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친구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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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랑 게임 빼고는 잘하는 게 없는 명수와, 집에서는 얌전하나 밖에만 나오면 촐랑대는 지태가 앞서고 친구들에 비해 자신감이 부족한 채윤과 연애 못 하는 단유가 뒤에 서서 향한 곳은 단유네가 새로 이사 갈 집이었다.
그동안 하은은 틈틈이 시간을 내서 집을 돌아보러 다녔고, 겨우 마음에 드는 집을 하나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모두가 모여 이사 가기 전 그 집을 미리 청소하러 가는 것이었다.
“우리 엄마가 새집 청소하러 갈 때가 제일 기분이 좋대.”
가기 전 분식집에 들른 네 아이는 지태가 원하던 떡볶이를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채윤이 빈 컵에 물을 따르며 말하자, 명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노라고 대답했다.
“아직 집에 가기 전인데도 이상하게 들뜨는 기분이야.”
이전에 오피스텔로 이사 올 때는 단유나 명수가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집이 구비 되어 있었고, 그 안에 가재도구까지 모두 갖춰져 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집은 커?”
“비슷해.”
“지금 사는 집이랑?”
“응.”
단유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얼마 전 계약하러 가는 날 하은과 함께 가서 집을 둘러보았을 때 단유는 그렇게 느꼈다.
“대신 거실이 지금보다 좀 더 넓더라. 그치?”
“응.”
“그럼 더 비싼 집인가?”
“집값도 비슷해.”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오피스텔이 아깝대. 그게 더 돈이 된다고 그러더라.”
채윤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물이 조금 차가웠던지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돈은 나중에 벌어도 되지만, 일단 지금 사는 집이 중요하니까 살기 좋은 집으로 골랐대.”
“선생님이?”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고. 어차피 명수 얘가 나중에 돈 엄청 많이 벌어올 텐데 뭐.”
마침 갓 나온 떡볶이를 포크로 집어 우물거리던 명수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눈을 크게 떴다.
“너 돈 많이 벌 거잖아?”
“응. 많이 벌 거야.”
지태가 명수를 음흉스럽게 실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얘, 나중에 돈 벌고 입 싹 닦는 거 아냐?”
명수가 코웃음을 치며 내가 그럴 애로 보이냐, 고 되물었고 지태가 응, 이라고 대답하면서 또 툭탁거리기 시작했다. 늘 보던 장면이라 별 흥미 없이 눈을 돌려 떡볶이를 집어 먹던 채윤은 다시 단유에게 물었다.
“학교는?”
“명수야 체육중점학급이 운영되는 학교라서 지원하면 붙을 테니까 문제가 없고, 나는 마침 가까운데 과학중점학급이 운영되는 학교가 있어서 거기 지원할 생각이야.”
“그렇구나. 다행이네.”
단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과학고나 특목고는 가지 않지만, 그 정도라면 충분히 단유도 만족할만한 수업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당 학교에 문의했을 때, 학교 측에서도 단유의 성적을 확인하고는 기꺼운 마음으로 입학을 종용했을 정도였으니까. 학교 측에서 보내준 팸플릿을 보고 하은도 괜찮다고 판단했다.
“경쟁과 과제에 치여 사는 삶보다는 낫겠지?”
굳이 그런 이유는 아니었지만 단유는 괜찮다고 판단했다. 비록 실질적으로 어떻게 수업이 진행되는지는 겪어보지 않아서 호불호를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팸플릿에 기재된 내용만으로 판단하기에는 적당히 관심 과목에 대한 호기심도 채우고 자신만의 시간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아마 인주고등학교로 갈 거 같아.”
인주고등학교는 장계중학교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로 장계고등학교와 함께 근처에서 가장 많이 가는 고등학교였다.
“가까워서 좋겠네.”
채윤의 집에서 가까운 편이라 아마 지금 타고 다니는 자전거도 필요 없을 정도이리라.
“혼자잖아.”
채윤의 대답에 순간 침묵이 흘렀다.
“야, 그렇게 말하면 다 혼자지. 나도 혼자 캐나다 가고, 명수나 단유도 다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잖아?”
“···그렇긴 하지.”
“원래 인생 혼자 사는 거라고 했어. 이제 우리가 코찔찔이 어린 애도 아닌데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맞어. 그리고 가서 또 새로운 친구 사귀면 되지.”
“난 말이야. 성격이 소심하고 낯도 많이 가린단 말이야. 혹시···왕따 같은 거라도 당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되고 그래.”
명수가 포크로 테이블을 찍을 듯이 하다가 단유의 눈짓에 멈칫거렸다. 하지만 입을 다물진 않았다.
“야! 너! 만약에 누가 너 괴롭히면 당장 말해. 내가 달려가서 다 때려눕혀 줄 테니까.”
“웃기네. 니가 무슨 슈퍼맨이야?”
“나만 있냐? 단유도 있어. 솔직히 지태는 도움도 안 되니까 신경 안 써도 되고.”
“내가 왜 도움이 안 돼?”
“너 싸움 잘해?”
“모든 일을 힘으로 해결하려는 그 무식한 생각부터 버려.”
“힘이 필요하면 내가 나서고, 머리가 필요하면 단유가 나서는 거지. 안 그래?”
“둘 다 내가 해도 될 것 같은데?”
“음, 그건 그래.”
명수의 빠른 인정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튼, 채윤이 너 그런 걱정은 하지 마라. 그리고 넌 성격이 좋고 눈치가 빨라서 금방 좋은 친구 사귈 거야.”
“눈치가 빠르다는 건 별로 상관없는 거 같은데?”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린다는 뜻이니까, 좋게 받아들여.”
단유의 대답에 채윤이 싱긋 웃었다. 그 모습에 지태가 초를 쳤다.
“좋댄다. 눈치만 빠르고 머리는 나빠서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그건 니 이야기고.”
“웃기시네. 네 이야기거든?”
“네, 다음 환자.”
“야!”
****
30여 분간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10분을 더 걸어간 뒤에야 단유와 명수가 내년부터 살게 될 집이 나왔다.
“5층이면 엘리베이터 안 타도 되겠다.”
“그런데 왜 넌 엘리베이터 기다리냐?”
“난 손님이니까.”
명수는 그게 무슨 논리냐며 지태를 타박했다. 명수 입에서 ‘논리’가 나온다며 지태가 놀란 척 놀렸고 두 사람이 입씨름을 벌이는 가운데 넷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렸다.
“왔어?”
미리 와 있던 하은이 앞치마와 마스크를 끼고 거실 가운데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이들이 인사할 때, 단유가 물었다.
“왜 혼자 하세요? 같이 하자니깐요.”
“먼저 온 김에 슬슬 하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너희들, 도와주러 와서 고맙다?”
“고맙긴요. 그동안 단유가 우리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요?”
명수가 ‘나는? 나는?’이라고 캐물으며 지태를 압박하는 동안 채윤과 단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이 훨씬 큰 거 같은데요?”
채윤의 감탄에 하은이 웃었다.
“아직 가구가 안 들어와서 그래. 들어오면 많이 좁을지도 몰라.”
“와, 먼지 많다.”
지태도 들어와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단유도 주위를 둘러보니 벽지는 나름 깨끗한 편이긴 해도 창틀이나 바닥에는 먼지가 많이 쌓여 있었다.
“원래 사람이 며칠만 집을 비워도 먼지가 쌓이는 법이야. 이렇게 안 되도록 너희 어머니들이 얼마나 고생하시는지, 너희도 알아야 돼.”
하은이 웃으며 지태의 말을 받아주었다.
사실 단유가 조금만 ‘힘’을 쓰면 금방 깨끗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하은이 ‘청소를 해야 한다’고 했을 때, 혼자 하겠노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너 혼자 못해’라며 하은이 말렸고, ‘우리 집인데 우리같이 하자’고 명수가 끼어들어서 결국 그러겠노라 했다. 그 후, 명수가 친구들에게 ‘새집 청소하러 간다’고 알렸고, 친구들이 오지랖 넓게 ‘도와줄게’라고 나서는 바람에 이렇게 다 같이 오게 된 것이다.
“뭐부터 하면 돼요?”
“일단은···뭘 할까?”
하은이 귀밑을 긁으며 되물었다. 하긴 손 볼 부분이 많아 보이긴 했다.
“일단 먼지부터 다 쓸고 나서 걸레로 닦아야겠지?”
“제가 저 방을 쓸게요.”
단유가 먼저 가장 큰 방을 가리켰다.
“그럼 난 저쪽 방.”
명수가 벽에 기대져 있던 빗자루 하나를 집으며 말했다.
“우린 거실을 맡을까요?”
“빗자루가 두 개밖에 없으니까, 너희는 대신 장갑 끼고 창틀 좀 닦아 줄래?”
“예!”
“그럼 쓰는 건 저희 둘이 다 할게요.”
그렇게 각자의 청소 영역이 지정되었다.
새집을 청소한다고 해서 이사 갈 준비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사전문업체에서 이삿짐을 옮겨 줄 것이기에 일일이 물건을 쌀 필요는 없지만, 가기 전에 자기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들을 구분해서 버릴 물건들은 미리 버리는 것도 일종의 청소였다.
중학교로 올 때야 워낙에 가진 짐이 없었기에 거의 맨몸으로 오다시피 했지만, 이제는 책이며 옷이며 가진 것들이 많아 골라내는 것도 간단하지 않았다. 특히 3년간 부쩍 몸이 자라며 옷장에 입지 않는 옷들도 많았다.
“깨끗한 옷들은 세탁해서 기부할까?”
“그러자.”
명수의 동의하에 자신들의 옷들을 모두 꺼내놓았더니 제법 많은 옷들이 나왔다.
“그동안 우리 이렇게 옷 많았구나.”
“대부분은 못 입는 거지.”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크면 못 입는 옷들 많겠다. 1년만 입고 버리는 옷들도 있겠는데?”
어느새 단유의 키는 180을 넘어섰고, 명수도 단유에 버금가게 키가 커서 180 언저리에 닿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사실 지금 입고 있는 옷들도 처음에 살 때는 꽤 큰 사이즈로 샀었는데 지금은 마치 몸에 맞춘 듯 딱 들어맞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명수는 작년에 산 패딩이 작아서 입기 불편해 보일 정도였다.
“명수 네가 키가 많이 컸어.”
하은이 명수의 옷들을 하나하나 들어 올려 보며 감상에 젖은 듯 말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 옷들은 모두 하은이 사 준 것들이었다. 두 사람 다 워낙 옷에 관심이 없어서, 아니 옷을 사는 일에 관심이 적어서 하은이 나서서 사 주기 전에는 불편해도 불편하단 소리를 내지 않았던 탓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일일이 옷을 맞춰 봐 주며 어떤 옷이 잘 어울릴지 고심하고 구매를 결정했던 옷들이었다. 그런 정성이 들었기에 기억하기도 하거니와, 같이 지내는 동안 아이들이 이렇게 잘 자라주었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감상적으로 변한 하은이었다.
“나도 내 옷 중에서 안 입는 건 좀 골라놔야겠어.”
하은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명수가 자신의 옷을 하나하나 고르는 모습을 보며 단유가 말했다.
“고등학교 올라간 김에 옷 좀 새로 살까?”
“돈이 어딨어.”
“살 돈은 있어.”
“그런데 돈 쓰지 마.”
명수는 무심하게 말했다.
“니 돈은 아껴서 나중에 필요한 데 써.”
“이럴 때가 필요한 거 아냐?”
“어차피 학교 가면 교복 입고 다니는 일이 많잖아? 그리고 나도 고등학교 올라가면 교복 아니면 체육복이나 입지, 사복 입을 일은 별로 없을 거야. 사복은 지금 옷으로도 충분하고.”
“그렇게 말하면서 먹을 걸 살 때는 안 말리더라?”
명수가 볼을 붉히더니 배시시 웃었다.
“먹는 건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잖아.”
“그건 그래.”
단유도 마주 보며 웃었다.
옷 말고도 정리할 것들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 방을 둘러보던 단유는 생각보다 짐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책만 해도 벌써 과일 상자에 담으면 두 박스 이상은 나오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물론 다른 집, 다른 친구들의 짐에 비하면 없는 편이긴 하겠지만, 단유에게는 그것도 많아 보였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던 몸이었으니까.
책들을 살피다 이번엔 책상을 바라보았다. 넓지 않지만 고급스러운 재질의 책상 위에는 LED 스탠드 조명, 그리고 자주 보는 몇 권의 책과 필기를 위해 준비해뒀던 노트, 펜 한 자루가 책상 위에 올려진 전부였다.
‘충분하잖아.’
바라보고 있자니 그동안 부족함 없이 살아왔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저 책상 앞에서는 부족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저 앞에 앉아 있을 때, 단유는 모든 걸 잊고 지식을 쌓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책상 밖을 벗어나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지만, 저 앞에서는 오직 책만 보며 집중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어쩌면 지금껏 겪었던 일은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일들이 자신에게 닥칠지도 모른다. 때로는, 자기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들 때문에 어려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책상에 앉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생각을 집중하면 어떤 일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생긴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확신 같은 것이 생긴다.
단유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에는 잡동사니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서랍을 끝까지 열고, 그 안에서 조그만 상자를 하나 집어 들었다. 손바닥만 한 상자는 종이로 만들어 투박하지만 단유는 소중하게 다루었다. 조심스럽게 상자의 윗부분을 들어 열었다. 그 안에는 낡은 나무로 조각된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가 담겨 있었다.
“······.”
이 세계로 건너올 때, 오로지 자신의 것이었던 유일한 물건이었다. 단유 본인도 정확히 언제 받았던 건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늘 목에 걸고 다녔던, 아버지의 ‘유품’. 한때는 그 목걸이가 자신을 지켜준다고 생각하기도 했었고, 품고 다니면 괜히 아버지가 같이한다는 기분도 가끔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힘을 가지게 되고, 낡은 목걸이라 분실의 위험이 있어서 더 이상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대신 서랍 깊숙이 넣어두고 가끔 생각날 때마다 목걸이를 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지켜보고 계시죠?’
단유는 목걸이를 한참 바라보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지만, 아버진 자신에게 말했었다. 기억하라고.
‘기억할게요.’
단유는 진심으로 그 의미를 되새기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