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 그늘 아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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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단유는 이제 겨우 중학교 3학년이다. 그런데 벌써 ‘교육’이라는 시스템에 대해 고민하고 비판한다. 도연은 어쩐지 자신의 고민이 하찮게 여겨졌다. 자신은 고작해야 무대에서 웃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할 뿐이지 않은가?
“어쩌면 나 되게 사소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던 걸까?”
“어떤 사람은 식사 메뉴를 고르는 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했어요. 어떤 사안이든, 중요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결국 자신일 거예요.”
그 말에 도연은 픽, 하고 코웃음소리를 냈다.
“그래도 뭐 먹을지 고르는 정도라면 너무 과장된 거 아니니?”
단유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사형수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먹을 음식을 고르는 일이 가벼운 건 아니죠.”
“아!”
도연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미안해.”
“저한테 사과하실 일은 아니에요.”
“아냐, 다 미안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한 것도 미안하고, ···사실 아무 상관도 없는 널 여기까지 오게 한 것도 미안해.”
잠시 숨을 고른 도연은, 더욱 처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해. 기대에 못 미치는 행동으로 실망하셨을 부모님한테도 미안하고, 회사에도, 멤버들에게도 미안해. 응원해주는 사람들에게도 미안하고.”
만약 콘서트나 행사장에서 이런 멘트를 하면 사람들은 겸양의 표현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도연은 진심으로 미안해했고,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단유는 그녀의 감정을 헤아리며 말했다.
“파스칼이라는 수학자는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표현했어요. 갈대는 힘이 없어서 쉽게 꺾이기도 하고 약한 바람에도 금방 드러눕는 연약한 식물이잖아요? 그처럼 인간은 연약하고 고민이 많다는 이야기래요. 하지만 인간은 ‘생각’을 하니까 생각을 하지 못하는 식물보다 위대하다는 뜻이기도 하죠. 누나의 고민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봐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반성하고 후회하고, 그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도 고칠 수 있을까?”
“고친다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인간은 기계가 아니잖아요?”
“그럼?”
“고장난 것도, 아픈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전.”
문득 단유는 지난 날의 자신을 떠올렸다. 한때는 본의 아니게 ‘마약’ 때문에 정신이 나간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때, 단유는 명수의 도움으로―물론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그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쩌면 도연도 그런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라 생각되었다. 비록, 그녀가 도움을 요청한 상대가 왜 자신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지금 누나는 시련을 겪는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 때문에 힘들고 괴로워하는 거라고. 하지만 절망과 시련을 극복한 인간이 강하다잖아요? 지금 이 순간을 견디고 이겨내면, 그러면 누난 더 강해져 있을 거라고 믿어요.”
단유의 따뜻한(?) 격려에도 도연은 가능할 것이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을 이겨낼 자신감도, 극복할 의지도 부족했다.
“만약에 말이야, 네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있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만약, 이란 단서를 달지 않아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많아요. 오히려 내 뜻대로,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를 고르는 게 더 쉬울걸요?”
“···그렇지.”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데뷔하자마자 1등을 하면서 승승장구하는 아이돌 그룹이라 해도, 아직 정산도 받지 않았고, 그래서 여전히 부모님의 용돈에 기대어 살아야 한다. 회사에서는 신인 그룹이라 더 조심해야 한다며 먹는 거, 입는 거 모두 통제하고 있다. 마음대로 밖을 돌아다닐 수도 없고, 돌아다닐 시간도 없다. 일거수 일투족이 통제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의지’라는 건, 생각보다 강해요.”
단유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도연을 응시했다.
“명확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그 이미지에 자신의 소망을 담아요. 그리고 강한 의지를 발현시켜요. 그 심상이 곧 자신이라고. 그러면 ‘마법처럼’ 심상은 현실이 될 거예요.”
방금전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얘기했던 사람이 돌연 다 할 수 있어요, 라고 자신 있게 말하니 도연은 웃음이 났다.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올까?
“전교 1등도 너의 강한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야?”
“왜 계속 전교 1등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전교 1등,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건 그저 사람들이 줄세우기를 해서 이름 붙인 결과에 지나지 않아요. 차트 1위한 곡이 차트 100위한 곡보다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잖아요? 차트에서 몇 등을 하든, 그 곡이 가치는 의미와 본질은 서로 다를 뿐이지, 우열을 나타내는 게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전교 1등이라는 타이틀은 저를 온전히 수식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라고 봐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결과라면 높이 평가해야 하는 거 아냐?”
“대중의 기호에 맞춘 결과겠죠. 다수의 선호가 그 본질의 우수성을 보증하진 않아요.”
“그렇게 말하니까, 무슨 철학자 같애.”
도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보풀같이 튀어나온 웃음이 슬쩍 나타났다 사라진다.
“잘 웃으시네요.”
“무대에서 웃질 못한다는 거지, 늘 웃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어.”
“무대와 이 자리의 차이는 뭔가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거 같네. 결국,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이야길 하려는 거겠지?”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 라는 장소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을 웃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하나씩 빼봐요. 그리고 다른 요소를 집어넣어서 무대를 상상해봐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가수는 아니니까, 정확히 설명이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해볼게요. 이를테면, 무대라는 장소는 지면보다 높게 만들어진 단이죠. 수많은 조명들이 위에서 비춰지고요. 때로는 뒤에 LED 전광판도 있겠죠? 앞에는 수많은 관객들이 앉아 있거나 혹은 서서 무대를 바라보고 있을 거예요. 어떤 이는 응원도구를 들고 있기도 할 테고, 어떤 이는 핸드폰으로 무대를 촬영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무대 위에서 가수는 마이크를 들고 있거나 혹은 그, 뭐죠? 볼에 붙이는 마이크? 뭐 그런 장치를 달고 있겠죠. 귀에는 모니터링 이어폰이 꽂혀 있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가끔은 밴드가 뒤에서 연주를 하기도 할 거고요. 또 무대 전면에는 스피커와 프롬프터가 있어요.”
“너 되게 자세히 안다?”
“아무튼요. 그런 무대를 상상해보세요. 혹시 제가 말한 것 말고 또 떠오르는 누나만의 무대 이미지가 있나요?”
도연은 잠시 생각해보다 대답했다.
“사람들의 눈빛. 조명이 비춰지지 않아도 어둠 속에서 나를 보는 눈빛들.”
“그리고요?”
“땀. 언제나 무대에 오르면 목을 타고 흘러내린 땀 때문에 답답해.”
“또 있나요?”
“함성 소리. 때로는 야유 같기도 하고. 모니터링 이어폰을 뚫고 들어오는 응원 소리도 있어. 가끔은 힘이 되지만 또 가끔은 질책 같기도 해. 왜 그렇게 노래를 못 부르냐, 왜 그렇게 춤을 흐느적 거리며 추냐, 그런 말들 같이.”
진짜 들은 목소리였는지, 아니면 어디선가 읽은 댓글의 내용인지는 구분되지 않았다. 흐린 감정이 배인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올 때마다 도연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이제 이런저런 것들을 하나씩 빼봐요.”
“어떻게?”
“우선 목소리부터 빼 보죠. 무대 위로 아무런 소리도 올라오지 않아요.”
“사람들이 있는데 목소리는 없어? 어쩐지 그게 더 섬뜩한데?”
“눈빛도 빼 보죠. 아예 보는 관객들이 없다고 생각해봐요.”
“그럼, 너무 쓸쓸할 거 같은데.”
빈 공연장에서 열창하는 가수에게 ‘가수’의 의미가 있을까?
“무대 위의 마이크도 치워볼까요? 전광판도 없애고, 조명도 없애요.”
그렇게 하나하나 없애니 남는 건, 말 그대로 ‘무대’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리고 동시에 도연은 단유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언젠가 한 번 겪었던 것임을 떠올렸다. 이전에 단유와 연기 연습을 할 때 선생님이 상황 연출을 하며 했었던 것이었다.
‘텅빈 연습실에서 어떤 특정한 장소를 상상하게 하고, 그 안에서 연기를 하도록 시켰었지.’
그때는 연기 선생님이 지시했던 것을, 지금은 단유가 하고 있었다.
“이제 무대 위에 누나가 원하는 것을 하나씩 채워봐요. 뭐가 필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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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매니지먼트에 비해 가수 매니지먼트라는 영역은 특히나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배우의 경우, 초기 투자비용도 가수에 비하면 적게 들어가고, 배우의 연기력에 있어서도 매니지먼트사가 관여할 부분이 적다. 반면 가수의 매니지먼트는 초기 투자비용도 그렇고, 작사, 작곡, 안무를 매니지먼트사가 모두 담당, 제작하여 가수에게 넘긴다. 게다가 앨범의 제작 역시 거액의 제작비가 들어가기에 가수를 매니지먼트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돌’은 ‘가수’와 또 다르다. 아이돌도 가수냐, 아니냐는 물음이 아니라, 산업적으로 ‘아이돌’의 육성, 관리는 다른 분야의 연예인과 차별되기 때문이다. 가장 큰 차이점은, 매니지먼트 그 자체다.
아이돌은 팀워크가 중요하다. 특히 한국의 아이돌은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성장하는’ 아이돌이 아니라 ‘완성된’ 아이돌이다. 때문에 ‘완벽’을 요구하는 팀워크를 위해 회사는 여타 직종에 비해 가장 적극적으로 아이돌을 ‘통제’한다. 때문에 숱하게 벌어지는 소속사와 연예인 간의 충돌도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비용과 시간, 그리고 리스크를 감당하고서라도 우후죽순으로 기획사들이 생겨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돈이 되니까.
1년에 세 작품 출연하기도 힘든 배우와 달리, 가수는 여러 행사 무대를 가질 수 있고, 그때마다 수입이 들어온다. 회사 입장에서는 자금 회전을 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더군다나 유명 가수가 되면, 몇 곡의 노래를 부르고도 수천만원을 챙길 수 있고, 당연히 기획사도 그 과실을 보상받는다.
“아이돌의 수명은 길지 않아. 한 아이돌을 출범시키고 그 아이돌의 흥망성쇠를 소속사가 같이해야 할 이유는 없지. 그러니 새 아이돌 그룹을 끊임없이 만들어야 하고.”
아파트를 하나 짓는데 엄청난 자본과 인력이 소요된다. 그 자본과 인력이 결집된 곳이 바로 건설회사다. 건설회사는 아파트 하나 짓고 사라지지 않는다. 아파트를 지어야 이윤이 생기고, 그 이윤으로 건설회사가 돌아간다. 그래서 좁은 땅덩어리에, 미분양 아파트 사태로 건설 위기를 부르짖어도, 건설회사는 끊임없이 아파트를 짓는다.
“어쩌면 악순환이 될 수도 있겠지. 팔리지 않는 상품은 창고에 쌓이지만 수익을 내기 위해 끊임없이 상품을 만들어야 하는 기업처럼. 그래서 확장이 필요한 거야.”
단일 사업에만 집중하는 건 외줄 타기다. 범위를 넓혀 안전성을 도모해야만 한다. 그것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방향.
“마침 투자도 받았으니, 이제 우리도 시장을 넓게 바라볼 때야.”
유 대표의 자신감은 끝없이 뻗어나가는 중이었다. 그 앞에서 매니저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동시에 기대했다. 회사의 발전과 성장이 자신과 무관한 일만은 아닐 테니까. 자신도 나름 이 회사의 성장에 큰 기여를 하지 않았던가.
“일단 회사를 더 키워야 돼.”
“어떤 생각이신지?”
유 대표는 들고 있던 서류를 슬쩍 흔들어 보였다. 자세한 내용은 보이지 않았지만, 앞장에 크게 적힌 문구는 매니저도 볼 수 있었다.
“M&A Project? 기업합병 말인가요?”
“일단 예비인수제안서를 만들어서 던진 상태야. 만약 일이 잘 돼서 회사가 커지면, 자네도 할 일이 많아질 거라고.”
매니저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끼다, 순간 유 대표의 시선을 느끼고 표정을 수습했다.
“윤 팀장한테 이런 이야기 하는 이유 알겠나? 지금이 중요해. 비록 투자를 결정받았지만, 모든 게 이제 시작인 단계야.”
매니저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문제 생기면 안 된다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슨 문제를 말하는지 몰라도 일단은 씩씩하게 대답하는 매니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