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yes on m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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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둘러보며 구경에 여념이 없던 아이들의 정신을 돌려놓은 것은 상미의 물음이었다.
“야, 너희는 뭐 없어?”
“뭐?”
“단유는 우릴 위해서 이렇게 해줬는데, 너희는 뭐 없냐고?”
지태가 케이크를 들어 보였다. 상미가 코웃음을 쳤다.
“그걸로 퉁 치려고?”
지태는 채윤의 다른 손에 들려 있던 봉지를 들어 보였다. 과자와 음료수 등이 가득 담긴 봉지였다.
“니들한테 뭘 바라냐.”
상미가 손을 좌우로 흔들어 보이며 혀를 찼다.
“넌 왜 우리한테 상의도 안 하고 이런 걸 준비해서 사람을 당황시켜?”
“이게 뭐 별거라고.”
단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며 아이들을 거실로 데려왔다.
아이들은 먹을 걸 깔아놓고 수다를 떨거나 게임을 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비록 명수와 상미의 100일이라는 핑계는 있었지만, 중간고사를 무사히 끝낸 아이들의 뒤풀이 같은 것이었다. 단유도 그 사이에서 밝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다 같이 모여 노는 것도 앞으로는 힘들 테니까.
우습게도 아이들은 그 뒤풀이를 끝으로 다시 기말고사 준비에 들어갔다. 1, 2학년은 12월에 기말고사가 있지만, 3학년은 11월에 기말고사를 본다. 때문에 시험 범위가 작아 공부하는 게 크게 부담스럽진 않다. 하지만 시험이라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인지라 아이들은 결코 그 사실이 반갑지 않았다.
게다가 일부 학생들은 아예 기말고사를 신경 쓰지 않았다. 과학고나 외고, 국제고나 자사고 같은 학교에 지원하려는 학생들에게는 2학기 기말고사가 고입 전형 성적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또한 특목고가 아닌 공업, 상업 계열 특성화고에 진학을 결심한 아이들도 기말고사에 별로 관심이 없는 모습이라, 결국 기말고사는 상당히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지게 되었다.
“우리 학원 원장이 그러는데, 기말고사 잘 쳐야 한대.”
“왜?”
“고등학교 입학하면 바로 전국연합학력평가를 치는데, 범위가 중학교 과목 전 범위래. 그래서 그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기말고사 범위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나?”
“그거 그냥 상술 아냐? 학원 빠지지 말고 계속 비싼 학원비 내면서 공부하라는?”
“그럴 수도 있지. 그렇다고 없는 말은 아니잖아?”
“우리 학원은 벌써 고등학교 과목 가르치는데.”
“기말고사는?”
“몇 주 전에 끝냈지. 기말고사는 범위가 넓지 않아서 시험 1주일 전에만 바싹 하고 그다음에는 다시 고등학교 진도로 넘어간다네.”
“피곤하다, 피곤해. 난 공부가 체질이 아닌가 봐.”
“누군 체질이라서 하냐? 다 그냥 하라니까 하는 거지. 우리 반에서 공부가 체질인 사람은 단유 밖에 없을걸?”
그 말에 모여서 수다를 떨던 아이들이 교실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언제나와 같이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단유였다.
“왜 과학고 안 간대?”
“나라면 과학고 대신 사립고 갈 건데.”
“사립고든 과학고든 단유 정도 성적이면 장학금 받으면서 다닐 수 있지 않을까?”
“그건 모르지.”
“왜?”
“그런 데 가는 애들이 보통 애들이겠냐? 다 자기 학교에서 단유처럼 전교 1등만 하는 애들일 텐데. 그런 애들이 모여서 순위를 정하면, 그때도 단유가 1등을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난 못할 수도 있다고 봐.”
“3년 내내 전교 1등 했잖아? 학원도 안 다니고 전교 1등 할 정도면 대단한 거 아닐까?”
“그래서 더 어렵다는 거지. 아무리 단유가 똑똑해도, 다른 애들 역시 똑똑해. 똑같이 똑똑한 아이들이 있으면 누가 더 유리할까? 아무래도 학원 다니면서 선행학습을 한 애들이 더 똑똑하지 않겠냐?”
“그럴 수도 있겠네.”
“게다가 강남에는 몇백, 몇천만 원짜리 과외를 받는 애들도 있다며? 그런 애들이랑 비교를 해봐. 혼자 하는 애랑, 과외받는 애들 중에 누가 더 성적이 잘 나오겠어?”
모인 아이들은 그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는 아이도 없진 않았다.
“난 단유가 그 아이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우리 학교에 단유 말고도 지금 과학고 가겠다고 원서 쓰는 애가 한 둘이 아니라며? 그 애들이 단유보다 성적이 잘 나온 적 있어? 아니면 단유보다 똑똑하다고 평가받은 애가 있어? 없잖아? 다시 말해서, 과학고에 가더라도 단유보다 똑똑한 애는 의외로 많지 않을 수 있다는 거지. 그런 아이들까지 다 과학고에 몰려 있다고 가정한다면 말이야.”
“그건 아니지. 걔들이 과학고 지원한다고 과학고에서 걔들을 받아준대? 걔들 중에 반 이상은 못 간다에 내 손목을 건다.”
“이 새끼, 혓바닥 놀리는 거 봐라? 너 그러다 한순간에 훅 간다?”
“크큭, 그만큼 확신한다고.”
“그런데 우리가 단유 때문에 너무 눈이 올라간 거 아냐? 어쩌면 걔들도 다른 학교였으면 전교 1등 할 수 있는 애들인데, 단유 때문에 가려진 거 아닐까?”
“하긴 걔들도 죽어라, 공부하긴 했을 거 아냐?”
“나라면 그렇게 못 했을 거야. 존나 공부해도 맨날 1등은 단유가 하니까 의욕이 날 리가 없잖아.”
“어차피 1등은 단유, 인정?”
“어, 인정.”
키득대는 아이들의 수다는 그저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의 뒷담화에 불과했지만, 기말고사를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잠시 벗어보려는 것이기도 했다. 일반고에 가든, 안 가든 어쨌든 성적을 감독하는 이는 부모님이었고, 부모님은 어떤 핑계로든 성적이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단유가 시험공부를 하고 있을 거라고 아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단유는 교과서를 보지 않았다. 모처럼 일이 없던 차였기도 해서 개인적인 공부에 매달리는 중이었다. 그동안 바쁜 중에도 간간이 공부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 집중해서 공부할 시간이 없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간 단유가 줄곧 정규 교육 과정과 별개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는 수학, 화학, 물리 등의 이과 계통이었다. 그러다 번역 일을 하면서 사회과학 분야에도 관심을 가졌고, 이계에서 돌아온 뒤에는 심리학, 금속학, 건축 구조학 쪽으로도 잠시 공부를 했었다. 그러나 이 분야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쉽게 파악하기 힘든 분야였던지라 잠시 보류했다. 아무리 학교 정규 과목이 쉽다고 해도 아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던 데다, 번역과 촬영 등의 일들이 있어서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었다.
하지만 겉핡기라도 조금씩 공부한 보람은 있었던지, 단유의 마법에도 진전이 있어서 환상―혹은 환시(幻視) 마법도 가능하게 되었다. 탄소라는 원소를 이용해 물건을 ‘소환’하는 마법도, 원소에 대한 이해와 구조에 대한 여러 실험을 통해 다양한 성질의 물건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지금은 탄소 외의 다른 원소를 활용하여 유사 ‘소환’ 마법을 준비하는 중이다.
이 정도만 해도 사실 이 세상에서는 반칙이나 다름없었다. 국가 단위의 억제력이 아닌 이상 단유를 통제하거나 억압할 수단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유사 ‘다이아몬드’를 만들어 유통시키게 된다면―지금은 어렵지만 향후에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드비어스(DE Beers Conslidated mines)의 감시가 무색하게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유가 원하는 것은 남을 억압할 무기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경제력도 아니었다. 처음의 목적이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었다면, 지금의 목적은 마법 그 자체였다. 마법은 현대 물리학과 철학의 개념을 뛰어넘는, 말 그대로 초현실이었다. 초현실의 존재는 곧 세계의 확장이었고, 사고의 지평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과연 이 세계의 진실은 무엇인가?’
지구라는 행성과 현대 과학에 묶여 있는 세계의 진실이 아니라, 온 우주, 공간과 시간을 넘어 의미로 존재하는 세계의 진실을 단유는 알고 싶었다.
그런 단유에게 ‘기말고사’는 물론, 진학은 1푼의 가치도 없었다. 아니, 전혀 없지는 않았다. 여전히 단유는 지식이 고프고, 고등 학문은 단유의 지식수준을 조금이라도 넓혀줄 뿐 아니라 영감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정규 교육 과정이 단유에게 줄 수 있는 한계는 분명 존재했다.
그렇기에 단유는 일반고로 진학을 결정했다. 그것은 단유를 철저하게 ‘평범한’ 이들 속에 숨겨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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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뒤의 기말고사도 끝이 나니, 정말 교실은 반쯤 놀이터가 되었다. 방학까지 한 달도 더 남았지만, 수업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고, ‘일부’ 학생들은 출결이 위험 범위를 넘지 않는 선에서 결석과 조퇴를 자의적으로 이용했다.
각 반의 담임들은, 그렇지 않아도 학기 말이라 산적한 서류 더미에 치이는 데다가 학생들이 ‘일탈’하지 않도록 감시·감독 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했다. 몸은 하난 데 지켜야 할 학생들은 30명이니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학생들을 강압적으로 붙들 수는 없었다. 학교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야 했고, 그저 그들이 도를 넘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준에서 통제할 뿐이었다.
“야, 학교에서 담배 피지 말랬잖아? 냄새 나.”
“냄새 많이 나냐?”
“전담 피운다고 안 했냐?”
“전담이 몸에 안 받는 거 같더라고. 피우는 맛도 안 나고.”
“골초 새끼.”
학교 뒤 폐지 수집터에서 하얀 연기가 뭉글뭉글 솟아나는 일도 빈번히 벌어졌지만, 선생님들은 그 현장을 제대로 잡아내기 어려웠다.
“일부러 안 잡는 거 아냐?”
“야, 일부러 안 잡는 게 말이 되냐?”
“어차피 한 달만 있으면 다 학교에서 떠나고 없을 텐데, 굳이 지금 잡아서 뭐하게? 주임 선생님도 피곤할 거야.”
“그건 그렇다. 크큭.”
시간이 남는 아이들은 후배들 교실을 어슬렁거리며 괜히 선배 부심을 부리며 시비를 걸기도 했지만, 그건 극히 일부의 학생들이었다. 대부분 학생들은 교실에서 게임을 하거나, 잠을 자거나, 매점을 가거나, 운동장을 뛰었다.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중에는 명수가 대표적이었다.
“야, 패스!”
명수는 쌓인 스트레스를 공으로 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쟤가 무슨 스트레스?”
지태가 운동장 옆 스탠드에 앉아서 물었다. 곁에서 같이 구경하던 채윤이 설명했다.
“중간고사 기간부터 기말고사 끝날 때까지 공을 한 번도 차지를 못했대잖아.”
“그게 그렇게 스트레스인가?”
“쟤는 그게 스트레스였겠지.”
“여자 친구도 있는 놈이 별 게 다 스트레스네.”
하지만 그보다 더 스트레스가 쌓이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상미의 문제였다.
어쨌든 나중에 이사를 가면, 지금처럼 상미를 만나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비록 온라인상에서 만나 같이 게임을 하면 된다지만, 고등학교 축구부에 들어가고 나면 컴퓨터를 할 시간이 지금처럼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 부분은 명수도 이미 각오한 바였다. 그건 어떻게 감내할 수 있다 쳐도, ‘사랑’하는 상미를 보기 힘들다는 건 명수에게 꽤나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 할 수는 없었다. 상미에게 이야기하기도 어렵고,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그러니 저렇게 웃지도 않고 이를 악물고 공을 차는 것이리라.
“아무리 그래도 애들끼리 하는데 너무 진지 빠는 거 아냐?”
“그러게. 명수가 축구 할 때 저렇게 진지하게 한 적이 있었나?”
시합 외에서 공을 찰 때는 늘 즐겁게 공을 차며 웃음을 터뜨렸던 명수였으니 이상하게 보일만도 했다.
운동장에 있는 애들이 명수를 집중 마크하니까 패스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패스가 막혀 이어지지 않다 보니 공을 잡을 기회가 적어진 명수의 얼굴이 점점 더 굳었다. 입술을 굳게 닫고 눈썹을 추어올리며 달리는 명수의 얼굴이 무서웠는지 몇몇 아이들은 일부러 어깨 싸움을 피했고, 그렇게 공을 되찾은 명수는 공을 몰아 상대 진영으로 달려갔다.
“불도저네, 불도저. 저거 봐라. 완전히 홍해 바다 갈라지는 거 같다.”
“홍해 바다 보기는 했냐?”
“비유가 그렇다는 거지.”
채윤의 대답에 지태는 칫, 하고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넌 왜 그러는데? 아까부터 뭔가 불만이 있는 거 같다?”
“불만 없겠냐? 담배도 없다.”
“되도 않는 농담은 관두고. 왜 그러는데?”
“···나 떠난다.”
“떠나? 어디?”
“캐나다.”
“···뭐?”
“유학 간다.”
채윤은 아무 말도 잇지 못한 채, 지태를 바라보았다. 지태는 볼을 불룩하게 부풀린 채, 화난 듯 달리는 명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