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yes on m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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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고도가 낮아지며 날이 선선해지다 못해 서늘하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쌀쌀해진 탓에 사람들은 긴 팔, 두꺼운 스웨터를 꺼내 입기 시작했다. 평균기온은 봄보다 높은 편이지만, 겨울이 다가올수록 추워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을을 봄보다 더 춥다고 여긴다.
바람이 불면 떨어진 낙엽이 길 위에 쌓이고, 도심 속의 낮은 동산에도 붉은색으로 뒤덮여, 감수성이 풍부한 이들은 옷깃을 세우고 산책로를 걸으며 가을의 정취를 느꼈다.
“에취!”
“감기야?”
“아니. 비염. 환절기만 되면 비염 때문에 미치겠어. 에취!”
상미는 붉어진 코를 비볐다.
“언제부터 그랬어?”
명수의 전혀 몰랐다는 반응에 상미가 흘겨봤다.
“옛날부터 그랬거든? 봄에도 비염 때문에 계속 재채기했었거든?”
“몰랐어.”
“이거 봐. 나한테 관심이 전혀 없었던 거야.”
“아, 아냐.”
“아니긴.”
명수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상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런 애를···.”
말끝을 흐리며 미안해하는 명수를 노려보던 상미는 명수의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명수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이래서 내가 나오기 싫었던 거라고. 가자.”
“으응.”
명수는 붉어진 얼굴로 상미의 뒤를 따라갔다. 마치 목줄에 매인 강아지처럼.
“오늘 딱 5번만 이겨보자.”
“응?”
“랭킹 올려야 돼.”
“알았어. 최선을 다할게.”
“최선을 다하는 거론 안 돼. 오늘 5승을 거두지 못하면 잠을 안 자겠다는 각오로 해야 돼.”
“으응.”
질릴 정도로 사육당하는 강아지의 심정으로 명수는 상미를 쫓았다.
“여자 친구는 어떻게 사귄 거야?”
“어쩌다 보니.”
“그러니까 그 어쩌다, 가 뭐냐고?”
앞장서 묻는 지태만큼이나 채윤도 궁금하다는 얼굴을 했다. 도하는 뚱한 표정으로 두 사람과 그 뒤에서 관심 없다는 듯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단유를 보다 말했다.
“우리 동네에 살던 앤데, 걔가 사귀자고 했어.”
“여자애가 먼저?”
“응.”
“왜?”
“뭐?”
“이상하잖아. 도대체 너한테 먼저 고백할 이유가 뭐가 있어? 사진 보니까 얼굴도 예쁜 애더만.”
“난 먼저 고백받으면 안 되냐?”
“응.”
“왜?”
“야, 너도 양심이 있으면 그런 말이 나오냐? 천하의 진도하가 여자한테 먼저 고백을 받아? 차라리 니가 협박을 했다고 하면 믿겠다.”
지태의 말대로 ‘천하의 진도하’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천하의 진도하’가 이미 오랜 옛날이야기라는 건, 지태가 이렇게 대놓고 디스를 할 정도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옛날의 도하였으면 지태는 이미 쌍코피를 흘리고 있었겠지.’
채윤이 키득대는 이유였다. 지금의 도하는 이런 친구들의 반응에 그저 눈썹을 한 번 꿈틀댈 뿐이었다.
“가끔씩 자기가 키우는 개를 데리고 동네 산책을 할 때가 있는데, 그때 몇 번 마주쳤었어. 그런데 한 번은 그 개가 미친 새끼처럼 뛰어다니다가 차도로 뛰어나가는데 내가 막은 적이 있었거든. 그때 고맙다고 하더라.”
“겨우 그걸로?”
“그리고 한번은 길을 가다가 지갑을 흘렸는데, 마침 내가 뒤에 있다가 그걸 주워서 준 적도 있고.”
“응?”
지태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한 번은, 그게 이번 여름이었는데, 되게 더운 날이었거든? 잠깐 편의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벽에 기대고 있길래, 얼굴도 몇 번 마주치기도 했어서 그냥 지나가기도 뭣했는데 눈이 마주쳤어. 그래서 괜찮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괜찮다네? 그리고 집에 들어왔는데, 며칠 뒤에 다시 우연히 만났는데 사귀자고 하더라고.”
지태는 채윤을 돌아보고, 다시 뒤에 앉은 단유를 바라보았다가, 여전히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단유를 확인하고 다시 채윤에게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이해돼?”
“아니.”
“이상하지?”
“응.”
지태는 고개를 끄덕이고 도하를 바라보았다.
“완전 이상하잖아!”
“뭐가?”
“겨우, 고작 그걸로 좋아한다고?”
도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 참. 그래, 그건 그렇다 쳐. 그럼 넌 왜 고백 받아들였는데?”
도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그냥, 그게···내가 이제까지 알던 애들이랑 다른 느낌이라서 신선하달까?”
“응?”
도하는 단유를 흘깃 본 뒤, 말을 이었다.
“예전에 알던 애들은, 솔직히 같이 노는 애들이었거든. 발랑 까진 애들. 그냥···나 같은 애들이었는데, 걔는 조금 다르더라고. 그래서 호기심도 생기고, 뭐···그랬어.”
“호기심 때문에 오케이를 했다고?”
“그런 마음도 있었고···솔직히 얼굴도 예쁘잖아, 그 정도면.”
“와, 나.”
지태는 이마를 짚었다.
“여름도 아닌데 열나는 거 같아. 도대체 이 세상은 얼마나 요지경인 거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여자 친구를 만들다니.”
때마침 명수가 양팔에 음료수를 싸 들고 나타났다.
“내가 이런 셔틀을 하다니.”
명수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채윤이 얼른 음료수를 받아주었다.
“네가 가위바위보 져서 그런 거잖아.”
“근데 얘는 왜 이래?”
채윤은 피식 웃으며 사정을 이야기했다.
“도하한테 여자 친구가 생긴 게 충격이래.”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지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자 친구가 생긴 이유도 납득하기 힘들다고!”
“무슨 이윤데?”
채윤이 간략하게 알려주자, 명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지태가 도끼눈을 뜨고 명수를 응시했다. 그 시선에 명수가 물었다.
“왜?”
“이 이야기를 듣고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든다고?”
“그렇게 연애할 수도 있는 거지, 그게 뭐가 이상해?”
지태는 명수의 표정을 살폈다. 명수는 볼을 붉히며 들고 있던 음료수 중의 하나를 단유에게 넘겼다. 단유가 짧게 ‘고마워’라고 답한 후,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실 때, 지태가 물었다.
“너, 수상해.”
“뭐, 뭐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말이야, 얼굴에 다 드러난다고.”
“내 얼굴이, 뭐?”
지태는 단유에게 물었다.
“얘, 연애하냐?”
“응.”
“···뭐? 진짜? 진짜로 연애한다고?”
“응.”
“너, 너, 여자 친구 있어?”
명수는 시계를 보는 척하며 허둥댔다.
“야, 단유야. 점심시간 다 끝난다. 들어가자.”
“그래.”
“야, 인명수! 딱 거기 서!”
지태의 외침에도 명수는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에 피식 코웃음을 치며 도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들어갈게. 아, 이거 잘 마실게.”
“어, 어. 잘 마셔. 나중에 보자.”
“야! 인명수!”
도하는 명수의 등을 보며 부르짖는 지태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너도 여자 친구 사귀면 되잖아.”
“야! 그게 말처럼 쉽냐?”
“쉽던데?”
“이익!”
채윤이 지태의 등을 두드리며 달랬다.
“괜찮아. 나중에라도 생길 거야. 울지마.”
“안 울어!”
지태는 채윤의 위로를 뿌리치고 씩씩거리며 학교 본관으로 들어갔다. 그 뒤에서 채윤이 살랑거리는 가을바람을 맞으며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채윤의 웃음을 실은 바람이 교정 화단에 심겨 있던 나무를 스치고 지나가자, 힘없이 매달려 있던 낙엽들이 아이들이 떠들던 그 자리로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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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고마웠어. 편집장님이 대단히 놀라워하더라고.”
“감사합니다.”
“우리가 더 감사하지. 이렇게 마감을 지켜주니까.”
계속된 칭찬에 단유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웃음만 지었다.
“솔직히 말이야.”
유 팀장은 안경을 한번 고쳐 쓰며 말했다.
“입이 근질근질해. 천재 소년이 있다! 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거든.”
“천재는 아니죠.”
고작 번역 좀 한다고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을까?
“아냐, 너 정도면 천재지, 천재. 전문 번역가들도 이만한 서적을 이렇게 빨리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고. 가끔 동종업계에 있는 사람들이나 다른 번역가들한테 너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데, 진짜 목에 여기까지 네 이름이 올라왔다가 겨우겨우 참는 형편이란 말이다.”
‘김단유’라는 번역가의 이름은 조금씩 업계에 알려지는 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 사람이 이렇게 빨리 번역본을 출판하는 경우가 흔치 않기 때문이었다. 1년 동안 벌써 3권의 책이 출판된 상황이었다. 물론 그중 한 권은 작년 말에 번역했던 것이 올해 나온 것이었고, 올해 번역한 서적 중 한 권은 아직 출판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경이로운 속도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그 때문에 ‘김단유’에 대해 물어보는 이들이 조금씩 늘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회사에서는 그에 대해 함구했다. 솔직히 유 팀장은 이미 3권의 번역서로 실력이 입증되었으니 괜찮은 거 아니냐는 입장이기도 했지만, ‘중학생’이라는 타이틀은 번역에 대한 신뢰를 해칠 수 있다는 사장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기에 여전히 입에 걸린 자물쇠를 쉽게 풀지 못하고 있었다.
“전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괜히 제 이름이 거론돼서 지금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되거든요.”
“오히려 유명해지는 게 더 좋지 않겠니?”
“아뇨. 그냥 조용히, 다른 사람들처럼 조용히 지내고 싶어요.”
은둔자 스타일이구나, 라고 대답한 유 팀장은, 그래도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너 같은 인재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야 돼.”
“모르는 게 좋습니다.”
단호한 말투로 단유는 선을 그었다.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하는 건 단유도 원하는 일이었고,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언젠가는 알려질 수 있겠지만, 굳이 나서서 알리고 싶지는 않다는 단유의 뜻을 유 팀장은 이해해 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이 없는 건가요?”
“그래. 네가 너무 빠르게 일을 진행해 준 덕분에 말이야. 사실 해외 출판사나 작가랑 상의해서 일을 따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미리 많이 딸 수도 없는 것이, 미리 계약을 해 놓았다가 제때 출판을 못 하면 회사로서도 손해기 때문에 양을 어느 정도 조정하는 부분이 있어. 그런데 네 덕분에 올해는 초과 달성한 셈이지. 아, 물론 지금도 계약을 진행 중인 책들이 몇 되긴 해. 내가 그쪽 일을 맡질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올겨울부터 다시 일을 맡기게 될 거야.”
회사에 소속된 번역가가 단유 혼자만이 아닌 터라 그 작가들에게도 맡긴 책이 있었다. 계약이 된 만큼, 그들에게 가야 할 책도 있기에 단유에게 그 책들을 모두 몰아줄 수만은 없는, 그런 입장도 있었다.
“그럼 겨울까지는 쉬는 거네요.”
“왜? 계속하고 싶어?”
“이왕이면요. 사실 그 책들을 읽는 게 재미있었거든요.”
“너처럼 책도 좋아하고, 번역도 잘하는 사람이라면 ‘번역가’가 천직이다, 천직.”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번역가로 계속 활동하는 게 나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직업이니, 그 정도 직업을 유지한 채 본업인 ‘마법사’로서의 역량을 키우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돈도 많이 벌었잖니?”
돈독이 올랐구나, 라고 농담을 하려다 상대가 아직 어린 중학생이란 사실에 유 팀장은 말을 바꿨다.
“그럼 겨울까지는 휴가받은 셈 치죠.”
“그래. 그동안 수고했으니, 잠시 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 맞다.”
유 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책 두 권을 가지고 돌아왔다.
“자, 선물.”
다른 번역가가 맡은 책이라 단유가 번역할 필요는 없지만, 단유가 책을 좋아하기에 번역과 상관없이 선물 겸해서 단유에게 건넸다.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받은 해외 원서들이 단유의 책장에 하나둘 늘어나는 중이었다.
“고맙습니다.”
“나중에 맡길 일 있으면 먼저 연락줄게.”
“기다릴게요.”
“그래, 수고했다.”
단유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천재야, 천재.”
유 팀장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단유가 들고 간 책 때문이었다. 대학생 이상의 고학력자들이나 겨우 이해할 법한 전문 서적들을 술술 읽고 이해하는 16살의 아이를 천재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