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50화 (550/956)

새벽이 밝으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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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데.”

단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 그렇구나.”

이미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정원은 뒷말을 잇는 게 쉽지 않았다.

“나도.”

할 말은 그뿐이었다.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수많은 단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지만, 정원은 더 큰 실수를 저지르면 안 된다는 경각심을 갖고 입속으로 꾹꾹 쑤셔 넣었다. 등 뒤에서 터져 나오는 비웃음을 들으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리로 돌아갔다.

‘순진한 아이네.’

고등학교 2학년이면 어느 정도 물이 들기 마련인데, 정원이란 아이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순진한 녀석, 이란 판단이 들었다. 단유는 정원과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며 후속편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기대 어린 시선을 무시하고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후, 단유는 정원을 ‘짬뽕’이라 부르는 아이들의 유치한 유희에 참여하는 대신 언제나처럼 독서와 수업에 몰두했다. 그리고 정원은 그런 단유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처음의 자신감은 문밖에 내놓은 배달 그릇 수거해가듯 사라진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무시하려 했다. 지난 1년간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신경 안 쓰고 자기 일에만 몰두했더니 적잖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어울리지 않게 아련한 눈으로 흘끔흘끔 쳐다보는 모양새나, ‘짬뽕’이라는 유쾌하지 않은 별명을 감수하며 귓불을 붉게 물들이는 아이를 보니 괜히 마음이 쓰였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고등학생씩이나 돼서, 게다가 똑똑하다는 아이들이 모인 틈에서 ‘지니어스’, ‘안경’, ‘모범생’, ‘책벌레’ 같은 별명 놔두고 ‘짬뽕’이라는 별명을 들어야 하는 정원의 마음이 어찌 편할까.

점심시간이 되어 급식을 먹으러 가기 위해 분주해진 사이, 정원은 ‘같이 갈까’라는 단유의 제안을 받았고, 개구리 왕눈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눈이 커졌던 정원은 모처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은 엉망이었으나 그 일을 계기로 단유에게 말을 거는 아이들이 늘었다. 그중에서도 정원은 가장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아이였고, 어느새 ‘짬뽕’은 단유라는 중국집의 첫 번째 메뉴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럼 나는?”

“너는 그냥 간판해라.”

맥락상 틀린 말은 아니다. 한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친구를 보면 된다고 하던데, 그런 의미에서 명수는 단유가 애지중지하는 간판이다. 녹슬지 않게, 언제나 빛이 나게끔 아침 저녁으로 관리하는 간판. 물론 단유 본인도 명수에게 그런 간판이 되려고 노력했다.

“···좋은 뜻이야?”

“나쁜 뜻은 아냐.”

명수는 히죽 웃으며 정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나도.”

이사 후 1년이 넘게 지난 뒤에야 사귄 첫 친구였다.

****

야자도 빠지면서 단유가 간 곳은 강남에 위치한 번역회사였다.

“안녕하세요.”

“단유 왔어? 일찍 왔네? 밥은?”

“끝나고 먹으려고요.”

“잘됐네. 나도 아직 저녁 안 먹었는데. 같이 먹을까?”

상곤은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소파를 가리켰다. 단유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

“고3 생활은 어떠냐?”

“평소랑 똑같죠.”

거만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그간 단유와 얼굴을 맞대고 지내온 시간들이 있어 크게 오해할 일은 없었다.

“역시 여유가 넘치는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며 책상에 올려져 있던 책 두 권을 집었다. 한 권은 새로 맡길 원서였고, 다른 한 권은 이번에 출판된 단유의 번역본이었다.

“오랜만에 사무실에서 보니까 반갑네. 여기.”

고등학교에 올라간 뒤에는 사무실에 직접 찾아오는 빈도가 줄었다. 회사 측에서도 그런 단유의 사정을 이해해주었고, 굳이 단유가 오지 않더라도 마감 시간에 맞춰 메일로 번역본을 건네주기 때문에 달리 문제 삼지 않았다. 사실 문제 삼을 이유가 전혀 없다. 단유의 번역 속도는 다른 번역가와 비교가 어려울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번역의 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 회사는 그런 단유를 더욱 귀하게 대접할 수밖에 없었고.

“고맙습니다.”

단유는 상곤에게서 책을 건네받은 뒤, 우선 새로 번역해야 할 원서가 어떤 책인지를 살폈다.

“이번에도 자연과학계열인데, 사실 난 문과라서 봐도 모르겠더라.”

단유는 주로 비문학계열 서적들을 번역했는데, 주로 인문과학계열 서적들이 많았다. 그러나 1년 전, 단유가 자연과학계열 서적도 번역해보고 싶다는 요청을 직접 해왔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꾸준히 성과를 거둔 단유의 실력을 회사도 인정했기에 그 요청은 쉽게 수락되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3차례 정도 자연과학서적을 번역했고, 그 결과물들은 모두 회사가 만족할만한 수준의 것이었다.

“최근의 입자물리학을 정리한 책이네요. 얼마 전에 ‘벨’ 실험팀에서 쿼크 입자 2개와 반쿼크 2개로 이루어진 새로운 입자를 발견했다잖아요? 그에 대한 이론을 겔만의 쿼크 모형에서부터 되짚어서 설명하는 내용인가 봐요.”

머리말과 목차를 보며 내용을 유추하는 단유의 설명에 상곤은 손을 저었다.

“그렇게 말해도 난 모른다. 내가 고등학교 때 수포자였어. 과학이랑 수학은 전혀 친해지질 않더라고. 몸이 받아들이질 않아.”

“어려운 용어를 써서 그렇지, 실제로는 별로 어렵지 않아요.”

단유가 좀 더 쉽게 설명하려는 모양새를 보이자 상곤이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런 거 설명해도 난 모른다니까. 들으면 멀미만 놔. 그냥 잘 번역해주면 그만인걸. 나중에 감수팀에서 말 안 나오면 그만이지 뭐.”

단유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볼을 긁적이자 상곤은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이번 거도 기본적으로는 6개월 안에 해주면 된다. ···근데 또 석 달이면 나오겠지?”

“네.”

“하하. 너의 그 자신만만함에 내가 두손 두발 들었다. 아, 그리고 내가 또 빼놓은 게 있었는데···.”

상곤은 자리에 일어나 책상 뒤편의 책장으로 다가가 뭔가를 찾는 시늉을 했다.

“입시 준비 때문에 바쁜 애한테 이런 일 맡기는 게 옳은 건가 싶기는 한데, 또 이제까지 네가 해준 걸 생각하면 1년은 쉬라고 해야 맞는 건데···.”

“괜찮아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요. 해도 무리가 없으니까 하는 거고요.”

실제로 그랬다. 처음에는 컴퓨터로 타이핑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느리기만 했던 것이, 이제는 속도가 점점 붙어서 작업 시간이 대폭 줄어든 탓이다. 종종 이해하기 힘든 전문 용어가 나올 때 그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과 참고서적을 찾는 시간이나, 읽기 편하게 문장을 고쳐 쓰는 일로 지체되는 시간을 제한다면 작업 시간은 처음에 비해 거의 두 배로 줄어든 상황이었다. 다만 고등학생이기에 주어진 자유 시간이 중학생 때보다 줄었기 때문에 작업을 띄엄띄엄하다 보니 최종 결과물은 예전처럼 석 달 전후가 걸렸다. 어쨌든 여유가 있다는 단유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래. 그런 줄 아니까 나도, 회사도 염치없이 너한테 계속 일을 맡기는 거지. 워낙 잘 해주니까. 아, 여기 있네.”

상곤은 책 한 권을 집어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다른 책들 위에 올려졌다. 바라보니 이전까지 받았던 책과 다른 종류의 책이었다. 일단 책 표지가 화려했다. 은은한 파스텔톤의 추상화 같은 삽화가 표지에 그려져 있고, 금빛 활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호기심을 드러낸 단유의 표정을 살핀 상곤이 짧은 헛기침 후에 말을 꺼냈다.

“사실 우리 회사에서 다루는 책은 아니고, 다른 회사에 들어온 책인데 내가 일이 있어서 잠시 들렀다가 네가 생각나서 가져온 책이야.”

“소설 같은데요?”

대충 페이지를 훑으며 살피는 단유의 말에 상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단유가 ‘이걸 왜?’라는 의문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니, 상곤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해 볼래?”

문학 서적의 번역은 비문학 서적의 번역보다 어렵다. 감성과 이성의 차이, 라고 단순하게 구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문학의 경우,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가 농축된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야만 해석이 가능한 경우가 많다. 또 문학적인 의미에서의 축어(逐語)를 사용하는 경우도 적확한 단어를 매치시키는 일이 쉽지 않다. ‘서로 다른 두 언어를 일대일 대응시키는 기계적 번역으로는 문학 작품의 향취와 결을 제대로 살릴 수 없다’고 주장한 문학평론가의 말마따나 문학 서적의 번역은 어렵다.

때문에 문학작품 번역가의 문턱은 높다.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도 많고, 번역일에 매달리는 사람도 많지만, 문학 작품을 전문적으로 번역하는 사람은 적은 이유다.

“문학적 소양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번역이 거의 불가능하다고들 하지.”

단유는 상곤의 설명을 들으며 과연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껏 단유가 비문학 서적들을 번역해오고는 있었지만, 그 안에서도 단유가 쉽게 다른 언어로 치환하기 힘든 문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화석의 지질학적 가치를 논하는 글이라도 모든 문장이 과학적 용어로 점철된 딱딱한 문장은 아니었다. 때로는 글쓴이의 위트가 담긴 문장이 삽입되어 있을 때도 있었고, 문학적인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문장을 번역할 때마다 단유는 약간의 곤란함을 겪었었다. 물론 회사의 감수팀에서 적절하게 수정해주기도 했기에 번역물 자체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너라면 문학 작품의 번역도 잘할 수 있을 거 같더란 말이지.”

“제가요?”

“감수팀의 이 팀장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니가 맡은 번역물은 모르고 보면 번역서인지도 모를 정도라고 하더라. 마치 애초부터 우리 말로 쓴 책을 타이핑한 것 같다고 말이야.”

“과찬이시네요.”

“그만큼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게 번역한다는 이야기지. 번역물은 태생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지는데, 네 건 그렇지 않다고 하니까.”

“그게 제가 문학 작품을 잘할 수 있다는 근거는 안 되지 않나요?”

“물론 검증은 해봐야겠지. 그리고 그 검층의 차원에서 이 책을 가져온 거고. 만약 네가 이 책을 잘만 번역해준다면, 우리 회사도 문학 작품 쪽에 한 발 담글 수 있게 될 테고 말이야.”

“못 하면요?”

“못 하면 어쩔 수 없지만···못 할 거 같애?”

단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책의 중간쯤을 펼쳐 한 단락을 읽었다.

「시큼한 냄새를 풍기던 그 방에 들어선 순간에 나는, 인생의 마지막은 반드시 포근한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마감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곰팡이가 피어오른 눅진한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썩어가는 얼굴을 보며 기도했다. 신이시여! 아침에 먹었던 스콘이 부디 상하지 않았기를.」

미간을 좁힌 채로 책을 훑던 단유는 조용히 책을 덮고 볼을 긁적였다. 난감하다는 단유를 보며 상곤은 피식 웃었다.

“이런 모습은 처음 보네.”

“어렵네요.”

“쉽지는 않지. 그런데 처음 너를 만났을 때, 고작 중학생이었던 니가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다’며 원서를 들춰 읽던 모습을 생각하면 이런 니 모습이 조금 생경하게 느껴지고 그러네?”

“저라고 다 잘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건 자주 듣던 이야기네.”

웃음을 흘리며 상곤은 까칠까칠한 턱을 엄지로 쓰다듬었다.

“아, 그리고 문학 작품은 비문학작품보다 번역비가 비싸. 회사마다 다르고 번역가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비문학보다 70% 이상 더 받을 수 있지.”

물론 넌 돈이 크게 중요하지 않겠지만, 이라고 운을 떼는 상곤에게 단유는 저 돈 좋아해요, 라고 대답해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일단 이건 그냥 가져가서 읽어봐. 해외 문학 원서는 읽어본 적 없지? 읽어보고 어떤 느낌인지, 그리고 이런 책을 번역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를 한 번 검토해봐.”

이건 번역해도 돈 안 나오니까 그냥 읽기만 해, 라며 책을 들어 흔들어 보이는 상곤이었다.

“그건 그렇고, 일단 일어나자. 계속 떠들었더니 더 배고픈 거 같네. 뭐 먹고 싶어?”

재킷을 걸치는 상곤에게 단유는 아무거나요, 라고 대답했다.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단유였다.

****

하은은 단유가 가져온 책을 펼치고 두세 페이지 정도를 대충 넘기다 덮었다.

“아이고 머리야. 도대체 이런 걸 읽으라고 주는 건 무슨 의도래?”

“결정권을 제게 넘긴 거죠. 본격적으로 할지 말지를.”

“하고 싶어?”

“아직은 모르죠. 제대로 읽어보고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생각해보려고요.”

“뭐,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느냐마는 굳이 이 시기에 결정할 필요가 있나?”

역시 고3이라는 게 문제라는 하은의 판단에 단유는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미소를 보며 하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단유니까.”

하은은 그 말만 하고 입을 닫았다. 뭔가 많은 문장들이 생략된 느낌이다.

‘만약 지금 이 말을 다른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면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이내 단유는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리며 방으로 돌아갔다. 만약 하은이 소설가이고 그녀의 소설을 번역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단유는 절대 그 일을 맡지 않을 것이다. 말꼬리를 잡고 끝없이 이어지는 수다와 혼자 납득하고 마는 혼잣말들을 무슨 수로 번역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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