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 그늘 아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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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데스크에 앉아 일을 보던 여직원이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날이 덥네요.”
가벼운 인사말로 답례한 유한성 대표는 건물 안으로 들어오다 데스크 근처에서 어물쩍대다가 같이 인사를 올리는 매니저를 발견했다.
“윤 팀장?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아, 저기···지금 도연이가 저기 상담실에 와 있습니다.”
“도연이가? 아, 그럼 그 친구도 와 있는 건가?”
“네.”
유 대표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꼴이 마치 외동딸을 둔 아빠 같구만.”
“네?”
“딸이 남자친구랑 방에 들어가 있으니 안절부절 못 해하는 모양새 아닌가?”
“아, 네.”
매니저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거긴 그만 놔두고,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하지.”
“아, 저기 인사라도 받으셔야···.”
“됐어. 끝나고 잠깐 들리라고 말만 전해줘요.”
“네, 대표님.”
여직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대답했다. 살짝 미소를 지은 유 대표는 복도를 지나려다 반투명 유리로 가로막힌 상담실로 슬쩍 시선을 던졌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상상력을 자극하는 법이지.”
“네?”
그러나 유 대표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다시 앞서가는 대표 이사의 뒤를 매니저가 종종걸음으로 따라 갔다.
“확실히 이번 여름은 너무 더운 것 같아. 작년에도 이렇게 더웠나 싶다니까.”
대표이사실에 들어서자마자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거는 유 대표가 꺼낸 이야기에 매니저가 얼른 반응했다.
“예, 문자로도 계속 폭염 특보가 울리더라고요.”
“애들은 어때? 더운데 쓰러지거나 하면 큰일인데 말이야.”
“특별히 관리에 신경 쓰고 있습니다.”
“그래.”
책상 위에 놓인 결제 서류들을 대충 훑던 유 대표는, 여전히 문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매니저에게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 자신도 몇 가지 서류들을 챙겨든 뒤 소파 상석에 앉았다.
“요즘 애들 스케줄은 어때?”
“대학 행사도 이제 끝물이라 더 잡히는 건 없습니다만, 지방 행사나 한류 콘서트 이벤트 등 몇 개가 예정되어 있어서 8월 말까지는 계속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힘들어하진 않고?”
“4월에 컴백한 후 지금까지 쉴 틈이 없었으니, 솔직히 체력이 많이 딸리긴 하겠지만 아직까지는 기운이 넘칩니다.”
“이제 시작한 아이들이야. 너무 방전되지 않게 적당히 관리하라고.”
말로는 ‘적당히’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스케줄을 느슨하게 잡을 순 없었다. 아직 갈 길이 먼 신인 그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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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상담실 너머의 인기척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도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에는 무대에 오르는 게 설레기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냥 그래. 관성처럼. 차를 타고 행사장에 도착하면 차에서 내리고, 메이크업을 받고 옷을 갈아입고, 마이크를 채우고, 무대에 올라서 MR이 나오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노래가 끝나면 인사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와 차에 타고 다음 행사장으로 이동해. 그러다 하루가 끝나. 집에 돌아와 씻고 잠들었다가 눈을 뜨면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하고.”
손가락 끝에 시선을 둔 도연의 이야기는 나지막이 계속되었다.
“무대에 서면 생기가 넘쳐 흐르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난 내 속에 있는 무언가가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야. 이러다가 점점 쪼글쪼글 말라붙을 것만 같다는 생각도 들고.”
고개를 든 도연의 촉촉한 눈망울이 단유를 담았다.
“이런데도 사람들은, 팬들은 내가 무대 위에 오르면 환호해주고, 내 이름을 외쳐.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내 모습을 찍어서 핸드폰에 저장해주는데, 난 잘 모르겠어. 내가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지, 내가 그 사람들의 ‘아이돌’이 될 자질이 있는지.”
길게 숨을 토해내는 도연에게 단유는 위로 대신 자신의 이야기로 화답했다.
“저도 처음 학교에 갔을 때가 생각나요. 학교에서 교과서를 받아들고, 그 교과서로 공부를 할 때, 전 사실 굉장히 흥분했어요. 그 놀라운 지식과 정보들. 여태 몰랐던 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절 들뜨게 만들었죠. 한 글자 한 글자가 소중했고, 선생님의 가르침 한 마디도 놓칠 게 없었어요. 교과서에 나온 이야기와 지식들을 모두 배우면, 난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초등학교 때?”
“네.”
“초등학생이 그런 생각을 하다니···. 난 어렸을 때, 가수를 꿈꾸기 전의 난 그저 친구들과 노는 것만 생각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처음의 열정이 식는 걸 느꼈어요.”
학교 교육에 대한 회의감은 언제부터였을까?
“어느 날, 누군가 제게 물었어요. 넌 꿈이 뭐냐고.”
보육원 원장? 학교 선생님?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나왔던 봉사자? 독지가?
“전 대답할 수 없었어요. 전, 누나처럼 명확하게 그리던 미래가 없었거든요.”
“나도 그렇게 명확했던 건 아냐. 그냥 되고 싶다는 바람만 있었던 거지.”
“전 그런 바람도 없었어요. 그 당시의 전 그날 배운 지식을 머리에 담고, 내일 배울 지식을 기대하는 정도가 전부였거든요.”
도연은 단유의 이야기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꿈이 뭐냐는 질문을 받고서야 전 제 미래를 생각해보게 되었죠. 난 무엇이 되고 싶을까, 무엇을 하고 싶을까.”
어린 단유는 무엇이 되고 싶을까? 그러고 보니 지금 이야기를 나누는 단유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공부를 잘한다니까 으레 판검사나 변호사, 의사 같은 소위 ‘상위 직업’을 선택하지 않을까 생각할 따름이었다.
“누나는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도 공부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죠?”
갑작스럽게 들어온 질문에 도연이 언뜻 놀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으응. 공부···계속하기로 했거든.”
부모님과의 약속, 이란 말에 단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공부가 누나의 직업에 어떤 영향을 줄까요?”
“그, 글쎄?”
다음에 나온 시를 읽고 시적 화자가 말하고 싶은 바를 찾으시오, 라는 질문과 리미트 함수의 해를 구하는 요령이 가수가 되는데 필요하지는 않다.
“이 사회는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을 ‘상식’ 정도로 치부해요. 그 정도는 당연히 알아야 한다, 고요. 하지만 과연 그 상식이 정말 ‘상식’일까요?”
언뜻 생각나는 건, 그래도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같은 사칙연산은 상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것도 못하면 은행에서 일을 보지도 못할 것이고 쇼핑도 제대로 못 할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들은, 과연 우리가 긴 시간에 걸쳐 배워야만 하는 내용일까요? 그 내용들을 배우지 않으면, 우리의 삶에, 우리의 미래에 커다란 지장이 생길까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솔직히 쓸모없다고 여기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거는 알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들을 모아놓은 게 아닐까? 예를 들면, 한국사 같은 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거잖아.”
한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어떤 연예인이 방송에 나와 문제를 일으켰던 사례를 떠올린 도연이었다.
“저도 그 점에서는 동의해요. 하지만 절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건, 그게 내 미래, 내 꿈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점이에요. 단적으로 말해서 학교에서 배우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정도 지식을 얼마든지 배울 수 있어요.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요. 학교 밖에서 더 많은 지식과 상식을 배울 기회가 널린 세상이잖아요? 굳이 학교라는 시스템에서 긴 시간에 걸쳐 배워야 할 내용일까 하는 점이었어요.”
학원, 인터넷 강의, 학습지, 그 외 존재하는 여러 교양 강의와 서적들. 단유는 더 많은 책을 읽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 이상의 것들을 찾아 공부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들,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도덕, 체육···세분된 지식의 홍수 속에서 전 오히려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였어요. 이 많은 것들을 배운 뒤에 선택해야 할 꿈이 무엇일까. 이것들을 필수적으로 익혀야만 할 직업이란 무엇일까.”
결국, 단유는 어느 순간, 학교 공부에 흥미를 잃었고 대신 자신이 관심을 가진 것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단유는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를 찾았고, 자신의 미래를 흐릿하게나마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저도 꽤 방황을 했었더랬죠. 지금도 그 방황이 끝난 건 아니지만요.”
갑자기, 단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닌데, 저도 모르게 말이 길어졌네요.”
단유는 도연에게 사과를 했다.
“아냐, 괜찮아. 들으니까 나도 조금 생각을 하게 되네.”
“아까 이야기로 돌아가서, ‘관성’이라고 하셨죠? 관성적으로 생활하는 루틴에 빠져서 매너리즘을 느낀다고.”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 도연을 보며 단유는 말을 이었다.
“저 같은 경우는 현재의 관성적인 교육 시스템에서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말을 하려 했던 거였어요. 뭔가를 새로 배우고 알아간다는 희열은 사라지고, 정답 맞추기와 성적순으로 줄 세우기에만 몰두하는 교육에 회의를 느낀다고요.”
알 듯 말 듯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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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라는 양반이 그러더라고. 기업은 오로지 두 가지 기능, 마케팅과 혁신만 있으면 된다고. 그런데 지금 이 회사는 그 두 가지 모두가 부족해.”
다리를 꼬고 앉은 유 대표의 말에 매니저는 경청하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쳤다.
“그 때문에 대표님께서 저희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고 계신 거 아니십니까?”
적당한 아부는 회사 생활을 기름지게 만든다.
“엔터 산업이란 게 완전히 외줄 타기야. 발 한 번 삐끗하면 외줄 아래로 떨어져서 올라오기가 힘들지. 힘내서 올라오려 해도 외줄에 올라탄 이들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그 사이를 뚫고 올라오기가 어디 쉬운가.”
대한민국의 엔터 산업은 레드 오션이다. 아니, 대한민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엔터 산업이 레드 오션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 시점에서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가장 폭발력이 강한 산업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은 미국이다. 그리고 그 미국에서도 항공우주 산업을 제치고 최대 수출산업으로 부상한 산업이 엔터 산업이다. 그토록 강력한 산업 성장력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니, 비록 다른 큰 나라에 비할 바는 못되더라도 한국 내에서의 산업 비중도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동시에 해외 진출이라는 부문에서 경쟁력을 가진 산업으로 손꼽힌다.
레드오션이라 리스크는 크지만, 그만큼 과실은 달콤하다.
“그런데 마케팅과 기획력이 떨어지는 회사들이 어디 성공할 수 있을까? 눈이 시뻘개지도록 돌아다니며 재능이 넘치는 상품을 찾아서 데뷔를 시킨들,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길바닥에 깔리는 3류 찌라시만도 못한 신세가 되고 마는걸.”
“그렇죠. 대중의 관심과 호응을 얻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결국 이 바닥도 반쯤은 도박판이란 말이야.”
성공과 실패는 도박 패에 달렸다. 한 끗 차이로 모든 것을 얻거나, 혹은 손모가지 잘리고 병신처럼 뒤로 끌려가거나.
“하지만 사업은 도박이 아니지.”
운이 좋은 도박꾼은, 한 번은 판을 쓸어담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도박꾼의 말로는 늘 정해져 있다.
“우리는 사업을 해야 돼.”
매니저는 유 대표의 이야기가 뜻하는 바를 읽어냈다.
“그럼 혹시···?”
유 대표는 입꼬리를 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드립니다!”
엔터 산업도 산업이다. 경제학의 논리를 따른다. 규모의 경제학은 엔터 산업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 작은 과도를 든 회사는 큰 자본의 칼을 휘두르는 회사를 이기지 못한다.
해외 증권사인 크레디요네증권(CLSA)에서 투자적격을 내며 주목한 홍콩의 게임업체가 있다. 게임과 미디어 기업을 적극적으로 인수하며 콘텐츠 기업으로 발돋움한 유명 게임 업체에 유 대표가 찾아간 것은 무려 5달 전, 리본 소녀가 데뷔와 동시에 1위를 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그 타이밍에 홍콩으로 출장 간 유 대표를 보며 관련업계 사람들은 설레발을 치는 것이라 흉을 봤지만, 결국 유 대표는 그 업체에게서 거액의 투자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건 거침없이 나가는 길 뿐이야.”
유 대표는 진한 미소를 그리며 손에 든 서류를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