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 그늘 아래(3)
-------------- 523/952 --------------
유 대표는 싱긋 웃으며 충고했다.
“애들만 문제가 아니라 자네도 조심해야 돼. 지난번 일, 자네도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하긴 힘들잖아?”
매니저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푹 숙였다.
“도연이 생각해서 나선 건 좋지만, 그래도 ‘적당히’ 선은 지켜야지. 알겠지?”
“네, 대표님.”
유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향했다.
“그 문제는 심 대표가 충분히 이야기 했을 테니 여기까지 하지. 아무튼, 주의하라고. 안팎으로 주의해야 할 때니까.”
“알겠습니다.”
어느새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워낙에 더웠던 한낮이라 해가 지고도 쉬이 더위가 가시진 않을 것 같다.
“아 참, 심 대표는? 오늘 나왔나?”
“지방 출장 가신 거로 아는데요.”
“아, 그런가?”
유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 대표가 주로 회사 외부의 확장에 주력한다면, 심태성 대표는 회사 내부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본래 캐스팅 쪽에 특출한 안목을 지녔던 심 대표는 일주일에 한 번은 직접 지방을 돌며 인재를 찾는 일을 했다.
“이제는 아랫사람들을 시켜도 될 텐데 말이야.”
“의욕이 넘치시는 분 아니십니까?”
“그래도 대표쯤 되면 묵직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유 대표의 말에 악의는 없었다. 비록 경력은 유 대표가 더 길긴 해도 두 사람은 젊은 시절부터 함께 일을 하면서 호흡을 맞춰온 사이였다. 공동 대표로 함께 있으면서도 각자의 영역을 확실히 구분하여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 동시에 회사를 견실하게 이끌어가는 중인데, 덕분에 만들어진 지 몇 년 되지 않은 이 회사가 ‘중형’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애들은 아직도 이야기 중인 건가?”
“그렇지 않아도 저녁 스케줄이 하나 있는데, ···제가 한 번 가보겠습니다.”
매니저는 얼른 일어나 목례를 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창밖으로 보며 생각에 잠긴 유 대표의 얼굴에 블라인드의 그늘이 겹쳐졌다.
매니저가 문에 노크를 하고 상담실에 들어갔을 때, 단유와 도연의 이야기도 거의 마무리가 되는 중이었다.
“방해했냐?”
“아뇨. 괜찮아요, 저희.”
‘저희’가 아니라 ‘너’가 괜찮아야 하는데. 매니저는 단유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래. 사실 저녁 스케줄 때문에 이제 슬슬 갈 채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됐어.”
“아뇨, 오히려 제가 더 도움됐어요.”
간간이 자신의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어서 단유도 썩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어쩌면 이런 시간이 단유에게도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조금 전에 알려준 거, 아직 자신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볼게.”
“한 번 해봤던 거니까, 잘 하실 거예요.”
“정말 고마워.”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을 데리고 매니저는 대표실로 이동했다. 유 대표가 웃으며 두 사람을 반겼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는 도연에게 간단한 안부를 물은 뒤,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듣던 대로 잘 생긴 친구네. 심 대표가 탐낼만하겠어.”
“감사합니다.”
“허허, 부정은 안 하는구먼.”
단유는 가타부타 말없이 서서 유 대표와의 짧은 인사가 끝나길 기다렸다.
“우리 도연이 때문에 먼 길 왔는데, 뭔가 맛있는 거라도 먹여서 보내야겠는데.”
“괜찮습니다.”
“작은 인연이라도 소중히 생각해주는 그 마음이 기특해서 그래.”
확실히 연륜이 있는 분의 이야기라 그런지, 워딩에 신경을 쓰는 모습이 단유에게 보였다. 굳이 ‘작은 인연’이란 표현을 쓰는 것도 혹시 모를 일을 미연에 방지코자 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갑작스럽게 잡힌 일정이니 더 오래 이야기하긴 어렵고,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그땐 제대로 대접하지.”
‘다음’이 있을까?
“그리고 도연인 스케줄 잘하고.”
“네.”
“리본 소녀가 너무 열심히 해줘서 내가 많이 고마워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저희가 더 고마워요.”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윤 팀장은 끝까지 수고해줘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렇게 짧은 대면을 마치고 나온 단유에게 매니저가 물었다.
“나가는 데까지 태워줄까?”
“아뇨, 괜찮아요. 여기서 지하철까지 별로 멀지도 않던걸요.”
“아, 그래? 오늘, 고마웠다.”
고맙다는 인사를 종일 받을 기세다.
“이만 가볼게요.”
“어, 그래.”
“누나도 수고하세요.”
“그래. 고마워. 아, 가끔 연락해도 되지?”
단유는 매니저를 쳐다보았다.
“매니저 오빠 핸드폰으로 연락할 거야.”
“아, 그럼 그럼. 우리가 아주 남도 아닌데, 두 사람 친하게 지내는 게 뭐 어때?”
매니저가 안심하고 대답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 단유는 도연과 있었던 대화를 떠올려보았다. 도연을 돕기 위해 왔었지만, 어쩐지 자신도 꽤나 후련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나, 수다쟁이였을까?’
피식, 짧은 코웃음으로 자신의 생각을 비웃은 단유는, 마침 생각난 김에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했다.
[가디스R, 출근길에 함박웃음]
[가디스R, ‘두근두근’으로 인기몰이 이어간다]
기사의 날짜는 거의 4월 중순에 몰려 있었다. 그 이후로는 특별한 기사 없이 포토 기사라는 이름으로 사진 몇 장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5월 말에 ‘활동 마무리’라는 짧은 기사로 끝이 났다. 차트도 찾아볼까 싶었지만 관뒀다. 순위가 좋다 한들, 축하한다고 문자를 보낼 수도 없고 날짜도 한참이 지났다. 만약 이번 활동의 성과가 좋지 않았다면 그건 그거대로 슬픈 일이다. 위로 해줄 수도 없고, 그저 단유 본인만 안타까울 뿐일 테니까.
‘잘하고 있겠죠?’
그냥 잘하고 있으리라고, 좌절하지 않고 계속 꿈을 향해 달리고 있을 거라고 믿는 게 편하다. 그리고 나윤은 충분히 이겨낼 사람이다. 그녀는, 적어도,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확고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니까.
****
중학교의 마지막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마지막이라지만, 앞으로 남은 방학들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의미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로는 특별한 기념일을 부여하고 그 날을 의미 있게 보내려 하는 연인들의 그것처럼, 단유의 친구들은 방학을 보다 알차게 보낼 방법을 궁리했다.
“국토 횡단?”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할지 안 할지도 모르고, 고등학교에 올라가도 그때는 공부를 해야 하니까, 지금처럼 시간 여유가 없을지도 모르잖아?”
지태는 마치 오랫동안 기획해왔던 것처럼 술술 계획을 꺼내놓았다.
“재밌겠다!”
명수가 손뼉을 치며 지태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긴 명수도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축구를 해야 하니까, 그렇게 되면 방학 때 친구들과 어울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닐 수도 있고.
“난 힘들 거 같은데.”
채윤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왜?”
“우리 엄마가 이번 방학부터 준비해야 한다면서 여름 기숙학원에 가기로 했거든.”
“언제부턴데?”
“다음 주 월요일부터 8월 15일까지.”
채윤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이틀, 오늘과 내일 뿐이다.
“와, 너무 심하다.”
“내 말이. 네가 와서 우리 엄마한테 말 좀 해줘라. 심하다고.”
“···뭐, 안 되면 채윤이 빼고 우리끼리 가지 뭐.”
“야!”
“명수야, 넌?”
“나야 좋지!”
“단유 넌?”
모두의 시선이, 심지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채윤도 단유의 대답이 궁금한 눈치를 보이며, 단유에게 쏠리니 여태 조용히 콜라를 마시던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글쎄, 뭐 상관은 없을 것 같긴 해.”
새로 맡은 번역 일이야 일정만 조금 조정하면 여유롭게 방학 끝나기 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여유롭게 학과 외 공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유혹도 있지만, 친구들과의 시간을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누구처럼, ‘친구’가 없어서 외롭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하기 싫었으니까.
“그런데 채윤이 빼고 우리끼리 가는 건 좀 그런데.”
채윤은 단유가 자신의 편을 들어줘서 고맙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너희 부모님은 네가 국토 횡단 같은 걸 한다고 하면 보내줄 거 같아?”
채윤이 자신감을 얻고 지태에게 되묻자, 지태는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마지막 방학’이니까 상관없지 않겠어? 게다가 친구들이랑 같이 가는 건데 문제 있겠어?”
“문제 많아 보이는데? 어느 부모님이 중학생들끼리 며칠이 걸릴지 모를 여행을 간다는 데 허락을 해 주겠어?”
“잘 설득하면 되지!”
“퍽이나.”
지태에게 면박을 준 채윤은 앞에 놓인 감자튀김 하나를 집어 먹으며 넌지시 말했다.
“그런데 정말 같은 고등학교에 못 갈 수도 있나?”
“못 가겠지. 명수는 축구 쪽으로 가야 하니까, 부평고등학교나 언남고등학교 같은 데로 가겠지.”
소위 축구 명문이라고 이름난 고등학교고, 이미 명수에게 스카웃 제안이 오기도 했다. 지태는 빨대를 물고, 까닥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단유는, 뭐 과학고나 그런데 갈 생각이지 않아?”
“나?”
“야, 솔직히 네가 일반 고등학교 가는 건 반칙이야. 양민학살이라고.”
공정한 경쟁 사회를 위해, 단유 넌 빠져, 라며 우스갯소리를 뱉던 지태는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제일 막막하다.”
채윤을 바라보며 꺼낸 이야기였기에 채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그래, 인마. 쟤들은 이미 미래가 탄탄하잖아? 명수는 축구 선수라는 목표가 있고, 이미 명문들이 기웃거릴 만큼 실력을 보였어. 단유는, 뭐 넘사벽이니까 패스. 그런데 우린 뭐냐. 이도 저도 아니고.”
지태의 말에 명수가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우리야? 난 괜찮아.”
채윤의 대꾸에 지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뭐가 괜찮은데?”
“성적도 그리 나쁘지 않고, 고등학교 가서도 이대로만 지내면 뭐 문제 있겠어? 그런 말 있잖아? 중간만 가면 된다고. 사실 나도 단유처럼 공부도 잘하고 전교 1등 하고 그러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그건 그냥 욕심인거고.”
“그럼 넌 뭘 하고 싶은데?”
“뭘 하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적당히 사는 거지.”
“야! 젊은 놈이 벌써 그렇게 생각하면 되냐?”
“지는 뭐 젊은 놈 아닌 것처럼 말한다? 그럼 넌 뭐가 되고 싶은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술을 꾹 다물고 콜라 빨대만 물고 있는 지태였다.
“난 나한테 재능이 없다는 걸 잘 알거든. 난 뭐든 어중간하잖아. 얼굴도 잘생기지 못했고, 공부도 썩 잘하는 편은 아니고. 지태, 너처럼 활달한 성격도 아니고, 명수처럼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노래나 미술 같은 예체능에도 재능이 없어. 이런 내가 어떻게 살겠어. 그냥 적당히 남들 하는 만큼만 하고 살려고 노력하는 것밖에 더 있겠어?”
시끌벅적한 패스트푸드점에 단유네 테이블만 조용해졌다. 채윤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감자튀김을 입에 넣으며 자신이 뱉은 말의 여운을 즐겼다.
“나도 똑같애.”
지태가 슬쩍 숟가락을 얹었다.
“똑같긴. 넌 그래도 집 잘 살잖아? 우리 집은 솔직히 그렇게 부자도 아니고, 물론 가난한 것도 아니지만, 그냥 그래.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어? 그냥 고등학교 가고, 운이 좋으면 좋은 대학도 갈 수도 있겠지만, 요즘 등록금 비싸다고 하는데 사립 대학교는 가기 힘들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서울 대학교를 들어갈 수 있을 리도 없고.”
“왜 못 한다고 단정해? 지금부터 뭐 빠지게 공부하면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우리 엄마도 너처럼 그렇게 생각하니까, 방학인데도 무슨 기숙학원엘 보낸다고 하시는 거지.”
지태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유는 앞에 앉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뭔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이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라곤 짐작도 못 했던 탓이었다. 생각 없이 노는 것만 좋아하는 친구들, 이라는 생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 정도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살짝 놀라기도 했다.
“그럼 국토 횡단은 포기하는 거?”
명수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