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49화 (549/956)

새벽이 밝으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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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영원, 그 오랜 기다림 속으로 햇살처럼 니가 내렸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걸어가는 하은은 어두운 골목을 비틀대며 걸어갔다. 물론 본인은 비틀대고 있다는 자각이 없었지만. 흥이 돋아서 어깨를 들썩거렸더니 비틀거림이 좀 더 커졌다. 아차, 하는 사이에 넘어질 뻔했지만, 벽을 짚으면서 큰일은 피했다.

“으휴.”

뜨거운 숨을 길게 토해내며 고개를 살짝 젓고는 다시 곧바로 걷기 위해 몸을 곧추 세웠다. 그러나 아슬아슬한 걸음은 계속 이어졌다.

그때,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처음에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던 걸음이었으나 비틀대며 걷는 여자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는 듯하니 점점 걸음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주변을 살피니 인적도 드물고, 저만치에 가로등의 사각지대에 웅크린 어둠을 확인한 그림자는 좀 더 과감하게 여자에게 다가갔다. 손만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에 이르렀을 때, 그림자는 뜨거운 입김을 뱉은 후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 했다.

“선생님!”

너무 여자에게 집중했던 탓일까, 골목 끝에서 사람이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림자는 짧게 혀를 찼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여자를 빠르게 지나갔다.

“왜 이렇게 늦어요?”

덩치가 큰 사내가 여자에게 다가가니 여자가 방긋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거기까지 확인 후, 남자는 다음을 기약하며 두 사람을 지나갔다. 덩치가 뒤를 돌아보는 듯한 느낌에 사내는 얼른 오른쪽 골목으로 몸을 돌려 시선을 피했다.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걸음을 걷던 사내는 골목 가운데에 어슴푸레한 인영을 발견했다. 짧은 치마를 입고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풀어헤치고 있는 모양새에 남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요즘 여자들은 저렇게 경계심이 없단 말이지.”

남자는 주변을 확실히 살핀 후,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여자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뒤에서 슬쩍 불러봤지만, 여자는 인사불성인지 대답이 없었다. 남자는 입술을 혀로 훔친 뒤, 여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저기요.”

그러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눈을 부릅떴다.

“흐악!”

여자는 눈, 코가 없었다. 둥근 얼굴에 입만 덩그러니 있었는데 입을 쩍 벌리자 송곳처럼 날카로운 이가 드러났다. 남자는 기함을 토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여자는 손을 휘저으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남자에게 다가왔다.

“으어어!”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흘리며 남자는 벌떡 일어나 달아났다. 귓가를 쨍, 하고 울리는 기성(奇聲)이 등 뒤에서 울렸다. 무서워서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있는 힘껏 다리를 놀려 달아나는 수밖에. 소름 돋게 만드는 목소리가 멀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살려줘! 살려줘요! 도와줘요!”

침을 튀기며 악을 써도 주변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인적이 드물다는 사실에 반가워했는데, 이제는 정 반대가 되었다.

누구라도 자신의 비명을 듣고 모습을 드러내길 바라며 끊임없이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지르며 전력으로 내달렸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큰 길가를 향해 달리는 남자의 뒤를 조용히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지만, 남자는 알지 못했다.

“뭐 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 시선은 고개를 돌렸다.

“좀 도와줘.”

이맛살을 찌푸린 명수는 히죽 웃으며 매달리는 하은을 부축하며 단유를 불렀다. 야밤에 소리를 지르며 뛰어가는 남자 따위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투였다. 단유는 사라진 남자의 뒤를 슬쩍 봤다가 명수를 돕기 위해 다가갔다.

아마 저 남자는 두 번 다시 이곳에서 음흉한 짓은 못 하리라. 만약에라도 다시 눈에 띄게 된다면 그때는 이 정도로 끝내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단유는 하은의 다른 한쪽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었다.

“단유야! 명수야!”

“아악! 선생님! 이제 그만 해요! 나 힘들다구요.”

“우리 명수! 지금 나 피하는 거?”

“으윽,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예요! 안 돼! 도와줘! 단유야!”

단유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커피포트에서 물이 끓는 소리, 달콤한 향기가 거실을 맴돌고 그 속에서 하은과 술래잡기를 하던 명수의 코끝을 간지럽힐 무렵 단유가 다시 나타났다.

“선생님, 여기요.”

“오! 우리 단유! 역시! 고맙다 고마워. 잘 마실게!”

흥이 돋은 하이톤의 목소리에 호빵이 못 말리겠다는 듯 하은을 바라보다가 등을 돌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방석 위에 올라가 꼬리를 말고 앉아 하은을 바라보는 모양새가 마치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시어머니 눈빛이었다. 하은은 그런 눈빛을 외면하고 단유가 건넨 꿀물을 후후 불며 마셨다.

명수는 말로는 싫다면서도 방으로 피하는 대신 하은의 옆에 앉아 팔걸이 대용으로 어깨를 쓸 수 있게 해주었다.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 거실에 술 냄새 다 배겠네. 선생님 친구들은 전부 술고래예요? 그리고 밤에 술 취한 여자가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거예요?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잔소리 그만! 어떻게 넌 점점 잔소리가 그렇게 늘어? 단유 봐라. 얼마나 조용하니?”

“한마디 할까요?”

“됐어. 너까지 한마디 하면 나 완전히 벌서는 기분일 거야. 한참 기분 좋게 술 마셨는데 집에 와서 벌 받는 기분 들면 그간 마신 술이 아깝지 않겠니?”

하은은 히죽 웃으며 명수의 어깨에 걸친 팔을 흔들었다. 꼬마아이가 흔드는 장바구니마냥 앞뒤로 그네를 타던 명수가 인상을 쓰며 ‘흔들지 마요’라고 저항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앙탈 부리니?’ 라고 한 마디 내뱉고는, 그 말이 우스웠던지 혼자 웃음을 터뜨리는 하은을 단유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기분 좋게’ 마셨다는 선생님의 말씀과 달리, 어쩐지 울적해 보이는 선생님이었다. 그러나 곧 기분 탓이라 여기며 단유는 선생님을 부축했다.

“들어가서 주무세요, 선생님.”

“그래, 그래. 그래야지.”

헤픈 웃음을 지으며 명수와 단유의 머리를 쓰다듬는 하은은 아마 침대에 눕히자마자 잠들 것이다. 부디 좋은 꿈 꾸시길.

****

“수능이 이제 며칠 남았다고?”

“아! 선생님!”

아이들이 하나같이 우는 표정이 되어 선생님을 향해 한탄과 야유 섞인 목소리를 질러대는데, 그게 오히려 기분을 좋게 만들었는지 걸쭉한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들을 둘러보는 담임 선생님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진짜 며칠 남지 않았으니까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하자. 설마 우리 반에서 여름을 날로 보낸 친구는 없을 거라고 믿지만, 그래도 혹시나 자신이 게을렀다고 생각하면 남은 시간만이라도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알겠지?”

시한부 환자들처럼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이들에게 기운을 내라는 말은 건네지 않았다.

“오늘 야자하는 사람?”

몇몇이 손을 들었고, 선생님은 해당 학생들을 기록한 뒤 출석부를 덮었다.

“자, 다들 수고하고 내일 보자. 이상. 반장?”

“차렷! 경례!”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고개를 까닥이며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교실을 채우고 있던 긴장이 확 허물어지며 왁자지껄한 가운데 아이들은 가방을 둘러매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서둘러 학원에 가서 자리를 잡아야 하는 아이들은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과 달리 여유롭게 가방을 챙기며 교실을 나설 준비를 하는 아이가 있었다.

“단유야. 오늘 야자 안 해?”

야자를 하겠다고 손을 들었던 한 친구가 물었다. 과중 1반의 아이들은 대부분 학원을 다녔지만 다니지 않는 아이가 없지는 않았다. 단유를 부른 소년도 그중 하나였다.

“볼 일이 있어서.”

“무슨 일?”

단유는 자신이 그 친구에게 모든 사정을 털어놓아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대답 대신 멀뚱히 바라보며 침묵으로 의도를 물었다. 그 시선에 소년은 괜히 뜨끔한 기분을 느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난, 그게…모르는 문제가 있어서 물어보려고….”

말끝을 흐리는 소년의 말에도 단유는 소년을 바라보다가 소년이 눈을 깔며 시선을 피하자 얕은 한숨과 함께 가방을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뭔데 물어봐. 대답해주고 갈게.”

“으응? 어, 그게…잠시만.”

애초에 그런 게 있지도 않았다. 그저 변명을 위해 내세운 핑계였으니까. 그렇다고 이제 와서 ‘거짓말이야’라고 고백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소년은 책상 서랍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아무거나 집히는 대로 꺼냈다. 다행히 ‘과학 II’ 문제집이었다. 대충 펼쳐서 눈으로 훑다가 자신이 풀지 않은 문제를 짚었다.

“이거. 잘 모르겠어서.”

단유는 눈으로 확인 후에 소년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펜을 집어서 문제 밑에다 풀이를 적으며 설명했다.

“1학년 때 배운 건데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나 보다. 복습을 제대로 해야 잊지 않을 거야.”

“으응. 알았어.”

단유는 간단한 물리 문제를 풀이해주고는 다시 가방을 집었다.

“단유야.”

“응?”

“어…저기… 내일 보자고.”

“그래.”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교실에 몇 남지 않은 아이들의 소리 없는 배웅을 받으며 교실을 나섰다. 단유가 나간 뒤, 가까운 곳에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던, 여드름 가득한 소년이 다가왔다.

“짬뽕. 쟤 어디 가는 데?”

“몰라.”

“그럼 너 진짜 문제 물어보려고 불렀던 거야?”

그럴 리가. 정원은 화장실에나 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중반은 애초에 2학급뿐이어서 3년간 지내다 보면 서로서로 모를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먹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정원과 단유는 그런 서먹한 관계가 아니었다. 서먹할 것도 없었다. 단지 정원이 단유를 어려워할 뿐이었으니까.

많은 아이들이 단유를 어려워했다. 1학년 때는 교실 안의 어느 누구보다 큰 덩치와 과묵함 때문에 단유에게 섣불리 말을 붙이는 아이들이 없었다. 성격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쉽게 사람을 판단하는 단세포들은 과중반에 없었다. 순진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도 피가 마를 정도로 괴롭히며 즐거움을 느끼는 또래 아이를 지난 3년간 겪어본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갖고 경계했던 아이들은 중간고사 이후, 보이는 것(?)과 달리 엄청난 수재란 사실에 경악했다.

그 이후에 몇몇 아이들이 단유에게 말을 붙여볼까 궁리하긴 했다. 하지만 쉬는 시간이든 수업시간이든 언제나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인 단유에게 말을 붙이기란 쉽지 않았다. 거기다 이런저런 사정 따지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말을 붙일 넉살을 가진 아이들이 과중 반에는 없었다. 딱히 단유가 아이들과 대화를 하기 싫어한 것은 아니었지만, 알게 모르게 생긴 거리감과 경계심은 단유를 은근히 따돌리는 분위기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1학년 내내 최상위 성적을 거두는 아이, 놀리거나 시비를 걸기 힘든 외형의 소년은 시간이 갈수록 도리어 경외심을 갖게 만들었다. 게다가 3년 내내 야자를 신청한 몇 안 되는 소년이었다. 모두가 조금이라도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학원을 수강하고 과외를 받을 때, 오직 단유만 학교에서 교과서와 남들 다 보는 문제집을 붙잡고 있었다. 심지어는 인강도 보지 않는 듯하니 아이들의 놀라움은 더 커졌다.

비록 30명, 2반 모두를 합치면 60여 명의 아이 모두가 단유에게 경외심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더러는 시기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투쟁심(?) 비슷한 감정으로 나란히 서 보려 하는 아이들도, 당연히 있었다.

2학년 때 같은 반이 된 정원은 단유에게 관심을 가진 소년들 중 가장 먼저 단유에게 다가가 말을 건 소년이며, 단유에게 투쟁심을 가졌던 소년 중의 하나였다.

“반갑다. 나, 최정원이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단유에게 다가가 손을 내민 정원. 단유는 정원을 바라보고는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래, 반가워.”

정원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겨우 단유의 손을 잡은 게 뭐라고 정원은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늘 고개 숙인 모습만 보다 이렇게 눈을 마주치니, 꽤 잘생긴 편이다, 라는 생각이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마냥 무뚝뚝할 줄만 알았는데.’

잠시 말없이 손잡고 있는 시간이 길었던 탓에 단유의 눈빛에 의아함이 깃들 무렵, 정원이 정신을 차리고 손을 놓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원이 입을 열었다.

“짬뽕 좋아해?”

말을 꺼낸 순간 교실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자신들이 들은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워하는 아이들. 그리고 잠시 후, 동시다발적으로 픽, 하고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오그라드는 선전포고라도 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던 아이들의 기대를 저버린 결과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는 순간, 정원은 발끝부터 올라온 부끄러움이 온몸을 휘감으며 눈을 하얗게 물들이는 기분이었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단유는 아무 말 없이 정원을 바라보았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정원은 소리높여 외치고 싶었다. 짬뽕이란 별명을 얻게 된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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