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48화 (548/956)

새벽이 밝으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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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단유와 명수는 그 전과 사뭇 다른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일단 명수는 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학교의 운동장과 부설 체육관에서 보냈다. 학교 수업보다 운동에 더 매진할 수 있게 되었고, 중학교 때보다 훨씬 체계적인 훈련 속에서 전보다 훨씬 치열한 경쟁을 거치며 주전에 올랐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실감 나더라.”

초등학교 때는 감히 말하건대, 그 누구도 명수를 축구에서 실력으로 능가하는 이가 없었다. 단연 독보적인 실력과 체력을 보유하였고, 그런 배경이 명수가 축구 선수를 꿈꾸는 데 도움을 줬다.

중학교에서도 그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선배들 중에서 명수보다 피지컬적으로 뒤처지지 않는 이들도 있었고, 실력 면에서도 명수와 엇비슷한 이들이 있었지만 그건 명수가 아직 어렸으니까 그럴 거라 생각했다. 명수는 계속 자라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고등학교, 그것도 각종 대회에 단골로 입상하는 명문 축구팀을 보유한 고등학교에서는 명수의 실력이 독보적, 이라고 표현하기 힘들었다. 명수보다 피지컬에서 훨씬 앞서는 무서운(?)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다년간 유소년 클럽에서 기술을 익힌 친구들도 있었다.

게다가.

“축구는 개인의 기량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

팀의 전술과 전략을 완벽히 이해하고 수행하기를 바라는 감독의 지침 아래에서는 단지 잘 뛰고 힘 좋은 선수들은 설 자리가 없었다.

“명수 넌 다 좋은데, 전술 이해도가 부족해.”

축구로 성공하고픈 아이들이 모인 가운데서 주전으로 발탁되는 것은 명수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축구에 관련해서는 머리 쓰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명수였기에, 그의 단점으로 지적된 부분은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흐릿해져 갔다. 대신 장점으로 부각된 피지컬은 점점 더 선명해져 감독의 기대와 동료의 신뢰를 쌓기에 충분했다.

비록 1학년 때는 쟁쟁한 선배들 때문에 경기에 많이 뛰지 못했지만, 2학년이 되면서 명수는 주전이 되었고, 큰 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3학년이 되고 맞은 춘계 대회에서 명수는 주장으로 뛰면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고, 타 학교는 물론 프로팀들의 스카우트들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몇몇 대학에서도 명수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예체능 특기 전형으로 들어오면 4년 장학금을 주겠다.”

때문에 명수는 꽤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하지만 4년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 타이틀을 목에 거는 것보다 프로로 입단해 빨리 커리어를 쌓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머리로 대학 가서 뭐해? 어차피 졸업장 이상의 것은 얻지도 못할 테고. 축구 하는 데 대학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머리 핑계를 댔지만, 사실 빨리 자리를 잡고 싶은 마음이 있음을 단유에게 고백한 명수였다. 물론 단유는 명수에게 별다른 조언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조언이 필요 없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 난 널 응원할 테니까.”

명수는 자신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단유는 과학 중점 학급에 운 좋게(?) 합격했다. 비록 지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중점 학급 학생의 선정은 추첨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고나 영재학교를 지원했다가 떨어진 아이들, 중학교 내내 단유에 버금가는 훌륭한 성적을 보인 아이들이라고 중점 학급에 반드시 들어갈 순 없었다.

단유는 최초 지원 시 고민을 했었다. 과학과 수학 중점 학급 중 어디를 지원해야 할까? 수학은 재미있었고, 과학은 자신의 성장을 도울 수 있는 학문이었다. 고민 끝에 단유는 과학 중점 학급을 골랐고, 운 좋게 합격을 했다.

“김단유입니다.”

첫날 각자 자기소개를 할 때, 아이들은 단유를 보며 특이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같은 교실에 모인 이들과 ‘종’이 다른 생명체를 보는 듯한 눈길들이었다.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운동을 좋아하니?”

30명 남짓한 아이들 중 단유보다 키가 큰 애들은 2명밖에 없었고, 그 두 명도 ‘우람하다’고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단유와 비교하면 젓가락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몸을 쓰기보다 머리를 쓰기 좋아하는 아이들에 대한 선입견일 수 있겠지만, 교실에서 단유 같은 덩치를 가진 아이는 별로 없었다.

떡 벌어진 어깨를 보며 선생님이 자신의 편견을 수정하기 위한 질문을 던졌고, 단유는 간단하게 ‘예’라고 대답했다.

아이들은 그런 단유가 ‘운 좋게’ 과학 중점 학급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런 아이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어서. 대학 입시에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지원하는 추세였으니까. 물론 그런 아이들은 한 학기, 혹은 2학년으로 올라가기 전에 일반 학급으로 이동하는 편이긴 했다.

그들의 생각은 중간고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운동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단유는 교실에서 조용한 편이었고, 수업시간에도 별로 튀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단체 활동 중에도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기보단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묻혀 있는 아이였으니까.

단유의 중학교 성적을 파악하고 있던 담임 선생님을 단유의 침묵을 의미심장하게 읽어나갔다.

“공부, 어렵니?”

단유의 성적은 눈에 띄었지만, 교실에 있는 아이들도 그에 못지않게 화려한 편이었고, 학교별 수준차를 고려하면 단유 만큼의 성적을 과시할 수 있을법한 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그래서 단유는 특별하되 특별하지 않은 아이였다.

“아니요. 괜찮아요.”

담담하게 대답하는 단유는 교육부로부터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 그의 활동 내역을 살펴보면 공부보다 오히려 예체능 계열에 더 관심이 많은 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만약 공부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간혹 자존심 때문에 자리를 지키려는 학생들도 있지만, 알아듣기 힘든 수업과 경쟁에서 도태된다는 스트레스로 인해 학급 변경을 신청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중간고사 이후, 상황은 반전되었다. 단유를 바라보는 시선도 180도 달라졌다. 호기심을 느낀 교과 선생님들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는 단유를 보며 몇몇 학생들은 위기를 느꼈고, 몇몇 학생들은 좌절을 느꼈다.

“쟤는 왜 여기로 왔대? 저 정도면 과학고를 갔어야 하는 거 아냐?”

“여기로 오고 싶어서 왔겠냐? 과학고 지원했다가 떨어졌겠지.”

자기가 그랬듯이.

“그럼 도대체 과학고에 붙은 애들은 얼마나 똑똑하단 소리야?”

“괴물들이겠지.”

“그런 줄도 모르고 과학고를 지원했던 내가 바보 같아.”

“인정.”

과학고 아이들은 상상 속 괴물이 되어버렸다.

한편 그 계기를 만들어 준 단유는 중점 학급에 들어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가졌다. 다른 무엇보다 조용한 교실이 마음에 들었다. 독서실에 틀어박힌 듯 30명 모두가 공부만 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다른 평범한 교실과 마찬가지로 수다를 떠는 친구들도 있고,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주도하는 친구도 있었다. 가끔은 짓궂은 장난을 치다가 멱살을 잡는 흉흉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전과 달리 힘을 과시하며 교실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이들은 없었다. 멱살 잡고 10분간 입술이 뜨거워질 정도로 침 튀기며 말싸움을 할지언정 주먹질을 하는 아이들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단유는 지난 어느 때보다 편하게 자기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과제에 허덕이는 친구들과 달리 자기 페이스를 지켜가며 과제와 개인 공부는 물론, 언젠가는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줄 통장을 채우는 일까지.

아, ‘언젠가는’이 아니라 ‘현재에도’ 통장은 그 쓰임새가 충분했다.

“단유야, 왜 이렇게 많이 사 왔어?”

“냉장고가 비었길래요.”

“또 네 돈으로 산 거야? 그러지 마라니까. 나한테 말해.”

“별로 안 비싸요. 오는 길에 저기 삼거리에 새로 개업한 가게에서 할인 행사하길래 사 놓은 거예요.”

“할인행사?”

“개업이라고 30% 할인행사를 하더라고요.”

“그래? ···그럼 좀 더 사 놓을까?”

“그 이상 사면 넣을 데가 없어요.”

“그렇겠지? 그럼 오늘은 이걸로 저녁 해 먹자.”

하은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단유가 사 놓은 스테이크용 고기를 꺼내서 조리를 시작했다.

****

두 아이와 마찬가지로 하은 역시 생활이 바뀔 수밖에 없었지만, 어떤 의미로 보면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도 볼 수 있었다.

“사회인이라는 게 다 그렇지 뭐. 출근해서 일당 채우고 퇴근해서 집에 기어들어가고, 엿가락처럼 늘어지도록 자다가 다음 날 일어나서 다시 출근하는 거. 다들 그렇잖아?”

“누가 들으면 되게 빠듯하게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니가 야근을 아니? 퇴근 시간에 맞춰서 공장에서 문제 있다고 클레임 걸려오면 퇴근도 못 하고 달려가서 고쳐질 때까지 옆에서 눈 부릅뜨고 있어야 하는 고충을 니가 알아?”

“넌 야근 하면 야근 수당이라도 받지. 나 같은 자영업자는 그런 것도 없다.”

“넌 니가 일한 만큼 벌잖아? 난 한 달 내내 몸 불살라가며 일해도 쥐꼬리만 한 박봉에 허덕여야 한다고.”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아있네.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하루 종일 자리 지키고 앉아있어도 손님이 없어서 굶는 처지다, 이것아.”

말을 시작한 건 하은이었는데 불이 붙은 것은 중형급 연구소에 취직한 친구와 얼마 전 퇴사하고 남편과 작은 가게를 연 친구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계속 회사나 다니는 건데, 건영씨가 괜히 바람을 넣는 바람에.”

“그 바람 아니어도 너 그만뒀을걸? 너 계속 그랬잖아? 결혼만 하면 때려치운다고.”

“말로는 뭔들 못하겠어? 그냥 해본 말이었지.”

한발 물러서는 자영업자 친구는 앞에 놓인 감자탕에 수저를 가져가며 시선을 피했다.

“퇴근 시간만 되면 괜히 와서 끈적하게 달라붙는 과장 때문에 돌아버리겠다며?”

연일 이어진 야근에 눈 밑이 검어진 연구소 친구가 몰아붙이니 얼굴이 붉어진 자영업자 친구는 입에 물었던 수저를 빼내며 흔들었다.

“말도 하지 마. 그 대머리 새끼, 상상만 해도···어우.”

“잘 그만뒀으면 됐지 뭐.”

하은이 그쯤 하라는 뜻에서 한 마디 꺼냈다. 그러나 새삼 생각났다는 듯 이를 가는 친구였다.

“그 대머리가 사장 라인만 아니었으면 확 찔러서 어디 처넣기라도 했을 건데.”

사장 라인이란 건 핑계일 뿐, 실제로 회사에서 벌어지는 성희롱과 성추행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방법이 찾지 못하던 친구는 결혼 후 깔끔하게 사표를 내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깔끔’한 방식이란 건, 친구만의 생각이었고, 하은과 다른 친구들의 입장에서는 답답하고 속 터지는 대응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술자리에서는 대범해질지라도 현실에서는 소심하기 그지없는 친구였다. 그나마 좋은 남자와 결혼한 덕에 친구들의 걱정은 덜었다.

대머리 과장의 흉측한 눈매와 어깨를 짚던 두껍고 짧은 손가락을 언급하며 몸을 한 차례 떠는 시늉을 보인 친구는 하은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넌 어쩔 거야?”

“어쩔 거라니?”

새로 옮긴 학원에서도 큰 갈등 없이 일을 맡을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지난 학원보다 더 많은 수입을 얻고 있는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런 하은의 말에 핀잔을 던지는 친구였다.

“누가 그런 거 따지니? 언제까지 그 집에 있을 거냐고.”

“집? 우리 집?”

“우리 집이랜다. 거기가 어떻게 니 집이야? 거기 애들 집이라며?”

“같이 사니까 우리 집이지.”

그 말에 연구소에 다니는 친구가 답답하다는 듯 자기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이. 언제까지 같이 살 거냐고?”

비록 술을 마셨고, 주변 사물에 잔상이 살짝 어릴 만큼 취기를 느끼고는 있지만, 하은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친구가 묻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토스트기에서 튀어나오는 빵처럼 곧바로 대답이 나오진 않았다. 그런 하은의 침묵을 읽은 자영업자 친구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도 이제 니 인생 챙겨라. 언제까지 애들 뒷바라지만 하면서 살 거야? 돈도 안 나온다며? 그런데 기껏 돈 벌어서 애들한테 바치는 건 좀 그렇지 않니? 니가 무슨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 자선 사업가도 너처럼 무식하게 다 퍼주진 않을 거다. 막말로 니가 걔들 엄마라도 되니? 걔들이 크면, 너한테 무슨 용돈이라도 줄 거 같애? 가족도 아닌데?”

가족, 이란 단어에 하은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친구는 그런 하은의 눈빛을 읽지 못했다.

“너 걔네들이랑 평생 살 거야? 아니잖아? 나중에 걔들이 커서 집 나가면, 그제서야 정신 차릴래? 그때 니 나이가 몇이나 되겠니? 그리고 결혼도 안 한 여자가 다 큰 남자애 둘이랑 같이 살면, 어느 남자가 너 좋다고 붙겠어?”

“미진이 너 말 잘했다. 하은아? 결혼 안 할 거야? 설령 결혼 안 한다고 해도 돈은 모아놔야 할 거 아냐?”

하은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친구들의 오지랖을 하은은 반길 수 없었다. ‘가족’을 들먹였을 때는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진지하게 자신의 미래를 고려하면, 그 미래의 어느 날에 하은은 두 사람과 같이 있는 모습을 그릴 수 없었다.

당연했다. 하은은 두 아이가 다른 사람 부럽지 않은 번듯한 가정을 꾸려 독립한 모습을 보고 싶으니까. 그리고 본인은, 그런 두 아이들에게 의지하여 노년을 보내고픈 마음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뒤의 자신은?

‘······.’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친구들은 어느새 결혼과 독신의 장단점을 비교하며 진취적이고 보람찬 여성의 삶에 대한 진지하고 쓸데없는 토론 배틀을 벌이는 중이었다. 하은은 앞에 놓인 잔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단유한테 애교 좀 부리면, 눈썹을 좁히며 꿀물을 타 주겠지?’

명수는 코를 막은 채 놀리면서도 의지할 수 있게 어깨를 빌려줄 테고.

하은은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을 그리며 잔을 들었다.

“막잔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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