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28화 (528/956)

보리수 그늘 아래(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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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나을 수 있었다면 애초에 저한테 오시지도 않았겠죠?”

말도 안 되는 컴플레인을 거는 매니저에게도 친절히 응대하는 여의사였다.

“다른 방법 없습니까?”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제일 좋은 방법은 당분간의 휴식입니다. 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내면서 좋아지길 바란다는 건 무리죠. 사람은 기계가 아니잖아요?”

그래도 매니저는 다른 선택권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 많은 행사 무대가 남았고, 더군다나 리본 소녀는 이제 시작한 아이돌 그룹이다. 더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인데, 도연만 빠진다면 무대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유 대표가 말했던 ‘문제 상황’에 직면하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생긴 것일까?

“그리고 그 도연씨의 친구인가 했던 방법 말이죠.”

“아, 네. 혹시 그게 좋지 않은 방법이었던 걸까요?”

“아니요. 좋은 방법이에요. 그것도 일종의 이미지 심리 치료 방법이에요. 하나의 이미지를 자신이 생각하는 긍정적 이미지로 바꾸는 작업은 그 대상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자신의 긍정적인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효과도 있거든요.”

“그런가요?”

“도연씨에게 듣기로는 연기 연습 때도 사용했었던 방법이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역할 연기 치료를 할 때도 그런 방법을 차용합니다. 도연씨의 친구라는 아이가 알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쁜 방법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왜 도연이는 여전히 웃질 못하는 건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꾸준히 상담 치료를 하다보면 좋아질 거예요.”

그걸 기다릴 시간이 없다, 라고 말할 순 없어 그저 속만 태우는 매니저였다.

****

아침 운동을 나선 단유와 명수는 공원에서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땀을 식혔다. 새벽이라 시원하기도 했지만, 오늘 하늘에 낀 구름을 보니 요 며칠 동안 이어진 폭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어컨 없으면 잠도 못 잘 거 같네.”

열대야가 심해서 잠들기가 쉽지 않아, 라는 핑계로 밤늦게까지 컴퓨터를 붙들고 있던 명수의 말이라 믿음은 가지 않았지만, 더운 건 사실이었다.

단유는 푸른 나무의 잎사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감상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는 능숙해져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디아트리의 호흡을 구사하게 되었다. 머리가 맑아지고 몸 구석구석까지 힘이 전달되는 게 느껴질 정도다. 무엇보다 이 호흡을 하는 동안은 시야의 한계가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단지 앞만 보는 게 아니라 옆과 뒤의 움직임과 변화가 보지 않아도 느껴지고, 마주한 사람의 미세한 변화도 눈으로 인지하는 것 이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명수가 뱉은 거친 호흡 속에서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고민하는 게 있어?”

단유의 물음에 명수가 곁눈으로 단유를 본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냥, 요즘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 생각?”

“예전에 같이 지냈던 아이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 형근이 형, 철용이 형, 다영이 누나, 소미 누나, 윤정이 누나, 기웅이 형, 유철이, 재민이, 지선이 다들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명수의 입에서 막힘없이 나오는 이름들을 보니 명수가 실제로 그들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유는 잠시 그 이름들과 얼굴들을 떠올리다 대꾸했다.

“지선이는 보러 갈 수 있잖아.”

“아프다며?”

어릴 때는 몰랐는데, 지선이가 보기보다 몸이 약했다. 작년에도 감기 때문에 학교도 빠질 정도라 해서 병문안을 가기도 했는데, 그 이후로 지선이는 계속 아팠다 나았다를 반복했다.

“한 번 보러 가자.”

이런저런 이유로 지선이를 자주 보러 가질 못했던 두 사람은 생각난 김에 지선에게도 병문안을 가기로 결정했다.

“오랜만이구나?”

지선의 아버지이자, 학교의 수학 선생님이신 승민이 두 사람을 반겼다. 사모님도 나와서 두 사람을 두 팔로 안아주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어쩜 이렇게 컸어? 이러다 두 사람 다 농구 선수 하는 거 아냐?”

“얘는 몰라도 전 아니에요. 전 무조건 축구 선수 할 건데요.”

“알지, 우리 명수가 축구 잘 하는 건 내가 왜 모르겠어? 그만큼 키가 컸다는 소리지.”

반달 눈으로 명수의 등을 톡톡 두드려주는 사모님에게 명수는 히죽 웃음을 지어보였다.

“지선이는요?”

“아, 지금 방에 있어.”

“자나요?”

“응. 사실 조금 전에 잠들었어.”

승민이 끼어들었다.

“이러지 말고, 일단 거실로 가자.”

승민은 두 아이를 거실로 안내했다. 세 사람이 자리를 잡는 사이, 사모님은 주방에 들어가 음료수를 준비했다.

“어떻게, 방학은 잘 지내고 있냐?”

“저희 지난주에 봉사활동 하고 왔어요.”

“나름 내신 걱정은 하나 보구나?”

승민은 명수를 보며 기특하다는 듯 물었다.

“내신 때문이 아니라요, 그냥 친구들이랑 기억에 남을 일을 남기고 싶어서요. 보육원으로 봉사 활동을 갔었어요.”

“보육원?”

승민이 살짝 놀란 눈으로 두 아이를 쳐다보았다. 물론 못 갈 곳은 아니지만, 두 아이가 어떤 생각으로 보육원을 갔을까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단유가 명수 대신 설명을 보충했다. 간간이 명수가 봉사 활동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었는지를 곁들이니 승민은 대견하다는 얼굴로 두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 사이 사모님도 자리에 함께 해서 두 아이를 칭찬하며 한동안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엄마.”

방문이 열리고 눈을 비비며 나타난 지선의 등장으로 대화가 끊어졌다.

“깼니, 지선아?”

“···안녕?”

멀뚱히 거실을 보던 지선이 시크하게 인사를 하자, 단유는 그만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우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깬 거 아니지?”

명수가 히죽 웃으며 물었다.

“오빠 목소리가 제일 크더라.”

“넌 꼭 말을 해도 그렇게 하더라.”

“뭐 사 왔어?”

“뭐?”

“병문안 온 거잖아? 그럼 뭐라도 사 들고 왔어야지, 빈손으로 왔어?”

“야!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지!”

“엄마, 저 오빠 돌려 보내.”

거실에 웃음꽃이 피었다.

****

팬카페에서 시작된 논란은 곧 몇몇 커뮤니티로 옮겨갔다. 그리고 커뮤니티와 팬카페를 들락거리며 기사거리를 찾던 기자의 눈에 띄었다.

「리본 소녀 불화설, 그 정체는?」

「리본 소녀, 무대 불성실 논란」

언론은 제목 짓기에 열중했고, 곧 세인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하여 페이지뷰 수를 늘렸다. 그리고 기사는 카페 내에서 논란 중인 내용을 마치 사실인 양 써놓고 소속사의 대응을 기다린다는 식으로 마무리했다. 그러자 열성팬들이 그 기사에 몰려들어 리본 소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개념 없는 기자 새끼, 취재도 안 하고 뇌피셜이네.

-없는 소리 지어내는 기레기가 또.

열성 팬덤은 언론의 기사를 부정하고, 기자를 모욕했다. 기자는 다시 그런 팬덤의 경향성과 가수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를 토해내고, 다시 팬덤은 방어와 공격으로 자기 가수를 지키고 사방에서 몰려드는 창날같은 독설에 맞대응했다.

논란은 또 다른 논란을 낳고, 충돌은 더 큰 충돌을 야기했다.

“왔는가.”

유 대표는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으며 룸으로 들어오는 심 대표를 맞이했다.

“언제 왔어? 오래 기다렸나?”

“아냐, 나도 방금 왔어.”

심 대표도 식탁 앞에 자리하고 앉자, 유 대표는 자연스럽게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요즘 너무 돌아다니는 거 아냐? 좀 쉬엄쉬엄해. 그러다 자네 먼저 지치겠어.”

“자네야말로 보신 좀 하고 살아. 제수씨가 자넬 못 알아보겠어.”

“살이 좀 많이 빠지긴 했지? 굳이 다이어트 할 생각은 없었는데, 얼굴이 이러네.”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며 머쓱하다는 시늉을 해 보이는 유 대표였다. 소리없는 웃음과 함께 잔을 들어 보이자, 심 대표도 잔을 들었다. 특별한 건배사 없이 유리잔의 작은 울림으로 건배를 대신했다.

“그런데 말이야.”

“음.”

“리본 애들은 어떻게 하지?”

심 대표는 유 대표의 걱정에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긴 뭘 어떡해 해? 그냥 둬.”

“자네는 요즘 기사 안 보나? 좀 시끄러워야 말이지.”

“원래 언론이란 게 그래. 사소한 거로 떠들어대고. 그런 걸 일일이 대응하려 하면 피곤하기만 하고, 또 괜한 오해를 낳을 뿐이야. 지금은 그냥 가만히 두는 게 상책이라고.”

심대표는 별로 걱정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유 대표는 느긋해 보이기까지 하는 심 대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 대표는 그런 유 대표의 표정을 일견하고 말을 이었다.

“자네가 지금 외부 일로 정신없는 건 알겠지만, 안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은가? 일단은 나한테 맡겨.”

“그럴 수 없으니 하는 말이지. 벌써 홍콩 쪽에서 전화가 왔어. 문제없는 거냐고.”

“걱정 말라고 전해. 어차피 리본 소녀도 상반기 활동 마무리하고 나면 휴식이고, 그 휴식기간 동안 재정비하면 돼. 들어보니 도연이도 당분간 휴식만 취하면 좋아질 거라고 했다니까 일단 그렇게 믿고 가면 돼.”

심 대표는 자신이 직접 캐스팅한 도연에게 신뢰가 있었다. 아직 어린 아이고 연예계란 곳에 적응한 지 이제 1년도 채 안 된 아이였다. 경험과 경력이 쌓이면 충분히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이 많은 아이였다.

“포기할 생각은 없나 보군.”

“포기라고? 누굴? 도연이?”

유 대표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심 대표는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절대. 그 아이, 충분히 이 바닥에서 뜨고도 남을 아이야. 내 눈 알잖아? 만약 지금 그 아이 놓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야.”

“그 아이가 언제 뜰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란 생각이 들어. 특히 지금 이 시기에 그 아이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라고. 어쩌면 리본 소녀가 완전히 묻히는 수가 있다고. 이 봐. 연예인은 이미지야. 이미지로 먹고 사는 애들이라고. 그런데 그 이미지에 심각한 금이 갔어. 고장난 상품은 수리를 하든, 교환을 하든 해야지.”

“자네 말대로야. 고장 났다면 수리를 하면 되지, 고장 났으니까 버리는 건 낭비야.”

“자네가 계산이 빠른 건 알지만, 이번 일은 일단 나한테 맡겨. 언론도 내가 알아서 만져볼 테니까.”

“가능하겠어?”

“윤 팀장도 자신 있다고 하니까.”

“윤 팀장이?”

재능있고 욕심도 많은 매니저 출신 팀장. 밑바닥에서 오래 구른 탓에 이 바닥 생리를 잘 꿰고 있기도 하거니와, 성실함과 재치를 두루 갖춘 인물이라 인정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윤 팀장은 정이 많다. 때로는 정이 사업적 판단을 내리는 데 걸림돌이 된다, 고 유 대표는 생각했다.

“요즘 대세가 리얼이잖아? 솔직한 거.”

“뭐, 그래서 솔직하게 이야기하자고? 뭘? 아이돌 1년 차가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그게 회사 이미지에 더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거참, 성격도. 혼자 시나리오 쓰지 말고. 일단 이런 식으로 갈 생각이야.”

심 대표는 며칠 전 윤 팀장과 이야기를 나눴던 내용을 유 대표에게 들려주었다.

“그게 될까?”

“잘 되길 바라야지. 잘 될 거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자네 말대로, 아이돌은 이미지잖아? 이참에 이미지 하나 만들어보는 거지.”

심 대표는 이야기는 여기까지라는 듯, 술잔을 들어보였다. 유 대표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술잔을 마주쳤다.

“그나저나, 자네 이야기나 해봐. 홍콩은 완전히 픽스가 된 거야?”

“이 상황에서 픽스는 무슨.”

“이럴 때일수록 더 여유를 보여야, 투자자도 자넬 믿을 거 아닌가.”

“나를 믿으면 뭘 하나? 회사를 믿어야지.”

“회사가 곧 자네고, 자네가 곧 회사야. 대중들에게 아이돌이 하나의 표상이듯, 투자자들에겐 자네가 표상이야.”

“하아. 이럴 때는 차라리 자네 단독으로 대표 이사를 맡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아까도 말했지? 난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그 눈이 자네를 공동 대표로 뽑은 거야. 날 믿어.”

사람 구슬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심 대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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