을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선크림도 발랐어.”
“야, 그런다고 피부가 하얘지기라도 하냐?”
“더 타면 안 돼.”
“새끼.”
낄낄대며 샤워실로 들어가는 선수들을 등지고 명수는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1승. 해트트릭.
곧 답문이 도착했다.
―축하한다. 뭐 먹고 싶냐?
“역시 오늘 같은 날은 피자 한 판 땡겨야지.”
명수는 키득거리며 핸드폰 자판을 두들겼다. 전송 버튼을 누른 뒤 곧바로 문자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온 것이었다.
―잘했어. 칭찬해.
그리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깜찍한 동물 이모티콘이 뒤에 붙었다. 이를 보는 명수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선배님, 뭐 좋은 거 보십니까?”
샤워실에 들어갈 준비를 하던 후배 한 명이 명수의 웃음을 보며 물었다. 명수는 핸드폰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여자친구.”
“아, 예. 부럽습니다, 선배님.”
“마음껏 부러워해.”
“예.”
“너도 나만큼 축구 잘하면, 예쁜 여자친구 생길 거 같지? 안 생겨요.”
“···예.”
“흰소리하지 말고, 빨리 들어가 씻어들.”
코치가 들어와 아이들을 정리시키고 난 뒤, 명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힘이 남아도나 봐?”
“반만 뛰었잖아요? 정말 힘이 남아돈다니까요?”
“그래 보인다. 그러니까 나와.”
“지금요?”
경기도 끝난 마당에 다시 뛸 일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에너지 소비 차원에서 빈 운동장을 혼자 달리기라도 하란 걸까?
“저 아까 씻었는데요? 로션도 발랐어요.”
“무슨 헛소리야? 프레스 인터뷰다.”
“인터뷰요? 저요?”
코치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하도 인상적인 활약을 해서 그런지 스포츠지 기자들이 너랑 인터뷰하고 싶단다.”
“정말요? 저 처음이에요!”
명수는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녀석.”
코치는 피식 웃은 뒤 샤워실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씻고 나와라. 밥 먹으러 가야지.”
샤워실 안에 대답과 환호가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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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시간이 국어잖아? 혹시 자율학습 시키시는 거 아닐까?”
“에이 설마.”
아이들의 기대와 달리 국어 선생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수업을 진행했다. 아이들은 뭔가 묻고 싶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따뜻한 가을 햇살을 맞으며 꾸벅꾸벅 고개를 떨궜을 아이들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으니, 선생님은 마냥 수업을 이어갈 수만은 없었다.
“자식들아. 다들 머릿속에 딴생각으로 가득하다는 게 눈에 보인다. 집중 안 할래?”
결국 선생님이 한마디를 던졌고, 이에 한 아이가 용기 내서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급식실 실장···님 고소하실 건가요?”
“고소는 무슨. 그리고 지금 니들이 그런 거 신경 쓸 때야? 수능이 100일도 안 남았어.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선생님! 그 사람이 잘못한 거잖아요? 그럼 조치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학교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 너희들은 공부나 해라. 조금 있다가 모의평가에서 몇 점 받을지를 걱정해야지.”
선생님은 아이들이 다른 곳으로 신경을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
“선생님!”
한 아이가 또 손을 번쩍 들었다.
“또 뭐?”
뭔가 크게 각오한 듯, 비장한 얼굴로 일어선 아이가 입을 열었다.
“학교에서 부당한 일이 벌어졌는데, 학생들이 자기 일 아니라고 나 몰라라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맞아요!”
몇몇 아이들이 호응해주자, 말을 꺼냈던 소년은 더욱 비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희가 관심을 갖는 건 이타적 양심에 의거해서 올바른 사회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오!”
국어 선생님은 그 학생을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들고 있던 분필을 뒤에 내려놓고 손을 툭툭 털었다.
“순간 여기가 문과인 줄 알았다. 문자 좀 쓰는 걸 보니 언어영역 공부 좀 하나보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뻔뻔한 대답에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국어 선생님도 상황을 심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사실은 공부 대신 이런 신변잡기 같은 이야기로 시간을 때우고 싶어서 뭔가 멋지게 보이도록 포장했다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그냥 웃고 넘어가면 선생님으로서 도의가 아닌 거 같아서 말해주마.”
교탁 위에 팔을 포개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편한 자세를 만든 선생님은 잠시 말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먼저 이 이야기부터 하마. 아까 점심 시간에 있었던 일은 나도 잘못이 있다.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교사란 사람이 처신을 잘못한 거야. 그렇게 목소리를 높여서는 안 됐는데 말이지. 그게 너무 부끄러워서 사실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단 말이다.”
“아닌데요! 선생님 멋있었어요!”
“선생님 잘못하신 거 없는데요?”
“그래, 고맙다. 너희들이 그렇게 말해주니까. 그래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지. 그리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아까 네가 말한 ‘부당한 일’에 나 몰라라 하면 안 된다는 말. 그래, 나도 그 점에 있어서는 동의한다. 뉴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알겠지만, 이 사회에는 부당한 일들이 많다. 그리고 뉴스에 나오지 않는 일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계속 벌어지는데도 고쳐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나를 포함한 어른들이 그런 부당함에 대해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의 관심은 급식실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한 것이었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도 선생님의 말씀에 불만을 터뜨리진 않았다. 유행처럼 번져가는 ‘헬조선’이란 단어처럼, 이 사회에 수많은 부당과 적폐들이 판을 치고 있음을 모르진 않았으니까.
“변명하자면, 사는 게 바빠서, 혹은 자기 일을 신경 쓰기에도 벅차서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는 관심을 쏟을 겨를이 없었던 거겠지. 당장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라면 사회운동가가 아닌 이상은 나서서 고치려고 들지 않았던 거야.”
교탁 위에 반쯤 기대고 있던 선생님은 몸을 바로 세우며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 미소 짓던 얼굴은 어느새 진지함으로 가득했다.
“부당함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부당하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이 사회의 바른 규칙과 온당한 원칙들에 대한 위협이고, 그 위협은 불신과 불안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더라도, 나중에는 자신이 혹은 자신과 가까운 가족이 그 부당함으로 인한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니까. 평화와 공존, 공생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위협하는 일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바른 시민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라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말이야. 여기에는 좀 더 이성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너희들, 마녀사냥이란 말 많이 들어봤으니까 알지?”
이때 앞자리에 앉아 있던 정원이 슬쩍 고개를 돌려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단유가 정원과 눈을 마주쳐 주었다.
“객관적으로 완벽하게 부당함을 단정 지을 수 있는 일은 과연 얼마나 될까? 때로 사람은 군중심리에 휘말려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움직이기도 한다는 것을 너희들은 알아야 한다. 몇 사람의, 혹은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이라고, 그릇된 일이라고 손가락질하면 그것이 진실처럼 오판할 수 있다는 것이지.”
선생님은 ‘밴드왜건 효과(band wagon effect)’와 ‘다수결의 오류’를 언급하며 말씀을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급식실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한 뒷이야기를 당사자에게 들을 수 있을 기회라 여긴 아이들이 흥미진진하게 듣다가 어느새 ‘언어영역’ 수업으로 바뀌면서 몇몇은 힘겹게 버티고 있던 눈꺼풀에 힘을 풀었고, 몇몇은 교과서로 입을 가리고 하품했다.
‘역시 국어 선생님이다.’
라는 생각을 가질 무렵, 수업시간은 끝이 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지문이 나오면 너희들이 읽어야 할 점은 단순히 단어만 찾아서 정답을 찾을 게 아니라, 그 내용 전반에 걸쳐 이어지는 맥락을 이해하고 보기에서 가장 적합한 예문을 이어서 연결할 줄 알아야 한다.”
“예.”
힘없는 대답들에 선생님은 진지한 표정을 풀었다.
“니들 덕분에 진도를 많이 나갔네. 사실관계를 해석하는 일은 지문 해석에서 가장 중요하다. 알겠지?”
“네.”
선생님은 수업을 마무리하려는 듯 교탁에 펼쳐뒀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일은 아까도 말했듯이 선생님이 잘못한 부분도 있다. 그분도 옳다는 건 아니지만, 그분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고, 그걸 선생님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일이 커진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함부로 누가 잘했네, 못했네, 나눠서 편 가르려 들지 말고 싸우지 마라. 알겠지?”
가장 중요한, 그리고 궁금한 부분이 선생님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종이 울렸다.
“선생님! 그게 뭔데요?”
“수업 끝!”
“아! 선생님!”
선생님은 입술에 손가락을 붙이는 시늉을 한 뒤, 교실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아니,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를 말해줘야지, 왜 그걸 말씀을 안 해주시는 거야?”
“와, 나 오늘 궁금해서 잠 못 잘 듯.”
“웃기시네, 누우면 바로 코 골고 잘 거면서.”
“응, 아니야.”
단유가 교과서를 챙겨 서랍에 넣고 다음 수업을 준비하는 동안, 정원이 다가왔다. 정원은 옆에 쭈그리고 앉아 책상에 팔을 걸치고 그 위에 머리를 올렸다.
“지폐라도 있으면 니 입에다 물려주었을 텐데 아쉽다.”
“···뭔 소린지 모르겠고, 단유 너 말야. 혹시 뭐 아는 거 있어?”
“알긴 뭘 알아?”
“그럼 정말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거야?”
단유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아니, 뭐···솔직히 그래. 사정을 모르니까 누구 편도 들 수 없겠다고 말할 순 있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말이야. 그 상황에서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실장에게도 사정이 있을 거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뭔가를 아는 게 아니라면 그렇게 말하기 어렵지 않나?”
정원이라는 친구는 어수룩한 면이 많은 친구다. 사교적인 면도 많이 부족해서 ‘친구’임에도 편하게 말을 붙이지 못하고, 속내를 드러내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아 가끔 엉뚱한 말로 사람을 당황시킬 때도 있었다. 그러나 과중반에 들어온 친구답게 뭔가 하나에 꽂히면 집중력을 발휘해서 답을 알 때까지 파고드는 면도 있었다.
지금 정원이 호기심을 가진 부분 역시 평범한 사람들에겐 그게 왜 궁금하냐고 되물어볼 법한 일이지만, 정원은 물리학의 난제를 대하는 태도로 단유에게 해답을 구하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 알 수 있었지.”
“주변 사람들?”
“실장님을 말리던 사람들의 표정에는 실장님을 원망한다거나 억지로 울분을 참는 표정이 없었어. 만약 그 실장님이 잘못을 했던 것이라면, 그 사람들의 표정에는 아까 이야기 나온 것처럼 ‘부당함’에 대한 분노와 그것을 마음껏 표현하지 못해 쌓인 울분 같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을까?”
“어?”
“어쩌면 그 사람들이 실장과 한편이니까 그런 감정을 안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것 역시도 달리 고려해야 할 사정이 있다고 생각할 근거가 되는 거지.”
정원이 살짝 입을 벌리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정원의 턱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그리고 내가 원래 이기적이잖아. 그래서 그런 일을 보고도 모른 척하는 나쁜 심성을 가진 거지. 그렇게 편하게 생각해.”
단유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정원의 시선이 따라오며 물었다.
“어디 가?”
“화장실.”
“같이 가.”
단유가 걸음을 멈추고 정원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정원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도망치듯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