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yes on m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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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던 명수가 단유를 불렀다.
“왜?”
단유가 명수 곁에 섰다. 명수는 턱짓으로 바깥을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낮이 짧아진 탓에 하늘은 어둑해져 있었지만, 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밝은 조명 때문에 아래는 환했다.
“처음에는 여기도 꽤 높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어제 그 아파트 보니까 여기가 별로 높게 안 보여.”
“상대적인 거겠지.”
단유가 평이하게 대꾸하자, 명수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
“옛날에 보육원에 있을 때는 낮은 층수에 있고 싶었어. 그래야 빨리 운동장에 나가서 공을 찰 수 있으니까. 처음 학교에 갔을 때는 그래서 좋았어. 1학년 때는 1층을 썼잖아.”
“그랬지.”
“그런데 점점 학년이 올라갈수록 층수가 높아지더니 6학년 때는 4층을 썼잖아? 빨리 내려가려고 계단을 두세 개씩 건너뛰다 보면 위험할 때도 있었어.”
“내가 너한테 뛰지 말라고 자주 뭐라고 했었지.”
“맞아. ···그리고 여기 이사 왔을 때는 왜 이렇게 높은 곳에서 살아야 하나 했었거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높은 곳에서 살게 되는 거 같애.”
거실 유리창에 손을 짚은 명수는 바싹 붙어서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자동차의 붉은 램프가 줄을 잇고 있었다.
“나중에 우리가 다 크면, 그때는 산 정상 높이의 아파트에서 살게 될지도 모르겠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높은 곳이 싫다는 거야?”
명수는 바로 대꾸하는 대신 콧김이 서린 유리창을 손가락으로 비볐다. 뿌옇게 김이 서렸던 그 부분이 말끔하게 닦여나갔다.
“그냥···높은 곳은 별로야.”
단유는 바깥을 바라보는 명수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바깥으로 시선을 주었다. 길 위에 붙어 있는 사람들과 차들을 내려다보며 단유는 대답했다.
“나도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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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번에도 단유가 전교 1등을 했다. 박수!”
어떤 아이는 입술을 모으고 호루라기 부는 소리를 냈고, 어떤 아이는 손을 번쩍 들어 손뼉을 쳐 보였다. 어떤 아이는 쉽게 보기 힘든 기록일 거라고 환호를 보냈고, 어떤 아이는 앞사람의 등 뒤에 숨어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런 가운데 단유는 짤막하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자리에 앉았다.
“단유 말고도 성적이 오른 친구들이 많더구나. 모두들 수고 많았다. 하지만 풀어지면 안 되는 거 알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알겠니?”
담임은 3학년 중에 가장 성적이 좋은 반을 맡았다는 기쁨에 얼굴이 활짝 피어있었다. 담임이 나간 뒤, 아이들의 축하 메시지가 줄을 이었다.
“대박 아냐? 어떻게 3년 내내 그래?”
“어쩌면 단유는 사람이 아닌지도 몰라. 야, 너 머릿속에 컴퓨터라도 심어 놓은 거 아냐?”
“나중에 진짜 아이언맨이 될지도 몰라.”
“그럼 미리 잘 보여야 하나?”
단유는 그런 아이들의 축하를 적당히 받아주었다.
“단유야.”
“넌, 거기까지.”
단유는 명수의 말을 잘랐다.
“너까지 그러면 민망하니까.”
“그게 아니고.”
“···그럼?”
“오늘 상미랑 100일인데 같이 놀자고.”
“야, 너네가 100일인데 내가 왜 끼어?”
“야, 니가 남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두 사람 데이트하는데 끼기 싫다.”
“지태랑 채윤이도 올 건데?”
“뭐? 걔들이 왜?”
“내가 오랬거든.”
“네가 오란다고 가?”
“지태는 좋다던데?”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태야, 넌 왜 왔냐?”
“100일이라잖아? 축하해주려고 왔지.”
맑은 눈동자의 지태에게 다른 마음은 없는 듯했다. 그래서 더 불쌍하다.
“채윤이 넌?”
채윤이는 얕은 숨을 뱉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지태를 향해 눈짓했다. 끌려왔다는 뜻이리라.
단유는 채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정신없이 들떠서 수다를 떠는 명수와 지태를 바라보았다.
“21층이면 얼마나 높은 거야?”
“지금 니가 사는 곳의 높이보다 두 배 높지.”
“대박. 거기서 보면 진짜 아찔하겠다?”
“바람 때문에 베란다 유리가 덜컹거리는데, 난 유리 깨지는 줄 알았다.”
“야, 그럼 위험하잖아? 그럼 평소에 문도 못 여는 거 아냐?”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아무튼 무섭더라.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진짜, 진짜 사람이 작게 보이는 거 있지?”
검지를 구부려 보이는 명수는 무서웠단 소감과 달리 신명 나게 떠들었다. 채윤도 지태 뒤에서 그 이야기를 듣다가 단유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말 이사 가는구나.”
“응.”
“그럼 방학 때 했던 말이 진짜가 되는 거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자주 보지 못할 거란 말, 그 말이 현실로 다가왔다. 채윤은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명수와 지태를 보다 말했다.
“그때는 그저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공부 때문에 보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 이렇게 멀리 떨어질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때마침 채윤이 들고 있던 진동벨이 울렸다.
“내가 가지고 올게.”
채윤 혼자 네 사람 분량을 모두 가지고 오긴 힘들 거라고 생각해서 단유도 같이 일어섰다. 그때 패스트푸드점의 문을 열고 상미가 들어왔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네가 늦게 온 거야.”
상미는 눈을 한번 찡긋거리고는 명수에게로 갔다.
“옷 갈아입고 올 줄 알았는데.”
“옷 갈아입고 오라고?”
“아니, 하도 늦길래 그런 줄 알았다고.”
“며칠 뒤에 우리 학교 축제하잖아? 그거 준비하느라고 그랬어. 아, 너도 올 거지?”
“시간 되면 갈게.”
“시간 되면?”
“아! 아니, 무조건 가야지. 무조건!”
주먹을 쥐어 보이는 상미에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명수였다. 상미는 명수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가방을 옆에 내려놓았다. 유난히 묵직해 보이는 가방이었다.
“공부도 안 하는 애가 가방엔 뭘 그렇게 넣고 다녀?”
지태가 물으니 상미가 혀를 찼다.
“왜 보자마자 시비야? 너 소개받기 싫어?”
지태가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아니, 어쩌면 시늉이 아닐지도.
“시비는 무슨! 너 어깨 피곤할까 봐 걱정한 거지.”
“걱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걱정을 해도 얘가 해야지, 왜 니가 하냐?”
“친구로서 걱정할 수 있지.”
“너, 조심해. 내가 요즘 너 계속 지켜보는 거 알지? 내 친구를 아무한테나 소개해 줄 순 없는 거잖아?”
“내가 아무나야?”
“아무나가 되기 싫으면, 행동 똑바로 해.”
여기서는 상미가 갑이었다.
“알았다, 알았어. 아, 햄버거 왔다. 아, 너 이거 먹을래?”
지태의 넉살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명수를 바라보았다.
“내 건 안 시켰어?”
“너 오면 시키려고 했지. 내 거 먹어.”
“됐어. 난 다른 거 시킬 거야.”
상미가 명수를 빤히 바라보자, 명수는 얼른 일어나서 카운터로 향했다. 굳이 상미가 말하지 않아도 상미의 기호에 맞는 햄버거를 주문하는 일은 그동안 단련된 터였다.
“단유야, 다음 주말에 우리 학교 축제 있는데 올 거지?”
“내 대답과 상관없이 확정된 것처럼 말하네?”
“명수가 너 데리고 오기로 했거든.”
“그럼 왜 물어?”
“그래도 개인의 의사가 중요하잖아?”
단유는 피식 웃으며 카운터로 간 명수를 바라보았다. 메뉴를 주문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명수를 본 뒤, 상미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오늘 이렇게 보자고 한 거야?”
“무슨 말이야?”
“100일이라며? 그럼 너희 둘이서 데이트라도 하지, 왜 이렇게 다 모이게 했냐고.”
“친구잖아.”
단유는 채윤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100일 기념일에 두 사람이 따로 만나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단유와 채윤이 이상한 건지도 모르겠다. 명수와 지태, 상미는 이렇게 모이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니까. 아니면 다수결의 맹점일지도.
햄버거를 먹어치운 다섯 사람은 감자튀김을 하나씩 집어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상미네 학교 축제에 대한 기대감이 서린 지태의 호기심과 상미의 자랑, 명수의 과한 리액션이 얽혀 이야기는 즐겁게 이어졌다.
“그런데 우리 어디 갈까?”
“피시방 가서 한 게임 할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상미가 그렇게 말하니 단유와 채윤은 동시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왜? 뭐?”
“너네 100일이라며? 그래서 이렇게 우리까지 불러놓고선 고작 간다는 데가 피시방?”
“뭐 어때서? 그리고 솔직히 100일이 뭐 별거야? 안 그래?”
“응? 그럼, 그럼. 별거 없지.”
명수의 맞장구에 상미가 명수의 머리를 토닥거려 주었다. 그리고 명수는 그게 좋다고 또 히죽 웃었다. 저러니까 바보 소리 듣는 거다. 연애 바보.
“아무리 그래도 피시방은 좀 심했고···. 여기서 계속 이야기하기도 그러니까, 일단 자리 옮기자.”
“어디로?”
중학생 5명이 함께 갈 만한 곳이 어디 있을까?
“뭐야? 고작 집이야?”
오피스텔 앞에서 투덜거리는 지태를 채윤이 다독였다.
“단유네 집에 지금 아무도 없다잖아? 우리끼리 놀기 좋지 뭐.”
“난 별로야. 어쩐지 공부방 같은 느낌이란 말이야.”
“그건 나도 그래.”
불과 몇일 전까지 중간고사를 대비해 단유네 집에서 스터디를 했던 아이들이었기에, 그런 감상도 과장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렇게 케이크에 불붙이고 축하해주는 자린 있어야지.”
채윤이 손에 쥐고 있던 케이크 박스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게 왜 공부방이냐고!”
“야! 우리 집 공부방 아니거든?”
명수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상미는 명수의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상미도 썩 즐거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무리 둔한 명수라도 그런 눈치를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더 이상 입을 열진 않았다. 그리고 먼저 집으로 가자고 제안한 단유는 오피스텔 앞에서 아이들을 세웠다.
“3분 있다가 들어와.”
“3분?”
“갑자기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기대하게 되잖아?”
상미가 명수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마치 미리 준비했던 거야, 라고 묻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명수는 전혀 알지 못하기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솔직히 단유가 뭔가를 준비할 시간은 없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줄곧 함께 있었는데 집에 뭔가를 준비해 놨다면 모를 리가 없으니까.
단유가 들어가고 난 뒤, 네 사람은 가을 저녁의 노을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오늘 유난히 노을이 붉은 것 같네.”
“오, 상미 너 유난히 감상적인데?”
“내가 아까 시비 걸지 말라고 했지?”
“이게 무슨 시비야? 칭찬이지.”
“니가 하는 말은 칭찬으로 안 들리거든?”
뭔가 길게 입씨름을 할 것 같은 분위기를 채윤이 나서서 말리며 명수에게 물었다.
“진짜 뭔데? 넌 알 거 아냐?”
“몰라, 진짜.”
마침 명수의 핸드폰으로 올라오라는 메시지가 전송됐다. 명수는 그 메시지를 보인 후 안으로 들어섰다.
두근거리는 마음 반, 의심 반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명수는 물론, 다른 세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 뭐야?”
천장에 가득한 색색깔의 풍선과 크리스마스 트리에서나 볼 것 같은 발광체가 벽에 붙어서 반짝이고 있었다. 종이 꼬리가 달린 풍선도 빛을 반사 시키는지 그 자체로 조명 역할을 했다.
거실의 한쪽 벽에는 우스꽝스러운 모양의 해골 인형이 달려 있었는데, 머리가 커서 오히려 귀여운 느낌이었다. 특이한 점은 팔다리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는데 노란색과 붉은색이 번갈아 나와서 파티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이, 이걸 언제 준비한 거야?”
“서프라이즈.”
“진짜 놀랬다.”
명수가 어버버 거리다 겨우 물었다.
“이걸 진짜 네가 준비했어? 언제? 어떻게?”
“비밀.”
단유는 씩 웃으며 손을 들어 거실을 가리켰다.
“들어와.”
이럴 때 쓰려고 배운 건 아니지만, 환상 마법은 꽤나 효과적이었다. 아이들은 그것이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거짓이라고 의심하지 못하면, 그것은 진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환상이고, 마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