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44화 (544/956)

안녕, 친구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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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과 대화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단유는 책상에 앉아 펜을 꺼내 보았다. 낡았지만 관리를 잘한 것인지 펜의 겉면으로 검은 광택이 흘렀다. 앞머리를 돌려 펜촉이 나오게 한 뒤, 공책에 선을 그어보니 부드럽게 자국을 남긴다.

‘기억하기 위해 선물을 한다.’

교장 선생님이 펜을 건네며 했던 이야기가 떠오르자 문득, 단유는 자신이 줬던 선물을 받고 눈물을 보였던 그녀를 떠올렸다.

‘잘 지내고 있을까?’

도연과 촬영을 할 때, 그쪽 기획사의 대표님 덕분에 잠시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고작해야 곧 컴백한다는 짤막한 소식에 불과했지만. 그리고 이후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아 컴백 이후의 영향과 성과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미련 없이 보내기 위해’ 그녀에게 목걸이를 선물했다. 하지만 그 선물이 만약 ‘기억’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면, 과연 그녀는 자신에 대한 기억을 품은 채 지내고 싶을까. 단유 본인이야 그녀에 대한 기억을 오래 간직한다 한들 나쁜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에 대한 좋은 감정들과 좋은 기억들로 가득하니 잊고 싶지 않은 단유였다.

‘아, 어쩌면 그래서 선물을 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난, 당신을 기억하겠다’라는 무의식적인 의미가 그 선물에 담겨 있었는지도.

반면 그녀는, 단유라는 소년을 어떻게 기억하고 싶을까? 아니 기억 자체를 하고 싶어 할까? 그녀는 소년을 어떻게 생각할까?

밀려드는 궁금증에 단유는 저절로 핸드폰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

“체인 박스 빼버릴까?”

“그걸 왜 빼요? 위험하게? 그 위에 올려요, 그냥.”

“짐이 너무 많아서 그러지. 체인 박스만 빼도 상자 하나는 더 넣을 수 있겠는데.”

“그랬다가 만약에 눈이라도 내리면요? 길 위에서 사고라도 내고 싶어요? 난 그런 차 못 타요.”

까칠한 스타일리스트의 지적에 매니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공간을 만들기 위해 짐들을 이리저리 쌓았다. 겨우 짐을 정리했을 무렵, 헤어샵에서 스타일을 손보고 나오는 아이들과 마주쳤다. 발목까지 닿을 정도로 긴 패딩을 걸친 아이들이 매니저를 보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다 끝났어?”

“네.”

“얼른 타라. 춥다.”

“네.”

무대 의상까지 맞춰 입은 두 아이가 차에 오르고 난 뒤, 차는 천천히 출발했다.

“나윤아, 너 좀 피곤해 보인다?”

“저만 그런가요? 소영이 너도 졸리지?”

“아주 죽을 맛이다.”

공들인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도록 뒤에 편히 기대지도 못하고 있는 소영이었다. 스타일리스트가 그런 소영에게 둥근 공 모양의 쿠션을 건넸다. 소영은 ‘고마워요, 언니’라고 대답하고는 그것을 받아 앞으로 껴안았다. 뒤로는 기대지 못하니까 앞으로라도 숙여서 몸을 편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자, 너도.”

“고맙습니다.”

나윤도 그것을 받아 두 팔로 안았다. 안전벨트를 맨 탓에 자세가 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머리를 뉠 수 있는 쿠션이 있어 다행이었다.

“대전 행사는 별로 멀지 않으니까, 빨리 끝내면 오늘은 푹 쉴 수 있을 거다.”

“내일은요?”

“내일이 문제지. 지방 두 곳을 돌아야 하니까. 그러니까 쉴 수 있을 때 쉬어.”

“당연하죠.”

단유는 모르지만, 가디스R의 인기는 조금씩 입소문을 타고 오르는 중이었다. 사실 입소문이랄 것도 없는 것이 처음 데뷔할 때부터 실력파 가수라는 수련의 인기에 힘입어 등장한 탓도 있었고 의도치 않았던 바이럴 마케팅의 효과로 가디스R은 어느 정도 인지도를 타고 있는 편이었다. 수련의 탈퇴와 소영의 영입으로 잠깐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이후 컴백했을 때는 그런 초기 활동의 영향으로 시선이 모이기도 했다.

다행히 후속곡도 썩 나쁜 반응은 아니었다. 비록 가요 프로그램에서 1등은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팬카페에 가입하는 숫자가 조금씩 늘었고, 음원 순위도 썩 나쁘지 않은 수준으로 나왔다. 데뷔곡보다는 못했지만, 자체적으로 ‘선방’했다고 평가할 만한 수준이었다.

지방행사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부를 만한 인지도의 가수들이어서 지방행사도 많이 잡혔고, 그래서 공식 활동이 끝난 지금도 지방을 돌면서 작은 대학교나 축제 행사에서 모습을 보이곤 했다.

검게 선팅한 탓에 바깥 날씨가 온전히 보이진 않았지만, 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름 낀 흐릿한 날씨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오늘 눈 온다고 했나요?”

“늘 눈이 온다고 말들은 하지.”

매니저는 룸미러로 흘깃 본 뒤 물었다.

“왜? 눈이 왔으면 좋겠어?”

나윤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눈 내리면 보기야 좋지만 힘들잖아요.”

“그치? 나도 눈은 정말 싫어.”

“눈 싫어하는 사람이 많은 거 같아요.”

“이 바닥에서 눈 좋아하는 사람 별로 없을걸?”

스타일리스트도 대화에 끼었다.

“나도 싫어. 협찬받은 옷들 젖을까 봐 아주 신경이 곤두선다니깐.”

소영은 말없이 눈을 감고 쿠션에 고개를 기댄 채로 있었다. 잠이 벌써 들 리는 없겠지만, 마치 동면한 곰처럼 생체 에너지를 비축하는 모양새였다.

“갑자기 눈이 내리는 일만 없다면 좋겠어요.”

“왜? 사고 날까 봐?”

나윤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없잖아요.”

“마음의 준비?”

눈이 내리면, 그 사람이 생각나니까.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그에게 일방적으로 헤어지자고 했던 그 날이 떠오르니까.

그랬는데도 그 사람은 자신에게 고맙다며, ‘선물 같은 사람’이었다고 말하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졸업식 날 찾아와 목걸이를 건넸었다.

나윤은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잠시 만지작거렸다. 무대에 오를 때는 또 풀어야 하겠지만, 그 외에는 늘 착용하고 다니는 목걸이였다.

****

“예전에 어떤 책에서 보니까, 지구가 갑자기 빙하기로 접어들 수 있대.”

뜬금없는 지태의 발언에 명수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빙하기가 뭔데?”

“···야, 넌 책 좀 읽어라. 어떻게 빙하기도 모르냐?”

“그래서 그게 뭔데?”

“그러니까···갑자기 추워져서 전부 다 얼어버리는 거야.”

“겨울 되면 갑자기 추워지기도 하고 그렇잖아.”

“아니, 그런 추위 말고! 야, 니가 설명 좀 해줘.”

지태는 단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지구 전체 기온이 비정상적으로 떨어져서 전 지구가 빙하로 뒤덮이는 걸 말해.”

“전 지구라면, 지구 전체?”

“야, 그게 그 말이지! 아, 정말 이해력 완전 떨어지네.”

‘바보’란 단어가 섞인 핀잔이 이어지는 가운데, 단유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예전에 공룡이 멸종한 것도 이런 빙하기가 갑자기 찾아와서 적응을 하지 못한 공룡이 죽은 거라는 설이 있어.”

명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지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 빙하기가 어쨌다는 건데?”

“빙하기라는 게 예고하고 천천히 오는 게 아니라, 갑자기 찾아와서 온 세상을 얼려버릴 수 있다는 거야.”

“갑자기?”

“그래. 그래서 이렇게 걷다가 갑자기 빙하기가 찾아오잖아? 그럼 우리는 이렇게 걷던 자세 그대로 얼어서 얼음이 되는 거야.”

명수가 소리쳤다.

“대박!”

“대박은 무슨. 존나 무서운 거지.”

명수는 게임에서나 보던 이펙트를 현실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잠시 품었다. 그 사이, 채윤이 지태에게 물었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지태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며칠째 태양도 안 보일 정도로 흐리잖아. 눈도 안 내리고 춥기만 춥고. 이러다가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면서 세상을 얼려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거지.”

“그런 거라면 과학자들이 먼저 알지 않을까?”

“과학자들도 모를 수 있지.”

“어떻게 과학자들이 모를 수 있어?”

“과학자들이라고 다 아는 건 아니잖아?”

“다 아는 건 아니라도 빙하기가 온다는 건 알 수 있잖아?”

“모를 수 있다니까?”

“누가 그래?”

지태는 입을 열지 못했다.

지태가 그런 생각을 할 만큼 기이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뉴스 말미에 기상 캐스터가 일기예보를 전할 때 지구 환경 어쩌고저쩌고하면서 기이한 현상을 언급했지만, 여전히 매일 눈이 내릴 확률만 이야기하면서 ‘안전사고에 유의하셔야겠습니다’라는 멘트만 반복했다.

“날도 추운데 매운 떡볶이나 먹으러 갈까?”

“어제는 날이 추워서 우동을 먹고, 오늘은 떡볶이야? 내일은 뭔데?”

“내일은···돈까스?”

“그게 뭐야? 그냥 네가 먹고 싶은 메뉴만 고르는 거잖아?”

“그래서 싫어?”

“아니, 좋아.”

“그럼 가자.”

“응.”

지태와 명수가 룰루랄라 하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단유야.”

그 뒤를 걷던 중 채윤이 물었다.

“너희는 언제 이사 가?”

“아마 방학 시작하고 바로 갈 거 같아.”

“졸업식은?”

“그때는 선생님이 차를 태워주시겠지?”

“그럼 방학 때는 보기 힘들겠구나.”

가끔 놀러 올게, 라고 말했으면 좋겠지만, 단유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평소에도 어울려 놀기보다 집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많은 단유인데 여기까지 올 일이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가 너희들한테 나쁜 친구인 거 같다.”

“나쁘긴. 그게 당연한 거지. 그리고 네가 와도 보기 힘들걸.”

“지태는 캐나다에 가야 한다고 치고, 넌 왜?”

채윤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혹시 지난번처럼 합숙하는 학원, 뭐 그런 거야?”

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집에서는 그게 좋았었나 봐.”

스파르타식 학원에 맡겨 놓으면 학습 효율이 오를 거라고 생각했을까? 라며 조심스럽게 투정을 늘어놓는 채윤이었다. 차마 부모님께는 못하고 단유에게만 늘어놓는 채윤이의 소심함에 단유는 웃음을 지었다.

“학교에 보내고, 독서실에 보내고, 학원을 보내고, 인강 끊어놓고, 학습지 구독하고. 부모님들은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다들 공부를 잘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잘 할 거라고 생각하신다기보다는 그렇게 믿고 싶으신 거겠지. 피시방에 간 아들이 공부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을 거 아냐?”

“그런데 실제로는 공부 안 하는 애들이 더 많은데, 부모님들은 그걸 모르나 봐.”

단유는 볼을 긁적이다 말했다.

“사실 난 그런 부모님이 안 계셔서 모르겠지만, 우리 선생님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 일종의 믿음이 있는 게 아닐까, 라는 거. 저기, 명수가 평소에 공부를 잘 안 하고, 게임도 많이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명수에게 공부하라거나 게임 좀 적게 하라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아. 우리 선생님이 친부모가 아니라서?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선생님은 나나 명수를 믿는 거라고 봐. 알아서 잘할 거라고.”

“너희들은 잘하잖아. 너도 그렇고, 명수도··· 솔직히 명수는 잘 모르겠네?”

단유는 촐랑대며 앞서가는 명수의 뒷모습을 보며 대답했다.

“명수는 정말 열심이야. 축구 선수라는 자신의 꿈을 위해서 정말 많은 노력을 하지. 매일 새벽 운동하는 걸 거르지도 않았고, 연습 시간에는 게으름도 피우지 않아. 누가 시켜서, 혹은 누가 감시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걸 원하니까 열심히 하는 거야. 하지만 사람의 몸이다 보니 무리한 운동은 오히려 몸에 해를 끼칠 때가 많으니까 그걸 자기 나름대로 조절하는 거야. 너무 무리해서 다음 날 운동에 영향을 주면 안 되거든.”

명수가 다리를 다쳐서 운동을 강제로 쉬어야 했을 때, 남들에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얼마나 우울해했었는지는 단유가 똑똑히 지켜본 바였다.

“물론 공부도 잘하면 좋겠지만, 자기한테 맞지 않는 걸 어떡해. 그나마 최소한 필요로 하는 정도의 공부는 하고 있으니까.”

“넌 다 잘하잖아?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너까지 왜 그래? 나 못하는 거 많아.”

“네가 뭘 못하는데?”

“요리도 못 하고, 그림도 잘 못 그리고, 창의력도 부족하고, 축구 빼고는 해 본 운동 종목이 별로 없어서 잘 못 하지.”

“하면 잘 하지 않을까?”

“···연애도 못 하고.”

“아.”

두 솔로는 한동안 말없이 앞서가는 친구들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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