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51화 (551/956)

새벽이 밝으면(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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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 들어가니 몇몇 아이들이 인사를 건넸다. 1학기 때도 그랬지만, 2학기 들어서 더욱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지 아침부터 책상에 코를 박고 엎드린 아이들이 많아졌다. 몇몇 아이들만 악의 없는 욕설이 섞인 잡담을 주고받으며 친목을 나누다가 교실로 들어오는 학생과 눈이 맞으면 가벼운 인사를 건넨다.

단유는 가볍게 손을 젓고 자리로 향했다.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을 정리하는 틈에 정원이 다가왔다. 빈 옆자리 의자를 끌어와 풀썩 앉으며 한껏 지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정원의 표정을 보니, 조식을 기다리는 호빵의 얼굴을 떠오르게 한다. 사료를 꺼내 그릇에 담을 때까지 끈덕지게 쫓아오는 그 시선처럼, 정원의 시선이 단유의 움직임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다행히(?) 호빵과 달리 정원은 소통이 가능했다.

“왜?”

“그냥, 웬일로 저녁 야자도 건너뛰었나 싶어서.”

“어제?”

“응.”

“그냥 볼 일이 있었거든.”

“오늘은?”

“오늘은 야자 할 거야.”

“그렇구나. 난 또 니가 학원에 다니기로 마음을 먹었던 게 아닐까 궁금해서 말이야.”

“교과서만 봐도 충분한데 뭐.”

“교과서만 보진 않잖아, 너. 어? 그건 또 무슨 책이야?”

“소설책.”

“원서네? 이야, 역시 넌 뭔가 다르다. 무슨 내용이야? 재미있는 거야?”

“아직 안 읽었어. 어제 받은 거라.”

“그럼 어제 이것 때문에 야자 빠졌던 거?”

“겸사겸사?”

정원은 책을 가리키며 봐도 돼? 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주고 마저 책상을 정리했다. 서랍 속에 오늘 공부할 과목들의 교과서와 문제집들을 채워 넣고, 책상 위를 물티슈로 닦았다. 그 후 마른 휴지로 물기를 훔쳐낸 뒤 노트 한 권과 펜을 책상 위에 반듯하게 올려놓았다.

처음에는 단유의 그런 책상 정리를 보며 호들갑을 떨던 정원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단유가 꺼내놓았던 책을 훑었다. 색바랜 재생지에 적힌 활자는 모두 영어였고 삽화 하나 없이 빽빽하게 글자만 들여 차 있다는 사실만 확인한 뒤 책을 덮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거 좋아해?”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고.”

번역 일 때문, 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던 단유는 책을 집어 왼편에 올려놓고 그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정원은 더 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에 ‘그렇구나’라고 말끝을 흐리며 대꾸했다. 단유는 주저주저하는 정원의 입꼬리를 살피고 물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인데?”

정원과 1년 이상을 같은 교실에서 보냈다. 그동안 봐왔던 정원은 별 의미 없이도 다가와서 말을 건네는 그런 친구이긴 했다. 지금도 따지고 보면 별 알맹이 없는 대화가 오고 갔고. 하지만 친구의 얼굴에 묻어있는 표정을 짚어보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너 소원 아파트 3단지에 살지?”

“응.”

“혹시 말이야, 거기 귀신 나온다는 이야기 들었어?”

“귀신?”

정원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저께 어떤 남자가 소원 아파트 뒷길에서 귀신을 봤다면서 파출소에 신고를 했대. 귀신이 계속 소리를 지르면서 따라오더라면서 살려달라고 그랬대.”

단유는 흥미를 잃었다.

“잘못 봤겠지.”

“아냐, 그 남자 말고도 다른 사람도 거기서 귀신을 봤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래서, 나도 그 근처에 사니까 귀신을 본 적 있냐고 묻고 싶은 거야?”

“응? 뭐, 그렇지.”

“본 적 없어.”

“···그, 그렇지? 본 적 없지? 본 적 없구나. 하긴 귀, 귀신이 세상에 어딨어? 그치?”

정원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돌렸다. 사실 이 귀신 이야기는 어젯밤부터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군 이야기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파출소에 뛰어들어온 남자가 귀신을 봤다며 소동을 피운 이야기가 인터넷에 올라왔는데, 워낙에 남자의 모습이 절절해서 감히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기 어려웠던 목격자가 나름 살을 붙여서 글을 올렸고, 그 글에 또 다른 목격자를 자칭하는 댓글이 붙으며 화력이 들끓게 되었다. 정확한 지명까지 나오니 당연히 근방에 사는 사람들의 관심이 높았고, 이른 아침 부족한 잠을 미루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어야 하는 이유가 되어 주었다.

다른 아이들이 심각한 척, 얼굴에 진지함을 담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정원 역시 단유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근방에서 벌어진 중차대한 사안에 대해 토의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역시 단유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비록 정원을 우습게 보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해당 주제로 이야기를 길게 이어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아, 맞다. 오늘 명수 시합 아냐?”

명수의 이야기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단유였다.

“준비 잘했대?”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나야 잘 모르지. 일단 아픈 곳 없고 아침에 보니까 컨디션도 좋아 보였으니까 아마 잘할 거야.”

“이번 경기에서 잘 하면 프로팀 가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애매한 답으로 대꾸했지만 내심으로는 이미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다. 4강 이상만 올라간다면, 그래서 팀이 주목을 받기만 한다면 명수 정도의 실력을 갖춘 선수는 분명 프로팀에서 먼저 스카우트 제의를 해올 것이다.

그 시간, 명수는 교실이 아닌 체육관에서 다른 축구부원들과 함께 모여 몸을 풀고 있었다. 아직 감독님이나 코치님이 오지 않아서 각자 편하게 자기 방식대로 몸을 풀고 있었다. 어차피 코치님이 오시면 다시 한 시간 정도를 스트레칭과 준비 운동으로 보내야 하지만, 가을 대회 첫 시합을 앞둔 흥분과 긴장이 아이들을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름 대범한 편이라고 자부하는 명수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평소처럼 쾌활하게 농담을 주고받기보다는 말없이 스트레칭을 하며 머릿속을 비우려 노력했다.

고등학교에 올라온 이후, 명수네 축구부의 성적은 썩 나쁜 편은 아니었다. 명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늘 4강에 진입했고, 명수가 1학년이었을 때는 가을 대회에서 우승도 했었다. 그러나 명수가 2학년에 오른 뒤에는 생각처럼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었다. 처음에는 준우승, 그 다음 대회에서는 준결승까지는 갔으나 결승 문턱을 밟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명수의 실력은 놀랍도록 발전하였고, 감독과 코치는 물론 타 학교의 견제 1순위가 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게 발목을 잡았다. 2학년 추계대회에서 결승을 가지 못했던 것이 명수가 상대의 작전에 막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3학년이 된 이후, 명수는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특유의 유쾌한 성격으로 동료와 후배들을 아우르는 품성을 인정받아 주장 완장을 차게 되었다. 그리고 주장이 된 이후의 첫 춘계 대회에서 명수는 전에 없던 책임감을 느끼며 누구보다 열심히 경기에 임했다. 그리고 팀을 위한 축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운동장을 누볐다. 욕심을 조금 내려놓고 패스와 경기 운영에 신경을 쏟은 덕일까, 명수네 축구부는 춘계 대회에서 결승에 올랐었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모두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 힘을 쏟아냈고, 결승전에서만 두 골을 넣으며 대회 MVP가 되었다.

그 시점에서 대학팀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기 시작했고, 몇몇 프로팀에서는 가을 축구를 기대한다는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네 실력은 인정해. 하지만 곧바로 프로에 진출했을 때, 네가 과연 팀에 어울릴 수 있는지, 그리고 프로에서도 네 실력을 100% 발휘할 수 있는지는 단 몇 경기의 시합만으로는 확언할 수 없다. 그러니 이번 추계대회는 그것을 확인하고 검증하는 시합들이 될 거야. 매 시합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거야.”

고등학생 수준, 이라고 폄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프로에 준하는 실력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평가에 명수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다행히 이런 고민에 대해 명확하게 답을 줄 수 있는 조언자가 명수 곁에 있었다.

“이전과 달리 네가 팀 축구를 했다는 점에서 프로팀에서는 이미 너한테 합격점을 줬을지도 몰라. 하지만 축구가 아무리 팀을 중심으로 한다 해도 개인의 역량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잖아? 어느 팀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해당 포지션에서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는 선수를 데려오고 싶은 건 마찬가지고. 가을 경기에서는 네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기량을 발휘해보라는 의미 아니었을까?”

명수는 누구보다 골을 많이 넣고 싶어 하는 선수였다. 힘껏 공을 차 골키퍼를 제치고 골망을 뒤흔들고 싶어 하는 선수. 하지만 고등학교에 올라왔을 때 이미 해당 포지션에 능력 있는 선배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명수가 본인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3학년에 오른 뒤에야 겨우 그 기회가 생겼는데, 춘계 대회는 지난 대회까지 우승을 하지 못했던 축구부의 사정상 전략을 넘어선 개인의 욕심을 부리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도 명수가 활약을 했으니 프로와 대학팀 스타우트들의 눈에 띈 것이긴 했지만.

아무튼 이번 가을 대회에서 명수에게 주어진 과제는 그랬다. 팀을 우승까지 이끌되, 그 안에서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보일 것. 명수는 팀 포지션 상 스트라이커였고, 그의 기량을 보이기 위함이란 결국 골을 많이 넣는 것이다.

“쉬운 일이잖아? 기회가 닿는 대로 골을 넣어. 골을 많이 넣으면 시합에서 이기는 거고, 시합에서 이기다 보면 대회도 우승할 수 있어.”

명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들었다. 체육관의 창으로 밝은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오늘은 날씨도 좋아 보인다. 선선한 바람과 따뜻한 햇볕. 미친 듯이 뛰어도 지치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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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단유는 교과서와 노트를 덮어 책상 서랍에 밀어 넣었다. 책상 위를 말끔히 치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정원이 나타나서 히죽 웃고 있었다.

“밥 먹으러 가자.”

“그래.”

급식실로 가는 동안에도 정원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단유는 적당히 맞장구도 쳐주고 대꾸도 해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단유는 서두르는 일이 없었다. 모두가 미친 듯이 급식실로 뛰어갈 때, 단유는 평소의 걸음 이상의 속도를 내는 법이 없었다.

“어차피 빨리 가나 천천히 가나 똑같애. 1층이랑 2층에 있는 애들이 급식실 앞에 먼저 도착할 테고, 급식을 받는 인원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나머지 애들은 줄을 서야 하거든. 그 줄에서 10분을 기다리나 15분을 기다리나 거기서 거기지.”

정원도 그런 단유의 페이스에 익숙해졌다. 오히려 그렇게 걸어가는 동안 단유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아하기도 했다.

역시나 급식실 앞에는 사람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질서정연하게 이어진 줄이 아니었다.

“뭐지?”

정원이 먼저 호기심을 드러내며 뒤꿈치를 들고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그런다고 보일까마는. 키가 큰 단유도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는 그 너머는 잘 보이지 않았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웅성대는 소란 너머의 거친 고함은 잘 들렸다.

“니가 선생이면 다야!”

“뭐, 이 사람이! 말 다했어!”

“어디서 함부로 반말 찍찍대? 내가 당신 학생이야?”

시비가 붙은 모양인데, 대상자들이 어른들인 모양이었다. 정확히 한 사람은 선생님인 모양이었고.

“무슨 일이지?”

걱정 대신 호기심을, 두려움 대신 흥미로움을 두 눈에 가득 채운 채로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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