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42화 (542/956)

안녕, 친구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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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춥다. 자전거 못 탈 거 같아.”

“오늘은 타지 말자. 혹시라도 빙판길에 미끄러지면 큰일이니까.”

명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갑을 고쳐 끼고 오피스텔을 나섰다.

“와, 바람 봐. 자전거 타면 얼굴이 완전히 얼었을 거야.”

단유는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해 보기가 어렵겠네.”

“아까 뉴스에서 눈 내린다고 하지 않았나?”

“강설 확률이 60%라고 했었어.”

60%, 참 애매한 숫자지만 눈으로 본 아침 하늘은 90%라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목도리로 완전 무장하고 학교를 향하는 두 사람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잠시 후 저 멀리서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고 발을 동동 구르는 지태와 채윤을 만났다.

“빨리 좀 와.”

“급할 게 뭐 있다고 빨리 오냐?”

기말고사가 끝난 뒤, 등교 시간이 9시가 된 터라 여유로운 걸음이었다.

“작년에는 선배들 보면서 되게 흉봤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까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지태가 익살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학교 늦게 가는 거?”

“학교 늦게 가는 것도 그렇고, 수업 시간에도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안 받잖아?”

“수업을 안 받으니까 그렇지.”

명수도 지태의 말에 한마디 보탰다.

“난 어제 2시간 정도 내리 누워서 잠만 잤거든? 완전 꿀잠.”

“단유 너는 뭐 했는데?”

그러자 명수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얘가 뭘 했겠냐? 나 자는 동안 계속 책 읽고 있었지.”

“역시 단유다.”

“요즘은 무슨 공부 하는데?”

단유가 평범하게 고등학교 선행 학습을 하진 않으리란 생각에 채윤이 물었다.

“공부까지는 아니고, 이것저것 미뤄뒀던 책 읽는 거야.”

“무슨 책?”

“지금은 지구의 역사라는 책을 읽고 있어.”

“그게 뭐야?”

“지구라는 행성이 만들어진 후부터 최초의 인류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과학적 추론을 담은 책.”

지태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혀를 찼다.

“얘는 왜 이렇게 인생을 어렵게 사냐? 그냥 남들 다 보는 책 보면서 좀 즐겨.”

“무슨 책?”

지태는 명수에게 물었다.

“너희 반에는 판타지 소설 같은 거 보는 사람 없어?”

“있지.”

“그래, 그런 거 재밌잖아?”

“너도 많이 보냐?”

명수의 물음에 채윤이 대신 대답했다.

“얘 매일 핸드폰으로 결제해서 본다. 지금 가방에도 무협지가 잔뜩 있을걸?”

“얼마나 멋있는지 알아? 등평도수, 초상비, 답설무흔 응? 이렇게 팍팍 걸어가서 응? 이화접목으로 이렇게 푹! 공격하고 철판교로 피하고.”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팔자걸음으로 쑥쑥 나가더니 허공을 향해 팔을 휘젓는 꼴이 영락없이 취객이다. 허리를 숙였다 폈다, 허리 위로 올라가지 않는 발길질에 몸이 기우뚱거린다.

“넌 책보다 먼저 운동을 해야겠다. 완전 저주받은 몸이네.”

“그래서 무술 가르쳐 주는 체육관에라도 갈까 싶어.”

“무술? 그냥 MMA를 배우는 게 어때?”

“그건 싫어.”

“왜?”

“좀 무섭잖아? 배우다 보면 막 대련도 해야 할 건데, 대련하다 보면 맞기도 할 거고.”

“무술 학원에서는 안 맞냐?”

“야. 네가 잘 모르나 본데, 무술 학원에서는 그냥 형(形)만 가르쳐 줄 뿐이거든? 원래 무술이란 게 보여주기 식이지, 진짜 싸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대련 같은 걸 안 해.”

명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채윤을 바라보았다. 채윤도 모른다는 눈치로 고개를 저은 뒤 물었다.

“그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나? 유도를 배우든, 태권도를 배우든 다 대련하고 그러는데, 무술만 그런 걸 안 한다는 게?”

지태가 코웃음을 쳤다.

“진짜 무술이 대련 위주로 연습하는 종목이었다면, 벌써 MMA나 어디서든 써먹지 않았겠냐? 유도, 태권도, 주짓수, 레슬링 같은 건 다 MMA에서 써먹지만, 무술은 안 써먹잖아? 영화를 봐라. 그런 무술이 실제로 가능하겠냐?”

“그럼 실제로 써먹지도 못할 무술을 왜 배우려고 하는데?”

“멋있잖아? 그냥 보기에 멋있는 거니까 배우려는 거지. 운동 좀 했다고 싸움을 할 것도 아닌데, 그냥 보기에 멋진 걸 배우려는 거지.”

지태의 대답에 다들 코웃음을 쳤다.

“야! 솔직히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다 그런 거 아냐? 어디 써먹으려고 배우냐? 그냥 가르쳐 주니까 배우는 거잖아? 흥선대원군이 호포제를 실시한 걸 내가 알아서 어디 써먹어? 남들한테 자랑하려고? 나 이 만큼 안다고 자랑하려고 배우는 거잖아? 똑같은 거야.”

명수가 소처럼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호포제가 뭔데?”

“바보야, 지난번 시험에 나왔던 거잖아?”

“아. 그랬나?”

“몇 달이나 지났다고 그걸 까먹냐? 아무튼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

단유가 물었다.

“캐나다에 무술 학원이 있어?”

지태는 입을 다물었다. 빵 터진 명수를 째려본 뒤 입술을 삐죽이며 ‘꼭 배울 거야’라고 다짐하는 지태를 다독여주는 채윤이었다.

3학년 교실이 늘어선 복도에서 넷은 인사를 하며 헤어졌다. 교실로 들어가니 몇몇이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넸다.

“밖에 졸라 춥지?”

“완전. 이러다가 방학 때 어디 나가지도 못하겠어.”

“강제 방구석 폐인 각 나오지?”

“인정.”

여유롭게 걸어왔건만 교실에는 학생들이 반도 오지 않았다. 아직 9시까지 20여 분 정도가 남긴 했지만, 과하게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9시가 지나고 수업 시간이 되더라도 이런 분위기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선생님들도 딱히 수업을 진행하지 않을 테고, 대부분은 자율 학습이라고 선언한 뒤 교실을 나갈 테니까.

“시끄럽게 떠들지는 마라. 아래층에서 공부하는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라는 충고는 소귀에 경 읽기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단유는 이런 분위기도 썩 나쁘진 않았다. 누군가는 중학교 3학년의 수업 파행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겠지만, 학제 시스템이 이런 것을 어찌하겠는가. 분명한 목적의식이 상실된 교실에는 나태와 방만이 전염병처럼 퍼질 뿐이었다. 다만 단유는 그런 혼란 속에서도 통제받지 않는 조용한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할 따름이었다.

물론 모든 선생님이 학생들을 풀어주진 않았다.

“자! 다들 조용. 교과서 펴라.”

“아, 선생님!”

“진도는 나가야지! 진도 얼른 나가고 쉬자. 알겠어?”

교과서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진도를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선생님들은 수업을 꿋꿋이 진행했고, 그렇게 주장하는 선생님은 대체로 무서운 선생님들이어서 아이들은 조용히 수업을 받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대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앞 학생의 등 뒤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학생과 엎드려서 잠을 자는 학생, 만화책을 읽는 학생과 소설책을 읽는 학생들이 뒤섞인 교실 풍경이었다.

“통일이 되면 어디에 가서 뭘 할건지 서로 이야기를 하고, 발표하도록 하자.”

사회 선생님처럼 발표 수업을 맡기면, 선생님이 무섭든 무섭지 않든, 일단 야유를 보내며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그러나 졸업을 할 때까지, 아니 졸업을 하고서라도 절대 이기지 못할 사람이 바로 선생님이다.

“125페이지를 보면 북한의 지도가 나와 있지? 그 지도를 보면서 각자가 여행하고 싶은 코스를 한 번 짜보고, 그렇게 짠 이유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도록 한다. 알겠어?”

좋든 싫든 시킨 과제는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기에 아이들은 앉은 자리에서 조를 짠 뒤, 둘러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거 너무 말이 안 되지 않냐?”

“뭐가?”

“북한에 여행을 왜 가? 위험하고 볼 것도 없잖아.”

“외국 사람들도 북한에 여행을 가는데 왜 볼 게 없어?”

인터넷에는 종종 북한으로 여행을 간 외국인들이 촬영한 영상들이 업로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북한에서 허락된 곳만 갈 수 있는 거잖아? 다 꾸며진 곳. 영화 세트장같이.”

“맞아, 보면 대부분 평양이더라.”

“뉴스 보니까 평양 바깥으로는 먹을 게 없어서 나무만 캐고 먹는다더라. 그래서 산들이 대부분 민둥산이래. 그런데 뭐 볼 게 있겠어?”

“사막 보러 중동도 가는데, 그게 뭐 어때? 그리고 벌거벗은 나무를 보면서 배울 것도 있을걸?”

“자연 보호하자고?”

대답이 뻔한 이야기였다.

“아무튼 각자 제일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단유가 이야기가 엇나가는 것을 막고 주제를 잡았다.

“내래 아오지 탄광에 가고 싶어요.”

한 아이가 어색한 북한 사투리로 물꼬를 트자, 다른 아이들도 이야기를 쏟아냈다.

“나는 청진 수용소 가고 싶어. 거기가 현대판 아우슈비츠라던데.”

“미친 새끼. 너 거기 가면 바로 잡혀가 죽을걸?”

“아오지 탄광은 안 잡히냐?”

“거기는 산이니까 숨어서 보면 안 잡힐 수도 있지.”

“무슨 스파이냐? 숨어서 다니게?”

“나는 풍계리 맞나? 거기 가서 핵실험 하는 거 구경하고 싶다.”

“야 이 똘아이 새끼야. 그거 구경하다 너 골로 가.”

“죽을 때 죽더라도 핵은 한 번 보고 죽어야지.”

“지랄하네. 방사능에 오염돼서 피부에 진물이 철철 넘쳐봐야 아,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후회할 녀석이네.”

“그럼 너는 어디 가고 싶은데?”

“난 그냥 평양 가서 얌전히 구경하고 올란다.”

“얌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평양광장에서 ‘김일성 개새끼야’하고 할 놈이다.”

명수는 배를 잡고 웃다가 문득 단유가 뭔가를 계속 쓰고 있다는 것을 본 후 물었다.

“넌 뭘 계속 쓰고 있는 거야?”

단유가 펜을 멈추고 말했다.

“니들이 말하는 걸 다 적고 있었지.”

“그걸 왜 적어?”

“발표할 거잖아?”

“다 농담으로 말한 건데 뭘 그렇게 진지하게 그래?”

단유도 진지하게 답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중에 선생님이 발표시켰을 때 말할 게 없을 거야.”

토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도 아이들이 진지하게 선생님이 내준 과제를 이행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니 이런 거라도 적어야 한다는 단유의 말에 아이들이 맞장구를 쳤다.

“괜찮잖아? 어차피 점수 매기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북한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데 어딜 가고 싶다고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안 그래?”

그 말에 다른 한 학생이 동의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북한이랑 통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어차피 알지도 못하고 갈 수도 없는 곳인데, 마치 버킷리스트 작성하듯 진지하게 할 필요가 있냐는 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풍계리는 아니다. 어쩌면 북한에서 제일 감시가 심한 곳이 그쪽일 텐데, 거기 가면 너 바로 총살당할걸?”

그때 한 아이가 교과서의 지도를 짚으며 말했다.

“백두산은 가보고 싶지 않냐?”

“그건 지금도 갈 수 있잖아?”

“어쨌든 북한 지역 중에 갈 수 있는 곳을 고르라고 했으니까, 거기 가고 싶다고.”

“백두산 중국 거 아냐?”

“백두산이 왜 중국 거야?”

“북한이 군사비 마련하려고 백두산 팔았다던데?”

“나도 들었어.”

“반만 중국 거고 반은 북한 거라던데.”

정확한 사실을 모른 채 이러지 않을까, 저러지 않을까 하던 아이들은 단유를 바라보았다.

“6.25 전쟁 이후에 조중변계조약을 맺었는데, 그게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정하는 조약이었어. 그 조약에 따라 국경선이 천지의 가운데를 지나게 되면서 중국이 백두산의 반을 자신의 지역이라고 선포하게 되었고, 지금은 중국이 관광사업을 유치하면서 백두산에 올라갈 수 있게 해서 그런 유언비어가 퍼진 거야.”

아이들은 궁금증을 해소해서 시원해진 얼굴로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난 백두산 가면 천지 괴물이 있는지 보고 싶어.”

“무슨 괴물?”

“모르냐? 천지가 엄청 깊잖아? 그래서 거기 어떤 생물이 사는지 아직 아무도 모른대. 그런데 거기 관광을 갔던 사람들이 네스 호의 괴물처럼 황소 머리를 가진 괴생물체를 봤다잖아.”

“진짜?”

“일종의 미스터리지만 사실일 수도 있지. 아무튼, 확인된 바가 없으니까 가서 직접 보고 싶다는 말이지.”

아이들은 다시 단유를 돌아보았다.

“나라고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냐.”

“단유가 모르는 것도 있구나.”

“애초에 내가 다 알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야.”

아이들은 고개를 주억거리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수업이라는 생각에 질색하던 아이들도 어느새 몰입해서 대화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며 단유는 이런 수업 방식이 확실히 재밌구나,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리고 시키지도 않은 서기 노릇을 하며 계속 아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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