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yes on me(6)
-------------- 541/952 --------------
“그러고보면 말이야. 우리 왜 진작 이런 걸 안 했나 몰라.”
“이런 거라니?”
“뭔가 기억에 남을 만한 것들.”
아쉬움이 가득 담긴 지태의 넋두리는 계속 되었다.
“그동안 우리, 같이 있었던 시간도 많은데, 왜 이런 걸 안 했나 싶어. 기껏 해봐야 피시방에 가거나 햄버거나 먹으러 돌아다니는 일밖에 없었잖아.”
“그게 뭐 어때서? 그런 것도 다 기억에 남는 일이고, 추억이야.”
“그럴 수도···있겠지.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여름방학 때 했던 자원봉사나 이런 자전거 하이킹 같은 건 나중에 오래 기억에 남을 거 같은데.”
명수는 지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지태의 머리카락 끝에 달려 있던 땀방울들이 아래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난 말이야, 세월이 얼마나 지나더라도 다 기억할 수 있을 거 같아. 같이 피시방 가서 라면 먹었던 거, 보드 게임방 가서 소리 지르면서 놀았던 거, 우리 집에 다 같이 모여서 문제집 풀던 거. 아침마다 함께 등교했던 일들 전부 말이야. 왜냐하면 그게 다 너희들과 함께 했던 일이니까.”
지태가 고개를 들어 명수를 바라보았다. 명수는 햇살에 반짝이는 한강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뭘 했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한 거라고, 난 생각해. 너희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즐거웠고, 그래서 오래오래 기억할 거야.”
지태와 채윤은 잠시 명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지태가 어깨를 털며 명수의 팔을 뿌리쳤다.
“이 새끼는 더워 죽겠는데, 팔을 올리고 있어?”
“응?”
채윤도 한마디 보탰다.
“단유랑 같이 지내다 보면 명수도 저런 말을 할 줄 알게 되는구나. 역시 친구는 가려서 사귀어야 하는 거야.”
“너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이렇게 멋진 친구들 만나기 쉽지 않을거 거든. 게다가 예쁜 여자친구까지. ···말하고 나니까 열 받네. 난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명수는 지태와 채윤의 농담에 발끈하며 손을 내저었다.
“이 새끼들이, 좋은 말을 해줘도 그래?”
“니가 좋은 말을 하니까 이상해서 그러잖아. 네 캐릭터대로 가자.”
“내 캐릭터가 뭔데?”
“단순 무식?”
“이 자식이!”
채윤을 가운데 두고 빙글빙글 도는 두 아이를 보며 멀리서 단유가 혀를 찼다.
“기운도 좋네.”
단유는 음료수와 간단히 당을 보충할 간식거리를 담은 비닐 봉지를 들고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
비록 집에 있는 스피커는 조악한 품질의 것이었지만, 일요일 아침 여유를 부리며 클래식 감상을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조금 쌀쌀한 거실 온도 때문에 방에서 담요를 하나 가져와 배를 덮은 뒤 소파에 반쯤 드러누운 자세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하은이었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다는 핑계로 게으름을 피울 순 없었던 하은은 핸드폰으로 이사 갈 집을 찾아 검색했다. 지역과 가격대에 맞는 방들은 많았지만, 선뜻 마음에 드는 집을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사이트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면 대충 어떤 구조인지는 알 수 있지만, 구매의욕을 돋우기 위해 정성 들여 찍었을 게 뻔한 사진들을 보며 판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적당한 위치의 집을 몇 개 물색해 놓아야 발품 파는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세상 편한 자세로 여유롭게 핸드폰을 보던 하은은 문득 배가 고파졌다.
‘뭘 먹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고민은 메뉴를 고르는 것, 이라는 말을 친구가 한 적이 있었다. 그 친구를 따라다니며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을 섭렵했었지만, 최근에는 그런 호사를 부릴 기회가 별로 없었다. 최근, 이라고 표현하기보단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난 뒤, 라고 해야 옳겠다.
물론 배달 음식도 종종 시켜먹기도 하고, 밥 대신 치킨이나 피자로 대신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하은은 아이들을 두고 따로 나가서 식사를 한 적이 거의 드물었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철칙도 없건만 괜히 식사는 아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늦은 저녁을 먹을 일이 있어도 집에 돌아와서 먹곤 했다.
그러다보니 지금처럼 혼자 집에 있는 경우에도 하은은 나가서 먹기보단 안에서 간단하게라도 먹는 걸 선호하게 되었다. 가끔 이런 생활을 알고 있는 친구와 이야기를 주고 받다보면 ‘집순이’라고 놀리는데, 집순이면 어떤가? 돈도 아끼고, 집도 지킬 수 있으니 일석 이조다. 밥이야, 그저 배고픔만 잊을 수 있을 정도로 먹기만 하면 된다.
“너 아줌마 다 됐구나?”
친구의 놀림을 칭찬으로 들으며 웃었던 하은은, 괜히 오늘따라 기분을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넓은 거실에, 홀로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편한 자세로 드러누워, 클래식을 들으며 여유를 부리는 이 시간의 안락함을 이어가고 싶었다.
나가서 먹으면 좋은 점이 여러 가지다. 일단 집에서 설거지를 안 해도 되고, 혼자 청승을 떨지 않아도 되며, 그동안 잊고 있었던 미각을 자극할 수 있다.
‘그래, 어차피 나가서 방도 봐야 하는데 나가서 먹자.’
하은은 자신의 욕구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여러 핑계로 자신을 설득했다. 귀찮지만 예쁜 옷도 입고, 일요일이지만 화장도 좀 하고, 차를 타고 이동할 테지만 그래도 보기 좋은 구두도 신어본다.
“남자만 있으면 딱인데.”
이런 모습을 보면 친구들이 분명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것이다. 그럼 자신은 이렇게 대꾸할 테고.
“남자는 무슨.”
“너 연애 안한 지 얼마나 됐어?”
“알면서 묻는 거지?”
“너도 이제 연애 좀 하고 그래. 언제까지 처녀 아줌마로 늙을래? 그러다가 진짜 시집 못 간다?”
“때가 되고 운이 맞으면 가겠지.”
“속 편한 소리 하고 있네. 강제 독신주의자가 되고 싶지 않으면 제발 좀 집에서 나와서 돌아다녀. 니 얼굴에, 니 몸매에 뭐가 부족해서 남자를 안 만나니?”
“머리도 좋지.”
“남자들은 머리 좋은 여자 안 좋아한다던데?”
“그건 사람마다 다르지.”
“머리가 좋든 말든, 그런 건 하나도 안 중요해.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뭔데?”
친구는 자신의 턱 아래로 브이자를 만들어 보였다.
“예쁜가, 안 예쁜가.”
하은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친구는 역정을 냈다.
“뭐니 그 반응은? 내가 못생겼다, 이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남자들이 꼭 외모로만 판단하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서 말이야. 사람이 여러 부류가 있듯이, 외모만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모를 보지 않고 마음을 보는 사람도 있을 거야.”
“그건 니가 남자를 몰라서 그래. 그런 이야기 안 들어왔어? 남자는 10살 때도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80살에도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고. 남자는 단순한 동물이라 얼굴만 예쁘면 만사 오케이라고.”
예전에는 하은도 남자에게 관심이 있었던 때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공부와 성적에 집중하느라 몰랐지만,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남자 동기와 선배들로 둘러싸여 여왕 대접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 때는 좀 더 잘보이고 싶고, 좀 더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신경을 썼었다. 화장도 배우고, 얼마 안 되는 용돈을 모아 비싼 브랜드의 옷도 사서 입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외모가 다른 친구들에게 결코 꿇리지 않는, 조금 과장해서 꽤 뛰어난 편 임을 자각했었다. 그래서 더 치장하고 말과 행동을 의식적으로 주의하며 다녔다.
그때는 어딜 가든 주목받는 하은이었고, 그런 주목이 자연스러웠고 즐거웠던 적도 있었다.
하은은 고개를 저었다. 모처럼 제대로 꾸민 모습으로 거울을 보고 있다 보니 괜한 잡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되는 게 어딨어. 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될 거야.’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결혼, 연애는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하은은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호빵이 어슬렁거리며 현관 앞까지 와서 꼬리를 흔들다가 하은의 인사를 받은 뒤 문이 제대로 닫히는 것까지 확인 후,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소리까지 들은 후 다시 자신의 방석으로 돌아왔다.
이제 눈치 보지 않고 계속 잠을 잘 수 있겠다.
****
“일단 점심 먹고 가자.”
“이걸로?”
“아니, 이건 나중에 달리다가 배고프면 먹으려고 미리 사놓은 거고, 밥은 제대로 먹자.”
음료수로 갈증을 해결한 뒤에도 벤치에서 일어날 줄 모르는 친구들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우와, 바지에 땀 찬 거 봐.”
“난 여기 멍든 거 같은데?”
“난 발목도 아퍼.”
명수가 혀를 찼다.
“너희 둘 다 평소에 얼마나 운동을 안 했으면 그러냐? 얼른 일어나.”
끝내 두 사람을 억지로 일어서게 만든 뒤, 넷은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일단 저기로 나가서 올라가면 식당가가 있다니까, 가 보자.”
“오케이!”
명수가 일부러 기운찬 목소리로 흥을 돋우며 앞장섰다. 그 뒤를 힘없이 페달을 굴리는 지태와 채윤이 따라가고, 단유는 가장 마지막에 섰다. 시원한 강바람이 등을 밀어주니 등줄기에 흘렀던 땀이 식으며 기운이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넷의 자전거가 한강 자전거 도로 위를 달렸다. 자전거 도로는 그리 넓진 않았지만,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사고 위험 없이 안전하게 달릴 수 있게 꾸며져 있었다. 강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건 썩 나쁘지 않다, 고 아이들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단유의 옆을 씽, 하고 지나가는 검은 물체가 있었다. 뒤에서부터 다가오는 소리를 느끼고 있었던 단유는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았지만, 지태나 채윤이는 옆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사람의 자전거에 놀라서 비틀거렸다.
“뭐야, 저거!”
경주용 자전거인지 얇은 프레임의 검은 자전거를 힘껏 밟으며 지나가던 그 사람은 단유네 뿐만 아니라 앞서 길을 가던 다른 사람도 위험할 정도로 가깝게 붙어서 지나갔다. 위아래 운동복과 안전 헬멧까지 검은색으로 통일을 해서 오히려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관종이야?”
지태가 넘어질 뻔한 것을 앞서 가던 명수가 재빨리 자전거를 멈추고 내려서서 잡아주었고, 채윤이는 자전거 도로 옆 인도의 울타리를 박을 듯이 비틀댄 뒤에야 멈춰 섰다.
“괜찮아?”
“응.”
그러면서도 화가 난 눈으로 검은 자전거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 뭐야? 진짜. 다칠 뻔했잖아?”
“저거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옆에서 산책하던 사람들도 그 광경을 봤는지 수군거렸다. 단유는 채윤의 위아래를 살피며 진짜 괜찮은지를 확인한 뒤에야 멀리 시선을 던졌다. 얼마나 빨랐던지 벌써 작은 점이 되어 버린 로드파이터(Road fighter)였다.
“저런 놈들이 있으니까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욕을 먹는 거야.”
천천히 자전거를 끌고 가다 보니 앞서가던 사람들이 자전거를 세우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사람은 자전거를 눕혀 놓고 인도 부근에 앉아 있었는데 무릎에 먼지가 묻은 것이, 아무래도 넘어졌던 모양이었다.
“너희들은 괜찮니?”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넷을 둘러보며 물었다.
“예. 다행히 큰일은 없었네요.”
“쯧쯧. 하여튼 세상이 어찌 되려고 저러는지, 별 미친놈들이 다 있다니까.”
“자기 생각만 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아요.”
“ISS 같은 놈들이네.”
“북한 빨갱이 같은 놈들이죠.”
“하여튼 저런 놈들을 모조리 체포를 하던지, 구속을 시켜야 돼. 저것도 범죄야, 범죄.”
“그럼요. 자기는 부딪치지 않았다고 변명을 하겠지만, 위협 운전도 범죄라고요.”
단유와 아이들은 자전거를 붙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단유가 용기 내서 말했다.
“저희 좀 지나갈게요.”
“어, 그래. 지나가.”
“네.”
단유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앞장설게.”
어차피 단유가 길을 아니까 단유가 앞장서는 게 맞다. 단유는 조금 더 길을 따라 가다가 공원 위로 건너갈 수 있는 건널목에 이르렀다. 그때 저 멀리서 세차게 달리는 검은 자전거가 눈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었다. 아니, 우연이라고 치부하기도 뭣한 게, 저 사람은 저렇게 달리는 게 재미있는지 웃으면서 반대편의 사람들, 그러니까 자기가 뒤에서 위협하고 지나갔던 사람들을 흘겨보며 페달을 밟는 중이었다. 자전거를 타던 사람들 중 어떤 이는 고개를 돌려 검은 자전거를 향해 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 사람 또 오네?”
“미친 거 아냐?”
“동영상 보니까 자전거 던져서 잡는 것도 있던데, 한 번 잡아볼까?”
단유가 지태를 말렸다.
“그러면 특수폭행으로 너 잡힐 거야.”
“칫.”
단유는 다가오는 남자를 보다가, 마주치기 전에 자리를 피하는 쪽을 선택했다.
“빨리 가자.”
“그래.”
단유와 아이들은 방향을 꺾어 안쪽 샛길로 들어갔고, 그 후에 검은 자전거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 자리를 지나갔다. 단유가 잠시 속도를 늦추고 뒤를 흘깃 보았다.
물론 무슨 사정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가난한 경륜 선수라서 누구나 다 이용하는 한강 공원을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자전거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자기 뜻대로 자전거가 움직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진짜 누구 말처럼 미쳤거나.
어쨌든 저대로 두면, 누구에게든 또 피해를 입힐 것 같았고, 자신을 비롯, 친구들을 위협했던 그가 즐거워하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으아악!”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지태나 채윤도 자전거를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 검은 자전거 사내가 머리를 감싸 쥔 채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살려 줘! 살려 줘!”
지태가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왜 저래? 진짜 미쳤나?”
단유는 다시 자전거 핸들을 잡으며 말했다.
“헛것이 보이는지도 모르지. 가자, 얘들아.”
제자리를 맴돌며 기고 있는 꼴에 그 근처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원했던 것이 만약 시선 집중이었다면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