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29화 (529/956)

보리수 그늘 아래(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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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씻을래.”

“그럴래?”

사모님이 일어나 지선이를 데리고 욕실로 데려갔다. 그 뒷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명수에게 승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선이가 힘이 많이 없어. 그래서 욕실에서 혼자 씻다가 자주 넘어졌거든.”

자신의 두 발로 오래 서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몸이 약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명수의 눈이 금방 그렁그렁해졌다.

“운동을 좀 하면 괜찮을 거야. 병원에서도 운동을 하라고 권하기도 했고.”

요즘은 밖이 더워서 산책을 하기가 어렵고, 그래서 집 안에서 걷거나 어머니나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계단을 오르내리는 운동을 하는 중이란다.

“심각한 병이 있는 건 아니죠?”

“그런 건 아니라더라. 그냥···몸이 좀 약하대.”

겨울이면 감기를 달고 사는데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여름에는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걱정될 정도고.

“아 참. 지선이 방 좀 볼래?”

“지선이 방을요?”

승민이 먼저 일어나 두 사람을 데리고 지선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벽을 가득 메운 브로마이드였다.

“집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음악도 자주 듣게 되고 그러면서 저런 애들이 좋다고 앨범을 사달라거나 브로마이드 좀 구해달라거나 하는 부탁을 하더구나.”

“우와.”

명수가 입을 쩍 벌리고 벽에 도배된 브로마이드를 바라보았다. 브로마이드 뿐만 아니라,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사진을 확대해서 붙여놓기도 했다.

“리본 소녀가 대세는 대세인가 봐요.”

명수의 말에 승민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음반매장에 가서 애들 줄 선 틈에 같이 껴서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냐?”

“선생님이 직접 가서 줄을 서셨다고요?”

“우리 학교 애들이 없어서 다행이었지, 있었으면 얼굴도 못 들 뻔했다.”

“선생님이 거기서 수줍은 표정으로 줄 서 있는 모습이 상상이 안 돼요.”

명수의 말에 선생님은 정색을 하며, ‘수줍은 표정이라니!’라고 항변했다.

“딸을 위해서라면 뭔들 못 할까. 니들도 나중에 결혼해봐라. 그럼 안다.”

“전 결혼해도 그렇게는 안 할 거 같아요. 그리고···.”

명수는 단유를 가리켰다.

“얘가 있는데 굳이 줄을 설 필요가 있을까요?”

“나?”

“왠지 너라면 가수한테 직접 싸인 시디를 받아올 거 같단 말이지.”

“내가 무슨 능력으로?”

“싸인 티셔츠도 받아왔잖아?”

“사인은 니가 받았잖아?”

“따지면 다 네 덕분이지.”

무슨 이야기냐고 묻는 승민에게 명수는 도연과 함께 촬영했었던 이야기를 신나게 털어놓았다.

“그럼 도연 언니 사인 티셔츠가 있다는 소리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야무지게 감아 얹은 지선이 동그란 눈으로 명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수는 히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부럽지, 라는 표정의 명수에게 지선이 말했다.

“내놔.”

“뭐?”

“티셔츠.”

“맡겨 놨냐?”

“선물 사 왔어?”

“무슨 선물?”

“병문안 선물.”

“얘 진짜 왜 이러냐?”

“안 사 왔으니까 티셔츠 줘.”

“맡겨 놨냐? 그리고 그 티셔츠에는 내 이름 적혀 있거든?”

“귀여운 동생한테 그러면 못 써.”

“자기 입으로 귀엽다느니 하는 건 안 부끄럽냐?”

“전혀. 그러니까 내놔.”

“못 줘.”

이대로 유치한 말장난 같은 대화를 듣고 있기가 힘들었던 단유가 나섰다.

“내가 받아다 줄게.”

“정말요?”

기다렸다는 듯 활짝 핀 얼굴로 되묻는 지선에게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아파서 바깥출입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불쌍한 팬을 위해 사인 티셔츠 정도는 해주겠지라는 기대도 있었다.

“단유 넌, 진짜 연예인 쪽으로 갈 생각이 없는 거지?”

승민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네.”

“다재다능한 것도 고민이겠구나.”

“별로요.”

“다재다능하다는 말은 인정하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없는 이야기는 아니죠.”

“보셨죠? 단유 뻔뻔한 거? 얘가 이렇다니까요? 사람들은 단유가 착하기만 한 줄 안다니까.”

“뻔뻔한 거랑 착한 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아니 얘는 왜 계속 내 말에 태클을 걸지?”

“모자란 오빠 가르쳐주는 거야.”

“모자라?”

욕실을 정리하고 나온 사모님이 웃으며 대화를 강제 종결시켰기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점심시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

도연은 병원을 나와 차에 올랐다. 미리 차에 탔던 매니저가 뒤를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

“갈까?”

“네.”

운전은 윤 매니저가 맡았다. 희숙은 다른 멤버들 일정 때문에 그쪽으로 붙은 상황이었다. 밴도 희숙에게 맡겨서, 매니저의 자가용으로 이동 중이었다.

“음악 틀어줄까?”

“아니요.”

도연의 기운 빠진 모습에 매니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곧 목소리를 바꿔서 되물었다.

“상담은 어땠어?”

“괜찮았어요.”

“금방 좋아질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네.”

브레이크를 꾹 밟고 신호를 기다리는 와중에 룸미러로 도연을 바라보니, 도연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는데 그 모습이 사뭇 처연해 보였다.

며칠 전, 심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결론은 도연을 보호해주자는 것이었다. 아티스트를 보호하는 것은 회사의 의무이고 정체성이었다. 이 사태를 잘 마무리해야 다음에 들어올 아티스트들, 아이돌이든 다른 영역의 연기자들이든 회사를 믿고 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안 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뜻을 맞췄고, 그래서 도연을 지키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강구했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본인도 자신의 문제점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고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기 때문에 꾸준한 상담 치료와 적당한 휴식만 있다면 좋아질 거라고 했다.

“조금 힘들겠지만 조금만 힘내자. 곧 활동 마무리할 거니까 그때까지만 조금 더 버티자. 알겠지?”

“네.”

도연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지금 이 시각, 도연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TV 예능에 출연해서 녹화 중일 것이다.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어쩌면 자신보다 멤버 언니들, 이라고 도연은 생각했다.

연예인은 감정 노동자이다. 끊임없이 웃고 웃어야 한다. 카메라 앞에서의 문법은 일상의 문법과 달라, 끊임없이 머리로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뱉어야 한다. 조심스럽다고 해서 말을 하지 않으면 또 안 된다. 쉴 틈 없이 사이를 끼어들며 말하고 웃어야 한다.

섹시 컨셉이 아니더라도 아이돌은 날씬한 몸매와 짧은 치마, 혹은 쇼트 팬츠에 어울리는 몸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먹을 것도 못 먹고, 카메라 앞에서는 몸에 힘을 주고 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말하고 웃으면서 예쁜 자세가 나오도록 신경 써야 한다.

그것만도 힘든데, 멤버들은 도연까지 신경 써야 했다. 기자들의 짓궂은 질문에도 나긋나긋하게 웃으면서 ‘우리 도연이 괜찮아요. 원래 몸이 약한 친구라서 그래요’ 라고 대신 변명해주면서 불화설을 일축한다. 그 때문에 매니저도 도연에게 붙었다. 아마 지금 계속 말을 붙이며 기분을 좋게 해주려 애쓰는 매니저는 다른 한쪽으로는 멤버들이 잘하고 있을지 걱정하는 마음으로 혼란스러울 것이다.

“미안해요.”

“뭐가?”

“전부 다요.”

“그런 생각하지 마라. 니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니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

“제가 잘못한 거예요. 제가 언니들한테도 폐를 끼치고, 회사에도 폐를 끼치고···.”

말을 하던 도중에도 울먹이더니 결국 눈물을 떨어뜨리는 도연이었다. 조용히 운전대를 잡고 있던 매니저는 묵묵히 운전을 해 나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차를 세웠다.

“도연아.”

“···네?”

“실은 이 문제 때문에 심 대표님이랑 이야기를 나눴는데 말이야.”

“······.”

“너만 괜찮다면, 언론과 단독 인터뷰를 잡는 게 어떨까 하는데 말이야.”

“단독 인터뷰요?”

“연 데일리의 박 기자 알지? 내 친구.”

“네.”

“그 친구랑 인터뷰를 하는 게 어떨까 해.”

도연은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거기서 네 병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거야.”

“네?”

울먹임도 멈추고 매니저를 바라보는 도연이었다.

심 대표와 대화로 나눈 전략은 이랬다.

“먼저, 도연이가 밝히는 거야. 자신이 지금 자신의 표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병이 있다고 말이야.”

“병이요?”

“일단은 그렇게 이야기를 해. 그리고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얼마나 힘든지도 고백하는 거지.”

“그건···.”

연예인이 스스로 힘들다고 고백하는 건 긍정적인 효과보다 부정적인 효과가 더 크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싸구려 급식보다 못한 부실한 식사로 몸매를 유지한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런 수고로움에도 연예인들은 일반인들이 거두기 어려운 수익을 거둔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행복한 고민’을 하는 사람 정도로 연예인을 생각한다. 더구나 아이돌이라면, 게다가 데뷔하자마자 음악 프로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인 대세 아이돌이라면, 그녀의 고민은 그저 사치에 겨운 불평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서 너의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거야.”

‘솔직한’이라는 워딩에 의아함을 품는 도연.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연예인이지만, 연예인 역시 사람이다. 비록 연예인이 우대받으며 특별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삶은 한순간도 카메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이다. 팬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한쪽에서만 보는 시각이다. 실제로 연예인은 관심과 무관심의 경계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앞선다.”

도연은 입을 다물고 매니저의 이야기를 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그렇게 느끼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 이야기를 대중에게 꺼낸다는 건 또 다르다.

진실하되 솔직하지 마라. 연예계의 격언(格言)이다.

“그래서 병원에 다니며 심리 상담을 받는 중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라고요?”

“이런 취지가 담기도록 이야기하란 거지.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너에게 동정심을 가질 수 있도록. 그리고 사람들이 너에게 ‘똑똑하다’는 이미지를 갖도록.”

“언플 아닌가요?”

“맞아, 언론 플레이. 하지만, 없는 이야기는 아니잖아. 너 똑똑하고 열심히 하는 이미지잖아. 아직은 팬들에게만 각인된 그 이미지를 널리 알리자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너를, 그리고 리본 소녀를 머리에 새길 수 있게 하자고.”

매니저가 몸을 돌려 뒷좌석에 앉은 도연을 바라보았다.

“이런 것까지 이야깃거리로 만들어서 장터에 내놓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몰라.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위기를 기회로.”

심 대표가 강조했던 이야기였다. ‘이건 기회야’.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는 네가 생각해야 돼. 네 생각을 말하는 거니까.”

“간단히 이야기하면 저를 포장하라는 거네요.”

“맞아. 포장. 저질스럽고 작위적인 느낌이 들겠지만, 결국 포장이야. 하지만 부정적으로 볼 문제는 아니라고 봐. 비단 연예인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포장해. 취업준비생이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도 포장이야. 그리고 자신을 상품화시켜서 기업에 내놓지. 자신이란 상품을 사달라고. 그거랑 똑같은 거야.”

도연은 고개를 숙였다. 이성과 감정이 혼란스럽긴 하지만, 이해 못 할 내용은 아니었다. 좋게 생각하면, 지금 멤버들이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만약 매니저의 말대로 된다면, 리본 소녀를 홍보하는 효과도 있을 테니 기꺼이 할 수 있다.

“할게요.”

자신은 ‘리본 소녀’의 도연이니까.

“그래.”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

“오빠, 도연 언니랑 친해?”

“음, 아니.”

“안 친해?”

“친하다기보다는 그냥 아는 사이?”

지선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나보다는 덜 친하다는 소리야?”

“그렇게 이해해도 되고. 그런데 왜?”

“아, 요즘 그 언니 많이 아프다고 하잖아.”

“아, 응.”

“병문안 안 가나 해서.”

단유는 대답 대신 머리를 긁적였다. 명수가 끼어들어 지선의 궁금증을 해결해주었다.

“그냥 같이 일만 한 번 했을 뿐인데 뭐가 친하겠어. 친할 틈도 없었지.”

명수는 단유가 방학식 날 도연에게 갔었던 일을 모른다. 그래서 지난 몇 달 전 촬영 이후, 도연과 연락이 끊어졌다고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아까 지선에게 사인 티셔츠를 받아준다고 했을 때도 눈빛으로 ‘가능하냐고’ 묻기까지 했었다.

“도연 언니랑 친하면 좋을 텐데.”

“왜?”

“그럼 나도 오빠랑 같이 가서 도연 언니 볼 수 있잖아?”

“지금도 같이 가면 되지.”

“안 친하다며? 안 친한데 가면 민폐야.”

“이야, 네가 민폐란 말도 다 알아?”

“그 정도는 상식이거든?”

“이건 맨날 나한테만 그래?”

“오빠가 먼저 멍청한 소리 했거든?”

“이게 정말!”

단유는 명수를 막은 뒤, 지선에게 물었다.

“넌 도연 누나가 좋아?”

“응.”

“왜?”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그리고 예쁘고 똑똑하잖아.”

“그건 다른 사람도 다 그런데?”

“아냐, 난 도연 언니가 제일 좋아.”

“악개네, 악개.”

명수가 입술을 삐죽이며 끼어드는 걸 다시 말렸다. 그 틈에 지선이 말을 이었다.

“나도, 그 언니처럼 춤출 수 있었으면 좋겠어.”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활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으로 들렸다. 단유는 지선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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