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 그늘 아래(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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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점심식사를 하기 전, 작업을 모두 마칠 수 있었던 단유네는 욕실로 가서 등목을 했다.
“일한 후에 등목은 필수야.”
청년은 웃음을 터뜨리며 단유의 등을 소리 나게 때렸다.
“이야, 너 운동 좀 했나 보다? 몸 좋은데? 오, 명수 너도 보통이 아니구나? 요즘 중학생들은 다 이러냐? 너희 뭐 학교에서 맞고 살진 않겠다?”
열심히 맞은 덕에 징계를 피할 수 있었던 단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차가운 물로 등목을 했더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어푸, 어흐, 어흑.”
명수의 엄살 섞인 신음에 청년은 물론이고 단유도 웃음을 터뜨렸다. 점심은 보육원에서 미리 준비해주었다
“입에 맞을지 몰라도 한 번 먹어봐요.”
“이렇게 준비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반찬도 김치만 있으면 되는걸요.”
단유네와 같이 일했던 청년들 중 한 명이 너스레를 떨었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즐거운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참 웃는 걸 즐기는 사람들이라는 생각과 함께, 타인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기에 마음의 여유가 있어 저렇게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추측도 해보았다.
“밖에 많이 덥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지태의 물음에 명수의 핀잔이 이어졌다. 명수도 땀 흘리며 정신없이 힘을 썼더니 도리어 기운을 차린 모양이었다.
“우리도 고생했다고.”
빨랫감이 얼마나 많았는지, 기저귀를 깨끗하게 씻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를 장황하게 털어놓는 지태에게 조용히 있던 채윤이 한마디 했다.
“밥 먹는데 그만하지?”
그냥 빨래도 아니고 기저귀였다. 작은 거, 큰 거 고루 섞인 기저귀들을 빨았던 기억에 비위가 상했던 모양인지 채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지태를 타박했다.
타박과 핀잔 속에서도 꿋꿋이 식사를 마친 지태는 디저트로 주어진 요구르트를 핥아 먹으며 다리를 쭉 뻗었다.
“아, 좋다!”
지태의 얼굴에 가득 떠오른 미소를 보니 절로 행복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단유만의 느낌은 아닌지, 채윤과 명수도 흡족한 표정으로 지태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늘을 지나는 바람을 맞으며 여유를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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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리본 소녀였습니다!”
리더의 선창에 이어, 다른 두 멤버도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두 손을 흔들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무대를 마친 리본 소녀 멤버들이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을 때, 희숙은 그녀들에게 수건을 한 장씩 건넸다. 부산이고 무대가 바닷가 옆이라도 덥긴 매한가지여서 고작 2곡을 불렀을 뿐인데 땀이 흥건했다. 옷의 재질이 바람이 잘 통하는 것도 아닌 데다, 머리카락이 모두 등을 덮을 정도로 길어서 더 더웠던 소녀들이었다.
세 사람 모두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늘어진 머리를 감아올리고 한 손으로 고정한 채, 다른 손으로 수건을 받아 목 뒤를 두드렸다.
“수고했어.”
“고맙습니다.”
“얼른 정리하고 차에 타.”
야외무대라 천막을 치고 임시 대기실로 사용했는데, 선풍기가 돌아가긴 해도 덥긴 매한가지라 다들 빨리 밴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리더는 멤버들에게 ‘이어 마이크’를 받아 능숙하게 돌돌 감은 뒤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그 사이 멤버들은 얼른 구두를 벗고 편한 신발로 갈아 신었다. 옷도 갈아입고 싶지만, 열악한 천막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기엔 어려운 점이 많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뒷무대를 준비하는 다른 가수 선배들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그 밖에 다른 스태프, 매니저들에게도 일일이 인사를 했다. 천막 앞 무대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악 소리 때문에 적당히 인사해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리본 소녀는 큰 목소리로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치며 인사해야 했다. 인사야말로 연예계 활동의 핵심, 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열심히 허리를 숙였다 폈다.
밴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뒷무대를 포기하고 리본 소녀를 보기 위해, 혹은 사진을 찍기 위해 달려든 팬들이 무리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리본 소녀 멤버들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한 번만 쳐다봐 달라고 손을 흔들어댔다. 매니저와 희숙이 앞뒤로 서서 길을 트고 팬들이 들러붙는 것을 막으며 리본 소녀를 안내했고, 그 사이에 멤버들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거나 손 인사를 보내며 아는 체를 했다. 실제로 모인 사람 중에는 팬 사인회 등에서 자주 보는 얼굴도 있었기 때문이다.
“비켜요, 붙지 마요!”
“여기요! 여기 한 번 봐줘요!”
소란과 혼란 속에서 밴에 도착한 멤버들이 차에 오를 때, 뒤쪽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도연아! 아프지 마!”
도연은 돌아보며 ‘아프지 않아요’라고 변명했다. 그 대답을 끝으로 밴의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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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오후에는 짬을 내서 보육원 아이들도 보고 같이 놀아주는 시간도 있는데, 오늘은 야외가 너무 더우니까 방에서 간단히 인사만 하는 정도로 하자.”
강당 같은 게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시설은 가지지 못한 영유아 보육원이었다. 결국 다 같이 모일 자리가 없으니, 봉사자들이 따로 가서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결정했다.
“저희는 그냥 일할게요.”
단유와 명수만 빼고. 지태나 채윤이는 그래도 보육원에서 애들이랑 놀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란 생각에서 단장의 의견에 쉽게 수긍했지만, 단유와 명수는 그러지 못했다.
“왜? 혹시 아이를 싫어하니?”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굳이 강요할 문제는 아니다만,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도 봉사야. 그리고 대부분 여기 오는 사람들은 그런 도움을 생각하고 오는데, 너희는 아예 작정하고 일만 하러 온 사람 같구나?”
단유는 명수를 바라보았고, 명수도 단유를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였다. 돕는다는 행위에 대해서는 모두가 같은 생각일 테다. 하지만 명수와 단유는 아이들을 만나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놀아줄게’라고 얘기하는 게 어색했다. 그건 마치 자기 자신에게 놀아줄게,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 단장님. 그 아이들은 제가 따로 부탁할 게 있어요.”
마침 부원장님이 원장실에서 나와 그 모습을 보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아, 그래요? 미리 이야기가 된 거였구나. 뭐, 알겠다. 그래도 봉사 활동 마치기 전에 잠깐 아이들을 만나서 인사라도 하렴. 정이 많이 고픈 아이들이니까, 잠깐이라도 만나서 자신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들이고 그들을 걱정하고 아껴주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려주는 게 중요해.”
“네, 단장님.”
딱히 지적할 부분은 없는 말이었다. 좋게 생각하면, 너희가 받은 행복을 아이들에게도 나눠줘, 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이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될 수밖에 없는 단유와 명수였고, 그때 느낄 감정과 생각들이 차마 마주하기 힘들었다.
“괜찮니?”
부원장이 눈썹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별일 아니에요.”
부원장의 물음과 단유의 대답 사이에는 묘한 간극이 있었다. 어쩌면, 부원장도 당사자가 아니기에 느끼지 못하는 감정이라, 단유와 명수의 태도를 오해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답한 것처럼 ‘별일’까지는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래서 단유와 명수가 적당히 미화된 과거를 기억할 나이에 무덤덤해질 수 있는 노련함을 얻게 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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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이 오늘도 이상함?
-뭔가 어색한 표정인 데다가 얼굴빛도 안 좋은 거 같음.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닌가? 아까 퇴근길에 괜찮냐고 물으니까 억지로 대답하는 것 같던데?
-뒤에서 여자 매니저가 손으로 밀치는 거 본 사람? 막 구겨 넣는 것 같더라.
-윤 팀장인가? 그 사람도 계속 인상 쓰고 있지 않았나요?
-나도 봤음.
-도연만 이상한 게 아니고 요즘 전부 이상한 거 같음. 오늘도 무대 끝나자마자 도망가듯이 가는 게 수상함.
-원래 무대 끝나면 빨리 집에 가야 하는 거다.
-아닌데? 원래 무대 끝나고 미니 팬미팅 같은 거 하고 그러던데?
-솔직히 부산까지 왔는데 그 정도 팬서비스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이기적인 새끼를 봤나. 애들이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다가 다시 서울 가야 하는데, 안 피곤하겠냐? 걔들도 사람이다.
-말 막 하네. 누가 이기적인데? 너 알바냐?
-하여튼 이런 놈들 있어요. 남들이 애들을 아이돌이라고 상품 취급해도 팬이라면 상품이 아니라 사람으로 봐줘야 하는 거 아닌가?
-씹선비 등장.
-알바 2.
-상품이고 인간이고 떠나서 팬들이 응원해주고 찾아와주면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는 게 예의 아니냐? 솔직히 팬 없으면 걔들이 어떻게 1등 먹고 그러냐?
-분탕 치지 마라. 너 타 팬이지?
-지랄하네. 미친 것들. 애들이 인사하고 안 하고가 뭐가 중요하다고. 지금 지랄하는 것들 반은 타 팬이거나 붙덕이다. 난 무대 봐서 좋았다.
팬 사이트에서 난리가 난 동안, 서울로 가는 밴 안은 더위에 지쳐 쓰러진 리본 소녀 멤버들이 쥐 죽은 잠에 빠져들었고, 매니저는 어두운 고속도로의 붉은 후미등을 눈으로 좇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저께 도연의 부탁 때문에 단유가 회사에 오는 것을 허락했다. 솔직히 지금도 그게 도연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은 의구심은 있었다. 하지만 의사에게 물었을 때,
“일단 도연 씨가 원하는 방향으로 들어주세요. 지금 도연 씨에겐 심리적 안정이 제일 중요해요.”
라는 대답을 들은 뒤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금은 나아지겠지, 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역시 극적 반전은 없었다. 도연은 무대에서 계속 굳은 표정이었고, 무대 인사를 하는 데도 힘이 없는 모습이었다.
“되도록 도연이는 안 잡는 방향으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부탁도 PD에게 해야 했다.
“방송 화면상 안 잡힐 수가 없는데.”
“그래도 부탁드립니다.”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아뇨, 별일은 없고요.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도연이가 피곤하면 얼굴에 금방 드러나는 스타일이라서.”
피디가 혀를 차며, 애들 너무 막 굴리는 거 아냐, 라고 혼잣말 같은 비난을 할 때도 그저 웃음으로 때워야 했다.
“아주 안 잡을 순 없지만, 되도록 카메라에 원샷이 안 잡히게 해 줄게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그게 더 오해를 살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저희가 감당해야죠. 우선은···팀이 살아야죠.”
“···윤 팀장, 이기적이네.”
그래도 피디는 매니저의 말을 지켜주려 했고, 일단은 녹화방송이었기에 시간은 벌었다. 하지만 논란을 불식시키려면 빠른 조치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매니저는 수첩을 뒤적거리다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대훈씨? 나 윤 팀장인데. 부탁할 게 있어서. 거기 라디오 방송 혹시 게스트 필요하지 않아?”
얼굴이 보이지 않고, 무대도 아니니까 도연의 웃음소리를 들려주기엔 적당하리라. 설마 라디오에서마저 문제가 생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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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버스에 올라탈 때 즈음, 다들 조금은 지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다고 시무룩하거나 우울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뿌듯한 그런 기분. 그래서 서로를 보며 유쾌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정도였다. 가장 뒷자리에 주르르 앉아서 저물어가는 노을을 얼굴에 담는 네 사람이었다.
“오늘 여기 오길 잘했다.”
“나도.”
지태와 채윤이 옆에 앉은 단유 등을 보며 말했다.
“역시 믿고 맡기는 단유야.”
“내가 뭐?”
“네가 여기 오자고 해서 오늘 같은 경험을 한 거잖아. 사람을 돕는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인 거 같아. 아까 만난 고등학생 누나들처럼 나도 사회복지학과나 가 볼까?”
“네가 기분 좋은 게 봉사 활동을 해서인지, 아니면 누나들 전번을 따서인지 모르겠다.”
“전번 땄어? 재주도 좋아?”
“야, 내가 단유보다는 못해도 얼굴이 못생긴 편은 아니잖아? 나름 매력적인 얼굴이라고.”
자신의 외모가 여자들에게, 연상의 여자들에게도 먹힌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우리한테 매력 어필을 해서 뭐하게?”
“···그냥 그렇다고.”
생각난 김에 문자나 보내볼까, 라며 핸드폰을 꺼내 드는 지태였다.
“단유야.”
명수가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응?”
“다음에 또 올까?”
“···그래.”
“오려면 다 같이 와야지? 이런 거면 집에서도 별로 반대 안 하겠는걸? 어차피 내신 때문에라도 봉사 활동 해야 하는데, 핑계도 대고 기분도 좋고, 일석삼조네.”
“두 개는 알겠는데, 한 개는 또 뭐야?”
“니들이랑 다 같이 할 수 있는 거잖아.”
아마 오늘 지태가 한 말 중에 유일하게 흘려듣지 않았던 말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