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 그늘 아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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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 않을까?”
“그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당일치기로 가자.”
“당일치기?”
명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단유를 돌아보았다.
“내일 선생님 쉬시는 날이잖아? 선생님이랑 다 같이 가면, 부모님들도 허락해 주시지 않을까?”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도 쉬어야지.”
“아냐, 지난번에 그랬어. 여행 가고 싶다고.”
“그 여행이 당일치기로, 게다가 밑에 애들을 달고 가는 여행을 말하는 건 아닐 것 같은데.”
채윤이 끼어들었고, 그 말에 단유가 동의했다. 그리고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굳이 다 같이 하는 걸 원한다면, 여행은 포기하고 그냥 기억에 남는 일을 하는 게 어때?”
“어떤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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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모처럼 학원 동료 선생님들과 새벽까지 달린 하은은 깊은 잠에 빠져 일어날 줄 모르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목마르지?”
혀를 쭉 빼물고 단유를 향해 눈동자를 반짝이는 호빵에게 물을 챙겨주고 개밥그릇에는 적당량의 사료를 채워 넣었다.
“준비 다 했어?”
“응. 대충.”
“그럼, 가자.”
평일이라면 학교에 갈 시간이니 이상할 것도 없겠지만, 일요일 아침, 그것도 방학 기간의 일요일 아침이다.
되도록 편한 복장을 갖춰 입은 두 사람이 조용히 오피스텔을 빠져나오려 하니 호빵도 의아하게 여긴 모양인지 사료 그릇에서 고개를 빼 들고 물끄러미 두 사람을 바라본다.
“선생님 잘 지키고 있어. 알았지?”
대상이 뒤바뀐 것 같지만, 딱히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은 없어 단유는 먼저 나가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명수는 말없이 층을 알려주는 액정 화면만 바라보았다.
오피스텔을 나오니 더운 공기가 확 밀려들어 코와 입을 막는 기분이었다.
“오늘 엄청 덥겠네.”
단유의 한 마디에도 명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단유는 명수의 마음을 헤아려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잠시 후, 건널목에 도착했을 때 채윤이 손을 들어 두 사람을 반겼다.
“일찍 나왔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나도 금방 나왔어.”
“지태는?”
“조금 있다 오겠지.”
아침 햇살을 피하려 세 사람은 근처 상가의 벽에 달라붙었다. 담벼락 아래 서서 햇살 비치는 아침 거리를 바라보는 기분은 묘했다. 특히 일요일 아침이라 돌아다니는 사람도 적은 마당이었다. 한산한 거리에 푸른 가로수의 울창한 잎들이 들리지 않는 바람 소리를 허밍처럼 들려주었다. 비록 좌우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차량들로 인해 소음이 있긴 했지만, 그 소음마저 현실과 별개인 느낌이었다.
세 사람이 말없이 그 거리를 한창 바라보고 있을 때, 지태가 헐레벌떡 나타났다.
“미안, 오래 기다렸어?”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정말 아무 일도 없이, 그냥 해를 피해 그늘에 서서 거리를 바라볼 뿐이었는데, 그 시간이 마치 현실에서 뚝 떼어놓은 느낌이었다. 단유와 명수는 물론이고, 채윤까지 그런 기분을 느낀 모양이었다.
“별로. 몇 시지?”
지태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좀 늦긴 했네.”
“가자.”
단유가 먼저 나서서 길을 청했다. 곧 네 아이들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봉사활동 간다고 하니까, 엄마가 네가 웬일이냐면서, 그러는 거 있지? 그러면서 네 칭찬을 하더라.”
역시 친구는 잘 사귀고 봐야 한다더라, 면서 어머니의 말을 전하는 지태에게 단유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도 폭염이라더라.”
아침에 나오며 뉴스에서 봤다는 지태는 지금 가기로 한 보육원에도 에어컨이 있는지, 없으면 더워서 쓰러지는 건 아닐지 걱정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지태의 말에 크게 반응이 없자, 지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니들, 나 없을 때 싸웠냐?”
“아니.”
채윤이 대표로 말했다.
“그럼 분위기가 왜 이래?”
채윤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명수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 중에서 가장 분위기가 이상한 사람은 다름 아닌 명수였으니까. 명수가 비록 ‘수다쟁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농담도 지태 못지않게 많이 하는 데다 이런 처진 분위기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명수가, 이렇게 화창한 일요일 아침에, 그러니까 전혀 처질 분위기가 아닌 상황에서 말이 없다는 것은 이상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명수야, 너 어디 아파?”
“아니.”
“그럼 왜 그러는데?”
“글쎄.”
명수는 자신의 짧은 머리를 한 번 크게 쓸어올렸다. 덥긴 했던지 작은 땀방울이 튀어 오르며 흩어졌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단유는 더운 숨을 후 뱉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 일 아니야.”
“넌 뭐 알아?”
“아니, 뭘 안다기보다는 나도 명수랑 비슷한 느낌이라서.”
명수가 단유에게 시선을 슬쩍 던졌다가 다시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도로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느낌인데?”
“우리 보육원에서 살다가 나왔잖아. 다시 그 보육원으로 간다니까 기분이 좀 그래.”
“아.”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지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100% 이해는 못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말인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싱숭생숭하고 그래?”
“조금.”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분?”
“그거랑은 조금 달라. 보육원을 고향이라고 생각하진 않으니까.”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10년 전 일기장을 다시 들추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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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국토 대횡단이라는 거대한 이벤트가 현실의 벽에 가로막힌 후, 단유는 자원봉사를 건의했다. 여태 자원봉사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주민센터나 도서관 등에서 6시간 내지 8시간 짜리 간단한(?) 일들만 했었다. 그러나 멀리 보육원을 찾아가 자원봉사를 하는 일은 일부러 피했다. 사실 일부러 피하지 않더라도 중학생들은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가기가 쉽지 않다. 보육원 자체에서 봉사활동 신청을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단유가 보육원에 있을 당시에도 봉사자들 중 가장 어린 축에 속했던 사람도 고등학생이었고 그마저도 봉사 단체에 속한 이였기에 받아주었지, 학생들끼리 봉사활동 신청을 하면 잘 받아주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네 사람이 가기로 한 곳도 영유아들이 대부분인 보육원이었다. 단유네가 살고 있는 장계동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여를 가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20 여분을 더 가야 나오는 곳이었다.
버스에 올라타니 에어컨을 세게 틀어놓았던지, 그제야 숨이 편하게 쉬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 여기서 내리기 싫어질 것 같다.”
지태가 손부채질을 하며 벌써 벌겋게 달아오른 볼을 식혔다. 채윤이 가방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선크림이었다.
“나 이거 바르면 얼굴이 너무 하얗게 변해서 이상하던데. 목소리를 얇게 내야 할 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
“얼굴이 익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채윤이 단유를 돌아보며 ‘너도 바를래’라고 물었고, 단유는 고개를 젓고 대신 명수를 가리켰다.
“괜찮아. 이미 이번 생은 글렀어.”
명수가 농담을 하니, 그제야 분위기가 조금 풀린다. 지태가 히죽 웃으면서 명수의 얼굴을 인디언에 비교했고, 아프리카 원주민에 비교하지 않아 줘서 고맙다는 명수의 대답이 이어지면서 곧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들 명수가 많이 심란해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채윤은 물론이고, 비슷한 마음인 단유까지 대화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다행히 버스에 탄 승객이 많지 않아 다행이지, 만약 사람이 많았다면 진작 한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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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 단유네와 달리 분주한 곳이 있었으니 바로 도연이 속한 리본 소녀의 숙소였다. 일요일이지만 음악방송이 잡힌 것도 아니어서 다행히 늦잠을 잘 수 있었던 리본 소녀는 꿀맛 같은 잠을 자다가, 매니저의 등장에 침대에서 일어나야 했다.
“오늘 저녁 행사 있으니까, 지금 준비해야 돼. 자자, 다들 일어나.”
윤 팀장과 함께 온 부매니저 희숙이 손뼉을 치며 이불을 끌어내렸다.
“언니, 조금만.”
“야, 지금 8시야. 충분히 잤잖아? 얼른 일어나. 그래야 밥이라도 챙겨 먹을 거 아냐?”
“아앙, 언니.”
팬들에게는 우레같은 환호성을 이끌어 낼 애교도 희숙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빨리 일어나! 언니 화낸다!”
“알았어요.”
반쯤 달아난 잠을 찬물로 완전히 깨운 뒤, 리본 소녀 세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향했다.
“다들 잘 잤어.”
“네.”
수첩을 보며 스케줄을 확인하던 윤 매니저는 수첩을 덮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지역 민방 행사니까, 카메라도 잡을 거야. 리허설도 하고 하려면 서둘러야 돼. 그리고 듣기로는 300석짜리 무대인데, 서서 보는 사람까지 합하면 아마 천 명은 훌쩍 넘을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공카(공개카페)에서도 행사 보러 오겠다는 팬들이 많은 것으로 확인됐으니까, 불미스러운 일 없도록 주의해야 돼. 알겠지?”
“네.”
“그리고 오늘 낮에 최고 온도가 38도라지만 우리 행사는 저녁에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하지만 거기 보러 오는 사람들은 더위에 지친 사람들도 많을 거라고. 그러니 너희들이 그 사람들의 더위를 확 날려버릴 정도로 시원한 무대 보여줘야 돼.”
“그럴게요.”
“그럼 나가자.”
그나마 오늘은 시간 여유가 있으니, 이렇게 집에서 짤막하게 브리핑 할 수 있었다. 브리핑을 듣고, 안 듣고는 차이가 크다. 어차피 데뷔 연차가 짧은 걸그룹이라 무대에서 부르는 노래는 정해져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무대를 똑같이 해선 안 된다. 하다못해 무대 위에서 짧은 인사말 멘트를 할 때도 각 무대마다 다르게 해야 한다. 멘트 하나가 ‘차이’를 만들고, 다른 가수와 ‘차별’이 된다.
“언니, 배 안 고파요?”
리더의 물음에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던 희숙이 룸미러를 보며 대답했다.
“샵에 가면 줄게.”
“그럼 김밥이에요?”
“그럼 김밥 말고 뭐 먹게?”
“오늘은 햄버거 안돼요?”
“이그, 그러니까 너희들이 맨날 욕먹지. 오늘 행사 있는 거 뻔히 아는 애가 아침부터 햄버거를 찾니?”
“반씩만 먹으면 되잖아요. 안 그래?”
리더의 물음에 다른 두 사람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오빠한테 물어봐.”
“우리가 부탁하면 혼나잖아요. 언니가 대신 말해 주면 안 돼요? 언니가 애들 햄버거 좀 먹이자고 하면, 팀장님도 화 많이 안 내실 거잖아요.”
“혼날 거 뻔히 아는 애가 그래? 그냥 참아. 내일은 스케줄 없으니까, 내일 먹으면 되겠네.”
그때 매니저가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갑자기 조용해진 차 안의 분위기를 감지한 매니저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야, 니들? 내 흉봤니?”
“아니요?”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래? 무슨 작당 모의한 사람처럼.”
“아니요, 그런 거 없었어요.”
“숙아, 얘들 왜 이래?”
“아침밥 때문에요.”
“언니!”
“왜? 뭐? 말해달라며?”
“뭔데 또?”
“햄버거가 먹고 싶다네요?”
“얘들은 무슨 햄버거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라도 있나, 왜 그래? 맛도 없고, 영양 부실한 패스트푸드 따위에 맛 들이면 니들 성공 못 해.”
“그건 너무 억지네요.”
“숙이 너도 편들지 말고.”
“네.”
“가자.”
희숙이 에어컨을 틀고 차를 출발시켰다. 큰 도로에 올라 달리고 있을 때, 매니저가 물었다.
“도경이는?”
“샵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거기로 바로 온다고?”
“그 근처에서 편집매장이 있는데, 거기서 액세서리 구해서 온다네요.”
고개를 끄덕인 매니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올 때, 햄버거 몇 개 사오라고 그래.”
“오예!”
뒷자리에서 함성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