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 관심(2)
-------------- 553/952 --------------
생각에 잠긴 정원을 더 보채지 않고, 단유는 앞에 놓인 라면이 더 불기 전에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쁘게 젓가락을 놀렸다. 하지만 단유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정원뿐만이 아니었다.
“선배님, 그럼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단유는 대답 대신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따뜻하고 자극적이며 매운 라면 국물이 입안을 채웠다가 사라졌다.
“말했듯이, 나는 처음부터 본 게 아니라 두 분이 싸우는 모습만 봤고, 주변 사람들이 떠드는 사정을 주워들었을 뿐이라서 왜 그 싸움이 일어났는지 몰라. 시시비비를 가릴 준거가 부족하다는 거지. 물론 내가 그걸 판단할 입장도 아니지만 말이야. 그러니 섣부르게 누가 잘했다, 못했다를 따지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야.”
“하지만 지영호 선생님은 공정하신 편 아닌가요? 전 선생님이 애들한테 욕먹는 경우도 별로 보지 못했는데요.”
대준의 말은, 설마 선생님이 애꿎은 사람에게 함부로 했겠느냐는 뜻.
“그 사람의 평소 평판에 근거하여 추리할 순 있겠지만, 그것이 100% 확실하냐고 묻는다면, 난 아니라고 대답할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제삼자들끼리 추측을 하며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서로 소설 쓰는 것밖에 안 되지.”
단유는 대준에게도 확실하게 선을 긋고, 젓가락을 움직였다.
“역시 선배님은 생각도 깊으시네요. 알겠습니다.”
입발림 소리라고 치부해도 무방할 대준의 이야기는 못 들은 척하고 단유는 점심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정원과 함께 교실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급식실로 시선을 던졌더니 상황이 마무리되었던지, 급식실 입구는 정리되어 있었다.
뒤늦게 점심을 먹고 돌아온 아이들이나 단유처럼 매점에서 점심을 때웠던 아이들이 교실로 돌아오며 교실 안은 시끌벅적해졌다. 선생님과 급식실 직원이 싸웠다는 이야기는 뒷담화를 나누기 좋은 소재였으니, 평소라면 책상에 엎드려 부족한 잠을 채웠을 아이들이 모두 말똥말똥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 낯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익숙한 광경이기도 했다. 가끔 어떤 연예인이 마약을 했다거나 하면서 뉴스에 대서특필이 되면, 또 인터넷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는 어떤 영상이 올라오면 그다음 날 점심 디저트 삼아 아이들은 열심히 씹어대곤 했다. 사실 매일 같은 반찬만 먹으면 질리듯이, 아침 7시 교실로 향한 뒤 저녁 6시가 될 때까지 교실에 처박혀서 공부 이야기만 하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아이들은 색다른 반찬을 원했고, 이왕이면 좀 더 자극적이고 목구멍이 따가워질 정도로 침을 튀겨 나눌 소재가 필요했다.
과중반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다른 다수의 아이들에 비해 좀 더 공부를 많이 하고, 남들보다 더 오래 의자에 앉아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18살 여느 남자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아이들이었다. 혈기왕성하고, 날마다 같은 반찬에 질리기도 하면서, 반년도 채 남지 않은 시험을 앞두고 스트레스에 원형 탈모가 걸리기도 하는,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야, 아까 그 실장이라는 사람 너무 심하지 않냐? 학교에서 감히 선생님한테 야, 너 하면서 반말 찍찍하는 거 보니까 괜히 내가 열 받더라.”
“나라면 벌써 주먹 나갔을 텐데.”
말을 꺼낸 아이의 하얗고 마른 주먹이 엉성하게 뻗어졌다가 들어갔다.
“싸울 줄도 모르면서 주먹은 무슨. 괜히 선빵 날리겠다고 주먹질했다가 맞고 울지나 마라.”
“아니거든?”
“됐고, 아무튼 그 실장 아마 잘리겠지?”
“당근이지. 학교에서 갑질하다 선생님한테 걸린 거잖아?”
“그러고 보면 지영호 선생님도 많이 참은 거다? 그치?”
“솔직히 뒤에서 다른 선생님들이 안 말렸으면 싸우지 않았을까?”
“선생님이 한 인상 하시잖아? 그래서 그 실장이 쫄았던 거 아닐까?”
“그거 웃긴다. 속으로는 졸라 쫄았는데 애들이 막 쳐다보고 있으니까 허세 부린 거잖아? 만약에 보는 사람 없었으면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에바다, 새꺄’ 라며 말을 꺼낸 친구를 구박하는 아이들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개중에 사정을 잘 모르는 아이들은 싸움의 원인을 궁금해하기도 했다.
“근데 처음부터 본 사람 있냐?”
“우리 반에는 없을걸? 4교시 늦게 끝나서 우리 다 늦게 나갔잖아?”
“처음부터 본 애들 말로는 종이 쳤는데도 문을 안 열길래 가서 보니까 안에서 지랄 떠느라고 문을 안 열었다는 거야.”
“무슨 지랄을 떨었는데?”
“거기 일하는 아줌마한테 뭐라고 지랄하더래. 근데 아줌마가 눈물을 흘리면서 미안하다고 막 봐달라고 사정하는데도 욕하면서 지랄했다더라.”
“그 실장이라는 사람 젊은 사람 아냐?”
“니보다 많다, 새꺄.”
“야, 잡소리 넣지 말고. 아무튼, 실장이라는 사람이 아줌마보다는 어리지. 그거 아줌마들 다 나이 많잖아?”
“아무튼 대한민국은 좆같은 게 실장이 뭐 대단한 벼슬이라고 좆갑질이냐?”
“그걸 목격한 선생님이 참교육 시전한 거잖냐?”
“참교육 인정.”
“이제 그 실장 좆 된거지. 근데 그 아줌마는 그거 고소 못 하나?”
“무슨 고소?”
“명예 훼손 같은 거?”
“그게 되나?”
“애들 다 보는 앞에서 그랬으니까, 명예 훼손 같은 거 안 되나?”
“뇌피셜 오지구요. 그거 명예 훼손 안 되거든? 만약에 아줌마가 부당하게 해고당하면 고소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걸로는 고소 안 돼.”
“학교에서 그 업체에 항의하면 그 실장은 잘리겠지?”
“당연하지. 학교에서 그 지랄 해놓고 계속 일하면 되냐? 만약에 그 사람 안 잘리면 우리가 나서야지.”
“우리가 어떻게?”
“부당한 처사에 항의한다고 대자보 붙이고 그 뭐지? 청원 운동 같은 거도 하고 그래야지. 학교에 정의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줘야지.”
“학생회에서 하지 않을까?”
“지금 학생회장 하는 애가 약간 똘끼가 있으니까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하겠지.”
“걔 1학기 때도 무슨 청원 운동한다고 서명받고 그랬잖아?”
“학생 복지 개선한다고 뭐 그랬던 거 같은데?”
“그니까 걔가 똘끼가 있다는 거야. 자기 공약으로 내세웠던 거라고 해서 한다는데, 솔직히 무슨 복지를 말하는지 모르겠더라.”
“그게 바로 포퓰리즘이라는 거지.”
“근데 그때 서명했던 거, 그거 해서 뭐 된 거 있나?”
“서명한 사람이 있긴 있나?”
“난 했는데?”
“야, 넌 나중에 커서 분명 보증 서 주고 망할 거다.”
“개새끼.”
“응, 네 얼굴.”
여름날 소나기처럼 급변하는 화제는 아이들의 수다 본능을 자극했고, 그들의 수다는 점심시간이 마쳤음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이어졌다.
****
시합 전 가볍게 몸을 풀었던 아이들이 약간의 흥분과 긴장을 담아 뜨거운 숨을 내쉴 때, 감독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감독은 주위를 둘러본 뒤 짧게 격려했다.
“첫 시합이다. 그리고 상대는 이전까지 별다른 전적을 올린 적이 없는 학교다. 하지만 결코 얕보지 마라. 필드 위에서는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너희는 오로지 최선을 다해 뛰고 전술에 맞춰 움직이면 된다.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계속 움직이는 것, 그래서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는 것이 우리 축구다. 맞나?”
“예!”
감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아픈 사람 있나? 컨디션 안 좋은 사람?”
“없습니다.”
그때 명수가 손을 들었다.
“뭐야?”
“컨디션이 너무 좋으면 어떡합니까?”
아이들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긴장이 다소 가시는 대기실 분위기에 감독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명수야, 우리 주장아. 우리 주장이 이렇게 무게감이 없으니 상대가 우리를 얕보면 어쩔꼬?”
“에이, 얕보면 안 되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 좀 미친 척하고 뛰어도 되겠습니까?”
“양코치, 쟤 이상하다. 뺄까?”
“잠깐 빼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어? 감독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명수가 세상 다 잃은 표정을 만들어내며 바닥에 엎드리는 시늉을 하자, 아까보다 더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됐다, 명수야. 그만하고. 다들 긴장도 풀린 거 같으니 실수만 안 하면 오늘 결과는 잘 나오겠다.”
명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꼬리를 늘렸다.
“그런데, 감독님. 저 오늘 진짜 컨디션이 너무 좋아서 계속 뛰어도 안 지칠 거 같은데, 좀 지랄해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코치가 미간을 좁히며 명수를 나무랐다.
“야, 아무리 그래도 감독님 앞에서 지랄이 뭐냐, 지랄이.”
“됐다. 명수가 저러는 거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닌데. 너, 어떻게 하려고?”
“그냥 가뿐하게 해트트릭하면 어떨까요?”
“네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는 있냐?”
“뭐, 오늘은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근거가 뭔데? 그냥 네 컨디션이 좋아서?”
“뭐, 그것도 있고요. 날씨도 좋고요, 운동장도 딱 뛰기 좋을 정도로 말라 있기도 하고요. 애들이 좀만 도와주면 해트 트릭 좀 하겠는데요? 첫 경기부터 해트 트릭 좀 하면 다른 학교 애들도 겁 좀 먹지 않을까요?”
“거 참.”
감독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니들은 어떻게 생각해?”
명수는 팔꿈치로 옆에 앉은 친구를 툭툭 건드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감독에게 이야기하는 친구.
“경기장에 미친개 한 마리 풀어놨다 생각하죠?”
“그럴까?”
“야, 미친개가 뭐냐?”
“지랄견보다 낫지 않냐?”
“야, 이···.”
명수는 뒷말을 잇지 못하는 척하며, 친구의 머리를 붙잡고 헤드록을 걸었다. 감독님은 손뼉을 두어 번 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좋다. 사실 얕보지 말라고 했지만, 조금 수준 차이가 나는 것도 사실이고 하니까, 일단 전반전은 미친개 한 마리 풀어보자. 개 한 마리가 휘젓고 다니는데 상대가 정신 못 차리면 잘된 일이고, 개몽둥이로 죽어라 패는 정도가 되면 후반전에 개는 빼고 사람으로 상대하자.”
“아, 감독님! 뭔가요? 비유가 좀 그런데요?”
명수의 항의는 가볍게 씹으며 감독님은 뒤에 놓인 칠판을 두드렸다.
“경진이랑 지호는 옆에서 잘 움직이고. 아무리 미친개가 지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해도 옆에서 목줄만 잘 잡고 있으면 통제가 되니까, 전반전은 너희들이 잘 끌어야 한다. 알겠지?”
3학년인 경진과 지호는 피식 튀어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힘차게 대답했다.
“농담은 여기까지다. 경기장 위에서는 농담도, 방심도 용납 안 해. 확실히 자기 몫을 하자. 알겠지?”
“네!”
“가자.”
아이들은 마지막으로 손을 겹치고 파이팅을 외친 뒤,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명수야.”
“네.”
마지막에 나가는 명수를 불러 세운 감독은 명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주장이다. 알지?”
“넵!”
“그래. 그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그럼 가서 열심히 짖고 와라.”
“넵!···네?”
감독은 말 대신 명수의 등을 툭툭 두드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약간 긴장한 듯한 표정의 상대와 마주한 명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상대를 과소평가하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긴장해서 얼어 있을 필요도 없다. 어릴 때부터 늘 그랬지만, 축구는 열심히 하되 즐겨야 하는 것이다. 즐기지 못할 축구라면, 재미도 없고, 열심히 뛰어야 할 이유도 없다. 물론 이기면 좋겠지만, 지더라도 즐기는 축구를 하고 싶다, 는 게 명수의 속내였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난 결코, 지지 않을 거야.’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한 번 보고, 옆에 선 친구와 후배들을 둘러본 뒤, 경기장 바깥에 선 감독을 쳐다보았다. 감독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명수는 윙크를 했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감독을 보며 씩 웃음을 지을 때, 심판의 휘슬이 울렸다.
“미친개 나가신다!”
명수는 소리치며 달려나갔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러다 경고받는다.”
오른쪽에서 지호가 외쳤다. 저 친구는 어쩐지 목줄을 쉽게 놔주질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뭐 어떠랴. 오늘 명수는 너무 기분이 좋고, 다리가 너무 가볍다.
25분 후, 명수는 상대의 페널티 박스를 넘어섰다. 옆에서 상대 수비수의 외침이 고장 난 확성기처럼 뭉개져서 들렸다.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명수의 관심은 오직 오른발 안쪽에서 흘러나가는 공에 있었으니까. 명수는 야무지게 입술을 다물고 힘껏 공을 찼다.
‘어? 실수.’
너무 힘을 준 탓에 공을 제대로 차지 못했다. 공은 비실거리며 원래 차려고 했던 궤도를 벗어났다. 골키퍼의 양다리 사이를 노리고 찼던 공은 왼쪽으로 흘러갔고, 골키퍼는 다급히 몸을 왼쪽으로 던졌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손을 빗겨난 공은 아슬아슬하게 골대 왼쪽 포스트를 맞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우와!”
뒤에서 달려오던 아이들이 명수를 향해 덮칠 듯이 뛰어왔다.
“오지 마! 다쳐!”
명수는 얼른 자리를 벗어나 경기장 가장자리로 달아났고, 그 뒤를 동료들이 쫓았다.
스코어 3:0. 전반이 끝나기도 전에 명수는 자기가 뱉은 말대로 미친개처럼 뛰어서 목표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