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47화 (547/956)

새벽이 밝으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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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윽.”

“···뭐냐, 그 이상한 소리는?”

“안 피곤하냐?”

“피곤하지. 10시간을 계속 앉아 있었는데 안 피곤하면 그게 사람이냐?”

“난 눈이 침침하다. 뭐 좀 먹고 들어갈까?”

“앞뒤가 안 맞잖아? 눈이 침침한 거야, 배가 고픈 거야?”

“둘 다지.”

“으휴. 이 시간에 문 연 데가 있을까?”

“편의점에서 대충 때우고 들어가자.”

“그래.”

어슴푸레했던 아침 햇살이 빠르게 선명해지며 눈꺼풀을 제대로 뜨고 있기 힘들게 만든다. 눅진했던 새벽 공기가 시험 전날 벼락 공부했던 거 마냥 사라지고, 대신 부지런한 청소차의 굉음이 지나가며 기름진 머리를 뽐내는 베짱이 두 마리를 욕하고 지나갔다.

푸르스름한 턱을 가진 남자는 연신 목을 돌리며 피곤하다는 티를 냈고, 검은색 뿔테 안경을 낀 남자는 새벽 일찍 길을 나선 어르신들의 흘깃거리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걸음을 빨리했다.

“조금만 더 했으면 다이아 찍었을 텐데.”

기름진 뺨을 긁던 푸른 턱의 한 마디에 뿔테 안경이 키득거리며 받아쳤다.

“다이아 찍기 전에 키보드에 머리 박고 다이했을 거다.”

푸른 턱은 안경을 쳐다보며 눈을 찡그렸다.

“너의 어설픈 유머 감각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대중성이 결여된 유머감 만큼이나 순발력이 떨어지는 뿔테 안경의 친구는 그 말을 받아치지 못했고, 대신 100여 미터 앞에 문을 연 편의점을 발견한 뒤 말을 돌렸다.

“저기 있네, 편의점.”

“아, 진짜 배고파.”

편의점 문을 열었더니, 시원한 공기가 훅, 하고 밀려 들어왔다. 창고를 정리하고 있었던지, 아르바이트생의 목소리가 음료수 칸 너머에서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두 사람은 라면과 김밥, 햄버거와 도시락, 소시지와 샌드위치 사이를 오가며 치열하게 고민했고, 마침내 메뉴를 골라 계산을 끝낸 뒤 눈보다 빠르게 손을 움직여 조리를 끝내고 입안으로 허겁지겁 음식들을 밀어 넣었다.

“이 짓도 더는 못해 먹겠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햄버거를 검지와 엄지로 조심스럽게 집어 드는 뿔테 안경이었다. 그 말에 이미 먹을 것들을 앞에 펼쳐 놓고 먹을 준비를 하던 푸른 턱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가을부터는 하고 싶어도 못해. 공부해야지.”

“공부, 할 거냐?”

“뭐냐? 그 이상한 질문은? 취업하려면 공부해야지. 이제 곧 졸업인데.”

입속을 가득 채운 조미료 덩어리의 음식들을 우물거리던 푸른 턱의 남자는 탄산 부글거리는 검은 음료를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노량진 들어갈 거다.”

“노량진? 공무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뿔테 안경을 고쳐 쓴 친구는 남자의 옆모습―자세히 보니 뺨도 푸르스름하게 변한 친구였다―을 흘깃 본 뒤 햄버거를 베어 물었다.

“공무원이 대세는 대세구나.”

“집에서 성화라서.”

“그래도 니 인생이다, 인마. 집에서 가란다고 가냐?”

“집에서 뭐라고 하지 않더라도 갈 생각이었어.”

“너무 늦지 않았어?”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빠르다고 하지 않나?”

“늦었을 때는 늦은 거지, 무슨···.”

남자는 탄산음료 때문인지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숨을 길게 토해냈다.

“1학년 때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애들 보면서 그렇게 흉을 봤는데.”

“공무원시험 준비하는 애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 뒤, 샌드위치를 베어 물고 입가에 묻은 소스를 휴지로 닦아냈다.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에 들어왔으면, 적어도 자기 전공에 관한 공부를 해야 할 거 아냐? 전공 공부는 저 멀리 내버려 두고 공무원시험에나 몰두하는 사람들 보면서, 돈 아깝다는 생각 되게 많이 했거든.”

“내 욕 많이 했겠다?”

“넌 1달, 아니 보름도 안 했잖아?”

“여간 지겨운 게 아니라서 말이지.”

친구는 키득거리며 소시지를 입에 채워 넣었다. 불룩해진 볼이 열심히 씰룩이는 것을 보며 남자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 같아. 차라리 그때부터 공부해서 공무원이나 붙었으면 이런 고민도 안 했을 거고 스트레스도 안 받았을 건데.”

“그냥 계속 취업 도전하지그래?”

남자는 또 한 번 길게 숨을 토해냈다.

“붙을 거였으면 예전에 붙었겠지. 어지간하면 졸업하기 전에 취업하고 싶어서 졸업을 끌었는데, 이제 더는 안 되겠더라. 스펙도 안 되고, 점수도 안 되고. 진짜 대학 와서 헛돈만 쓴 거 같아서 집에도 미안하고. 그런데 집에서는 공무원시험이나 해보라고 하니, 거절할 명분도 없다.”

딸랑, 거리며 편의점 문이 열리고 검은 모자를 눌러쓴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 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관심 없어 보이는 핑크색 츄리닝의 그 여자는 이내 계산대에 선 알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목소리는 안 들렸지만, 알바는 뒤 진열장에서 담배 하나를 집어 건넸고, 여자는 미리 준비했던지 바로 지폐를 내밀어 계산을 끝내고 편의점을 나갔다.

그 모습을 흘깃 본 뿔테 안경이 물었다.

“야, 담배 남았냐?”

“아까 피시방에서 다 피웠잖아.”

“하나 사야겠네. 나가면서 내가 하나 살게.”

까끌까끌한 턱을 손끝으로 긁던 남자는 편의점 밖으로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는 사람이야?”

친구의 물음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반했냐?”

“미쳤냐?”

친구는 키득거리더니 시야 바깥으로 사라지는 여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 시간에 저런 츄리닝 차림으로 편의점 와서 담배를 사 가는 여자는 뭐하는 여잘까?”

“···관심 없어.”

“관심 없는 놈이 그렇게 지켜봤냐? 에이, 보니까 반했구만.”

“그런 거 아냐. 그냥 눈앞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이라 눈으로 좇았던 거뿐이야.”

그 말대로 그들이 앉아 있는 편의점에서 바라보는 바깥은 마치 정물화처럼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색바랜 담장 너머의 붉은 건물들은 물론이고 흔들림 없이 서 있는 가로등과 그 아래 누군가 던져 놓은 종량제 봉투의 쓰레기도 정물화 속 사과처럼 가만히 멈춰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된 흰색 중형차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기는 했지만, 그 빛마저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남친이 사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뭘?”

“담배. 그래서 심부름 나온 게 아닐까?”

친구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토요일 저녁 신나게 한잔 빨고 남친이랑 집으로 들어와서 새벽까지 쿵덕쿵덕하다가 숙취에 해롱해롱하며 일어났더니, 남친이 담배 심부름을 시키니까 짜증은 나지만 착한 여친이고픈 여자가 간단하게 츄리닝만 걸치고 편의점에 와서 담배를 사 간 게 아닐까?’라고 소설을 썼다.

“자기가 피우고 싶어서 산 것일지도 모르잖아?”

“에이. 그러면 재미가 없잖아?”

“무슨 재미?”

남자의 질문에 친구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대답했다.

“본래 이야기란 게 기승전결도 중요하고 개연성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캐릭터가 살아야 한다고. 남자의 무리한 부탁에도 싫은 내색 못 하는 여자. 그 자체로 뭔가 사연이 담겨 있잖아? 안 그래? 남자친구의 담배 냄새가 좋을 리 없지만, 그의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는 담배 심부름도 마다치 않고. 그런데 어느 날 여자는 자신의 남자에게서 낯선 여인의 향기를 맡았고, 머리가 홱 돌아간 여자는 복수를 꿈꾸며···.”

“됐다. 그만해라. 누가 3류 아니랄까 봐···. 니가 그러니까 여태껏 제자리라는 거야.”

“더 들어봐, 그러니까 그 여자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뒤를 조용히 밟는데, 남자의 집 앞에서 그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는 거야. 눈이 돌아간 여자가···.”

“어설픈 유머 감각도 모자라서 3류 막장 스토리냐? 그거 어따 써먹겠다고 그래? 내가 진지하게 충고하는데, 그냥 나랑 같이 노량진 들어가자.”

“두고 봐라. 조만간 충무로에서 내 이름 걸린 시나리오로 영화 한 편 나온다.”

“퍽이나.”

“그때 돼서 나한테 사정해도 난 모른다.”

“그 자신감으로 부디 성공하길 빈다.”

“고맙다, 친구야.”

넉살 좋게 웃는 친구의 말에 남자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남은 소시지를 친구의 입에 집어넣었다. 안경은 소시지를 우물거리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말했다.

“쟤들은 어떤 사연으로 이 시간에 저러고 있을까?”

남자가 시선을 돌리니 마침 눈앞으로 하얀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조깅하는 두 남자가 보였다. 짧은 머리, 땀에 젖은 흰 티셔츠 너머로 드러난 가슴 근육, 규칙적으로 엇갈리는 두 팔을 보아하니,

“운동선수?”

“어려 보이던데?”

얼굴을 다시 보기에는 이미 그 뒷모습만 눈에 들어오는지라 확인이 어렵다.

“그게 중요해?”

“캐릭터가 중요하다고 했잖아? 아무리 여름이라도 이제 겨우···6시를 넘긴 이 시간에 저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하는 이라면 뭔가 사연이 있지 않겠어?”

“사연은 개뿔. 솔직히 이 시간까지 밤새며 게임하고 편의점에서 아침을 때우는 우리가 이상한 거야.”

“누가 이상하댔냐? 그냥 사연이 있을 거란 이야기지. 상상해 보자고. 전혀 닮지 않았으니 형제일 리는 없고, 젊고 건강한 두 남자가 새벽부터 땀을 흘리며 길을 뛰어가는 모습을 보면 뭔가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아?”

“그 사이에 얼굴을 다 봤냐?”

“작가는 관찰력이 좋아야 하거든?”

“작가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개똥 같은 소리 말고 나랑 같이 노량진 들어갈 준비나 해. 너도 그동안 까먹은 시간 때우려면 어지간히 노력 안 하면 안 될 거야.”

“와, 진짜 우리 엄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리 엄마가 나한테 하는 소리다.”

두 남자는 앞에 널브러진 껍데기들을 모아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편의점을 나왔다.

“들어가서 바로 자야겠다.”

“지금 자면 일요일은 끝이네.”

“눈뜨면 저녁이겠지.”

“저녁이면 배고프겠지. 뭐 사갈까?”

“나중에 사자. 아, 잠깐만. 담배 사 올게.”

안경은 다시 편의점으로 뒤돌아 뛰어갔다. 먹을 건 안 사도 담배는 사야겠다는 친구의 집념에 푸른 턱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정물화 같은 새벽 거리에 햇살이 점점 차오르며 늦여름의 열기가 슬슬 올라오는 것 같았다. 물론 기분만 그렇다.

“자, 니 꺼.”

“땡큐.”

각자 담배 한 개비씩을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어떤 사람은 새벽 운동을 하면서 건강해지는데, 어떤 사람은 담배에 쩔어서 건강을 낭비하네.”

“그런 소리 할 거면 담배를 사질 말던가.”

“없으면 머리가 안 굴러가.”

24시간 국밥집 굴뚝처럼 담배 연기를 뿜어내던 두 남자는 걸음을 옮겼다.

“우리도 운동할까?”

“하면 좋지.”

“말로만?”

“우리가 그렇지 뭐.”

두 남자는 재밌는 농담이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 걔들은 운동선수였을 거야.”

“그렇겠지. 아니면 누가 이 시간에 이런 데서 달리기를 하겠어? 헬스장을 가면 모를까.”

“아니면 돈을 아끼려고 헬스장을 안 가는 것일 수도 있지.”

그들의 예상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한 사람은 분명 운동선수였으니까. 비록 아직 프로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단유야.”

“응?”

“우리도, 나중에, 편의점, 들러서, 뭐 좀, 먹을래?”

명수는 헐떡이는 와중에도 말을 이었다. 단유는 명수의 말이 아까 편의점을 지나갈 때 봤던 장면 때문임을 눈치챘다.

“지갑 안 들고 나왔잖아.”

“아, 그렇구나.”

명수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그런 거 먹으면 너 몸 버려.”

“그렇긴 하지.”

다시 두 사람 사이에 규칙적인 호흡 소리만 들렸다.

“단유야.”

“응?”

“아까 그 사람들, 되게 맛있게 먹는 거 같던데.”

편의점 앞을 지나가던 그 짧은 순간에 명수는 빠르게 그들이 먹던 음식 메뉴들을 훑어 내렸다. 한동안 몸을 만드느라고 못 먹던 음식들도 있었다. 가령, 햄버거라든가 콜라라든가.

“먹고 싶으면 먹어.”

단유는 절대 명수를 말리지 않았다. 애초에 누구도 명수에게 먹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명수 스스로가 ‘몸에 안 좋다더라’며 금식을 선언했던 메뉴들이었을 뿐이다.

“그치? 먹고 싶으면 먹어도 되는 거지?”

“응.”

“그래.”

명수는 입매를 다부지게 만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슬쩍 쳐다본 단유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마 명수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먹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 음식들이 자신의 몸에, 운동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동안에는 말이다.

반드시 최고의 선수가 되겠어, 라는 각오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명수였다.

1시간 이상을 달린 두 사람이 잠시 쉬기 위해 속도를 줄이며 걷기 시작했다.

“여름도 끝이구나, 드디어.”

명수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단유는 환하게 밝아진 하늘을 보며 대답했다.

“응.”

“내일부터 개학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마지막이잖아. 힘내.”

“하아. 이제 진짜 마지막이지.”

명수는 길게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마지막. 대학교에 들어간다면 또 계속 이어지겠지만, 어쨌든 고교 졸업 후 바로 프로 입단을 꿈꾸는 명수에게는 학창 생활의 마지막 여름이었다.

“할 수 있겠지?”

“그럼.”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할 수 있을 거야.”

단유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명수를 응원했다. 그에 명수도 히죽 웃으며 초롱초롱한 눈을 빛냈다.

“아! 따가워!”

눈에 땀이 들어가는 바람에 명수는 손등으로 눈을 거칠게 문질러야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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