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25화 (525/956)

보리수 그늘 아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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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햄버거 허락하신 거예요?”

헤어샵의 한구석에서 제순은 희숙의 물음에 별거 아니라는 듯 햄버거를 베어 물고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애들이 먹고 싶어 하잖아.”

“애들 먹고 싶다고 다 허락하면, 몸 망가지잖아요.”

“햄버거 하나 갖고 망가질 몸이면 이미 진작에 망가졌어.”

“그래도요.”

평소 같지 않다는 의심으로 바라보는 희숙에게 제순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도연이 있잖아.”

“그렇죠? 역시 도연이 때문일 줄 알았어.”

짐작했다는 듯,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희숙이었다.

“당분간은 도연이 때문에라도 분위기를 조금 유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싶어서.”

“이해는 해요. 그런데 다른 애들이 알면 섭섭해하지 않을까요?”

“뭐가 섭섭해?”

“차별한다고요.”

“이게 무슨 차별이라고. 다 지들 잘 되자고 하는 짓인데.”

“아직 어린 애들이잖아요. 이런 거에도 민감하게 영향을 받을 거예요.”

이번엔 제순이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희숙을 바라보았다.

“혹시, 애들 사이에 무슨 문제 있어?”

희숙이 화들짝 놀라며 먹던 햄버거도 내려놓고 두 손을 흔들었다.

“아니요.”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는 표정을 지어? 더 의심스럽게?”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워낙 민감한 나잇대 애들이니까 조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죠. 애들은 문제없어요. 서로들 얼마나 아끼는데요.”

도연이가 최근 상담을 받는 것을 아는 아이들은 병원에 다녀온 도연이를 다독여주기까지 한다, 는 희숙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순은 햄버거를 한입에 넣고 손을 털었다. 목이 멜까 봐, 콜라를 집어 주는 희숙의 친절을 받아든 제순은 빨대를 쪽쪽 빨고는 만족한 듯 콜라를 내려놓았다.

“지금이 중요한 시기야. 도연에게도, 리본 소녀에게도. 그리고 우리 회사에도.”

“회사요?”

“뭐,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해줄게. 아무튼, 지금은 애들 활동에만 집중하고 문제 안 생기게 주의하자고. 일부러라도 좋은 분위기 만들어서 애들이 활동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고. 비활동 시즌인데 너무 애들 잡는 것도 안 좋잖아? 잡는 건, 컴백 때 해도 되니까.”

“네, 뭐.”

“그리고 가서 애들 햄버거 몇 개 먹었는지 확인해봐.”

“네?”

방금 애들 좀 풀어주자더니?

“그래도 많이 먹는 건 안 되지. 적당히 잡아줄 줄도 알아야지. 안 그럼 네가 왜 여기 있냐? 뭐 하냐? 안 가고?”

“아, 네.”

희숙이 얼른 일어나 아이들에게로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런 줄도 모르고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

“야, 오늘 정말 날 잘못 잡은 거 아냐?”

지태의 투덜거림에 채윤이 핀잔을 줬다.

“봉사활동을 하는데 날이 어딨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야, 이것 봐라. 오늘 야외 활동을 금하란다.”

핸드폰에 뜬 경고 메시지를 보이며 항변하는 지태를 무시하고 세 사람은 부지런히 걸었다.

“저긴가?”

2층짜리 다세대 주택처럼 보이는 건물은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많이 떨어져 있진 않았지만, 다른 집들과 거리가 있긴 했다. 다만 혐오시설이나 그 외 불편한 이유로 떨어져 있지는 않아 보이는데, 일단 건물이 새 건물처럼 보였고, 외벽에 칠해진 페인트는 밝은 아이보리 색감에 방금 칠한 것 마냥 깨끗했다. 주변으로는 큰 사각형을 그리며 담장이 서 있고, 건물의 앞에는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는데 과거 단유가 살았던 보육원에 있던 운동장만 하지는 않아도 어린아이들이 소꿉장난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어 보이는 마당이었다.

“저기 맞네.”

채윤이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멀리 ‘진연 보육원’이란 명판이 입구 옆에 걸려 있었다.

“되게 좋은 곳 같다?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보다 더 좋은데?”

지태는 연신 더위에 허덕대면서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지치지 않는 체력은 명수 부럽지 않았다.

“힘 있으면 이거라도 들어.”

채윤이 두 손에 든 봉지를 들어 보이며 힘든 표정을 지었다.

오기 전, 단유의 아이디어로 마트에 들린 이들은 먹을 것들을 한가득 샀다. 그냥 한 가득도 아니고, 각자 양손에 한 봉씩 들었다.

“없어서 못 먹지, 있으면 금방 먹어.”

명수의 강력한 주장에 단유가 동의해주면서 마트를 쓸다시피 한 네 사람이었다. 물론 부피와 질량이 비례하지 않으니, 그렇게 무겁지만은 않았지만 더운 날씨에 뭔가를 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다 왔는데 뭘 그러냐? 그냥 들고 가.”

지태가 더운 공기를 후 뱉으며 보육원 입구로 힘차게 걸어갔다.

“바람도 더워.”

더위를 많이 타는지 채윤이 한마디 했다. 사실 버스에서 내린 후부터 단유가 간간이 능력을 썼다. 하지만 공기마저 뜨겁게 데워진 터라 마치 온풍기에서 나오는 것 같은 바람에 더위가 쉽게 가시진 않았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낫겠지, 란 생각에 계속 능력을 사용하긴 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머리에 쓴 밀짚모자였다.

“안녕하세요.”

“어서들 와요. 어제 전화한 학생들 맞아요? 아이고, 어린 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이렇게 많이 사 들고 왔어요?”

지태가 입꼬리를 늘리며 자랑하듯 말했다.

“혹시 몰라서 아무거나 다 사 왔어요.”

“아이들이 좋아할 거예요. 이러지 말고 더운데 얼른 들어들 와요.”

네 학생을 맞이한 사람은 보육원의 부원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고, 단유를 비롯한 아이들도 짧게 자기 이름을 소개했다. 흐뭇해하는 표정을 짓는 부원장은 재차 반갑다는 인사를 하며 상담실로 이들을 안내한 뒤, 말을 이었다.

“원래 우리 보육원엔 방학 때마다 정기적으로 봉사 오시는 학생들이 있어요. 그래서 으레 그 학생들이겠거니 했는데 처음 오는 학생들이라고 해서 조금 놀랐어요.”

아이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다 단유에게로 시선이 몰렸다. 그래서 단유가 대표로 대답했다.

“저희도 보육원 봉사활동은 처음이라서 잘 모르는 게 많아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와 준 것만으로도 아이들한테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네 아이를 바라보는 부원장의 눈빛이 부드럽다.

“저희가 뭘 도와드리면 되나요?”

결국, 지태가 먼저 나서서 물었다.

“뭐 고칠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얘가 못질 같은 거 잘할 거예요. 힘이 좋거든요.”

지태가 명수를 가리키자, 명수가 왜 뜬금없이 자신을 가리키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얘는 꼼꼼해서 빨래 같은 거 시키면 잘할 거고요.”

이번엔 채윤이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얘는, 뭘 시켜도 다 잘할 거예요. 우리 학교에서 제일 똑똑한 애거든요.”

“학교에서?”

“전교 1등이에요. 3년 동안.”

“어머, 얼굴만 잘생긴 줄 알았더니 머리도 좋은 친구였네요?”

“잘 생겼죠?”

“다른 학생들도 다 잘 생겼어요. 학생도 보니까 여자들이 많이 좋아할 얼굴인걸요?”

“정말요? 흐흐, 그런데 제가 아직 여자친구가 없어서.”

“봉사활동 다니다가 정이 들어서 사귀는 커플도 많아요.”

“그 말씀은 계속 봉사활동을 하라는 말씀?”

“학생도 머리가 좋네요.”

“제가 잔머리는 좀 좋아요.”

바보스러운 웃음을 흘리는 지태의 넉살에 부원장이 소리 내어 웃었다.

“재밌는 친구네. 그런데 처음 봉사 활동하는 학생들이 보육원에 오면 아이들부터 먼저 보려고 하던데, 학생들은 안 그러네요?”

“아, 그게요.”

지태가 눈치를 보다가 대답을 단유에게로 넘겼다. 지태의 눈빛을 읽고 단유는 살짝 난감해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예전에 보육원에서 지냈거든요.”

“예전에? 아, 부모님이 멀리 계셨었나 봐요?”

“아뇨. 부모님은 안 계시고요. 초등학교 때까지 보육원에 있었는데, 중학교 올라올 즈음에 독지가분의 도움으로 따로 나와 살게 됐어요.”

“어머, 정말요?”

부원장은 진심으로 놀란 표정이 되어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가 슬쩍 명수의 눈치를 살핀 뒤, ‘저 친구도 같이 지내다가 같이 나왔어요’라고 소개하자, 부원장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놀란 감정을 숨길 수 없다는 듯 손뼉을 쳤다.

“전혀 몰랐어요. 아니, 그보다 미안하네요. 보육원에 있다 나왔다길래 지레 부모님이 계신 거라고 생각해서···. 혹시라도 마음에 걸린다면, 죄송하네요.”

“아뇨, 사실 별로 감출 생각도 없었는걸요. 저 입 싼 친구가 방정을 떨지 않았다면 좀 더 자연스럽게 밝힐 생각이었어요.”

“그렇군요.”

부원장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단유와 명수를 보았다.

“어려운 점은 없고요? 하긴 두 사람 표정을 보니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제가 더 기쁘네요. ···우리 아이들도 학생처럼 행복한 가정에 들어갔으면 좋겠네요.”

“네.”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해도 무의미하고. 부원장도 더 깊이는 묻지 않았다.

“아, 그럼 보육원에 있는 동안 봉사활동 나오는 사람들을 많이 봤겠군요.”

“네. 그때도 많은 분들이 보육원 내부의 잡일들을 도맡아 해주신 덕분에 꽤 편했던 기억이 있어서요. 아이들 보는 건 선생님들이 더 잘하시잖아요. 저희가 아이들을 만나봐야 서로 낯설어서 불편할 뿐이죠.”

순화시키긴 했지만, 단유나 명수의 경험에 비춰도 그런 식으로 대면하는 건 좋지 않았다. 아이들이 먼저 다가오면 모를까,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전시된 상품 고르듯 마주하는 건 받아들이는 아이들 입장에서도 껄끄럽다.

“역시 속이 깊어요.”

부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오늘, 날이 너무 더워서 괜찮을까 모르겠어요. 오늘은 우리 아이들도 실외 활동을 못 하게 막아 놓은 상태라.”

“괜찮아요. 물만 자주 마시면 별문제 없을 거예요. 오는 길에 이렇게 밀짚모자도 하나씩 샀는걸요.”

지태가 손에 쥐고 있던 밀짚모자를 흔들어 보였다. 과자를 사고 나오는 길에 시장 골목에서 팔고 있던 밀짚모자를 보고 지태가 충동구매를 해버렸는데 단유도 그게 나름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해서 다른 아이들 것까지 사버렸다. 참고로 선물이나 모자를 사는 데 단유가 가장 많은 몫을 담당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돈이 가장 많으니까.

친구들은 모르지만 단유 통장에는 이미 본인 나잇대에 벌기 힘든 목돈이 저금 되어 있었다. 다른 애들은 그저 아르바이트한 거라고 알고 있지만, 단유의 통장은 정기적으로 불어나는 중인데다, 평소에도 써봐야 애들 용돈 수준이고 남들 다 가는 피시방도 잘 가지 않는 단유였기에 한 번씩 큰돈을 써도 몰아 쓴다 생각해서인지 이상하게 여기질 않았다.

“사실 날만 덥지 않으면, 마당 주변에 난 잡초를 뽑아달라고 했을 텐데, 그건 좀 무리인 것 같아서 고민을 했는데···.”

부원장인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명수가 입을 열었다.

“창문 닦을까요?”

“창문을?”

“아···예전에···누나랑 형들이 방의 창문들을 막 닦던 게 생각나서···.”

명수가 수줍게 말을 잇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부원장은 그 모습을 보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것도 괜찮겠네요. 보시다시피 우리 보육원 주변 길이 비포장도로다 보니 먼지가 좀 많이 쌓이거든요.”

영유아 보육원이기에 시설 관리를 할 직원이 모자란 편이기도 해서 창문 닦기나 이런 부분은 보통 자원봉사자들에게 맡기긴 한다. 어쩌면 갓 칠한 듯한 페인트도 주기적으로 봉사활동 나온 이들이 도움을 준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네?”

곧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보육 교사로 추정되는 젊은 여성 한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

“다른 봉사자분들 오셨는데요.”

“아, 그래요.”

부원장은 고개를 돌렸다.

“사실 오늘 오기로 한 분들이 더 있거든요. 그 분들이랑 같이 하면 되겠네요. 같이 인사 나누실래요?”

“그럴게요.”

“그래요. 아, 이 선생님. 여기 이거 애들 간식인데 일단 주방에 놓아두죠?”

“네, 선생님.”

이 선생님이란 분이 들어와 여러 꾸러미들을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채윤이 얼른 봉지들을 들며 말했다.

“저희가 들고 갈게요.”

“네, 고마워요.”

네 아이들은 다시 두 손에 가득 봉지를 들고 상담실을 나왔다. 복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몇몇과 눈이 마주쳤고, 아이들은 얼른 뒤돌아서 도망을 갔다.

“부끄러워서 그래요.”

“네.”

그 모습을 보니 옛 생각이 났다. 그리고 예전 보육원에서 함께 지냈던 아이들의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슬쩍 명수를 보니, 명수도 비슷했던지 마침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수의 얼굴에 살짝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난 괜찮아, 라고 말하는 표정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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