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20화 (520/956)

나무치(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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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보니 넌 도연이가 완벽주의자는 아닌 것 같다고 얘기했었다며?”

스타일리스트 도경에게만 했던 이야기였다.

“네.”

“혹시, 그때 뭐 이상한 점을 느꼈던 거야?”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말 그대로였어요. ‘완벽주의자’라면 애초에 자신감 떨어진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 거란 이야기였으니까요.”

매니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도리어 전 그게 더 궁금하네요. 왜 다들 도연 누나를 ‘완벽주의자’라고 생각했었는지 말이에요.”

“그건, 네가 평소의 도연이를 많이 못 봐서 그래. 도연이가 얼마나 악바리처럼···.”

매니저는 평소의 도연이 얼마나 열심히 생활하는지를 설명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면, 그녀의 노력이 실은 인정받기 위한 발버둥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열심히 했었어. 노래든, 공부든.”

말을 줄이며 단유를 바라보니, 그 침착한 모습이 너무 낯설게 보였다. 예전에도 그랬다. 대표와 함께 만났던 자리에서나, 촬영장 대기실에서나 단유는 저런 모습이었다. 어른스럽기도 하고, 듬직하다고 여길 만도 했던 그런 모습 때문에 매니저는 종종 단유의 나이를 잊곤 했었다. 그래서 도연과의 관계에 대해 부탁을 하기도 했었고.

“아, 그리고 늦었지만 고마웠어.”

“뭐가요?”

“그, 내가 부탁했던 거 있잖아. 도연이랑···.”

“아···! 네.”

단유는 매니저의 감사 인사가 그냥 지난날 있었던 일에 대한 감사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아마 이번에도 ‘부디’ 도연이와 불필요한 연애 감정은 갖지 말아 달라는 부탁일 테다.

“걱정 마세요. 전혀, 그런 생각은 없으니까요.”

단유의 단호한 대답에 매니저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진짜, 호기심 때문이고 다른 생각 전혀 없는데, 도연이가 정말 여자로서 매력이 없니? 그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할 만큼?”

“매니저님은 도연 누나를 보면 연애 감정을 느껴요?”

단유의 되물음에 매니저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나랑 비교하면 안 되지.”

“왜요?”

“나는 나이 차도 있고···.”

“나이 차이가 없으면 연애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인가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일 적인 관계로 있으니까, 나 참, 이런 말 하려는 게 아닌데, 아무튼 나한테 도연이는 딸과 같은 거야.”

“매니저님의 말대로면, 모든 남자가 도연 누나한테 연애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죠? 다수의 사람들이 좋아할 순 있어도 소수의 사람들은 어떤 사정으로든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죠. 매니저님이 그렇듯, 저도 그런 소수의 부류, 라고 생각해 두세요.”

뭔가 말로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느끼면서, 동시에 도연이는 이런 아이와 도대체 어떤 대화를 나누고 싶어했던 것인지 궁금했다.

“이제 제가 여쭤볼게요.”

“응?”

“제가 도연 누나를 만나는 것을 왜 허락하신 거죠?”

단유는 도연과의 통화에서 만나자는 도연의 요청에 즉답을 피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이야기한 후, 통화를 마친 단유는 도연의 매니저에게 전화를 했다. 도연의 일은 그쪽 회사 사람들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뜻이었다. 모든 걸 자신이 맡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뜻밖에 매니저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도연의 요청을 들어주라는 부탁을 다시 해왔다. 단유는 조금 당황했었고, 매니저는 사정이 있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그리고 오늘, 도연과의 약속보다 일찍 회사로 나와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자는 약속을 한 것이었다.

“두 가지 관점에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데, 한 가지는 도연이 계속 연예계 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치료가 필요하고, 그런 목적에서 너의 개입이 도움된다면 허락할 만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어. 다른 ‘남자아이’였다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넌, 믿을 수 있다는 개인적 판단도 있었고.”

‘믿는다’는 말로 포장을 했지만, 사실 단유 정도라면 매니저나 회사에서 통제할 수도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예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회사 연습실에는 단유 나이대의 아이들이 회사에 소속되어 연습을 하고 있다. 그 나이대 아이들을 다루는 노하우는 다년간에 걸쳐 축적된 마당이다. 비록 소속된 아이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통제 가능하다고 여겼다.

“또 한 가지는 설령 도연이가 연예 활동을 더 이상 하기 힘든 상황에 놓이더라도, 지금까지 그녀가 우리 회사를 위해 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회사도 도연이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도움에는 한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 대표님의 의견이었어.”

앞서의 이야기와 비슷한데, 다르다. 데뷔한 ‘아이돌’로서, 즉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단유’를 이용해 보자는 의견이 첫 번째. ‘도연’이라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 ‘어떤 수단’이라도 허락하자는 도의적인 차원에서의 결정이 두 번째였다.

두 번째 의견은 도연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그만큼 도연의 현 상태가 ‘상품’으로서 문제가 있다고 회사가 판단한다는 방증이었다.

웃지 않는 아이돌은 ‘상품적 가치’가 제로라는 뜻.

도연이 상담실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매니저가 나가고 단유 혼자 있을 때였다.

“일찍 왔네.”

“네.”

“미안해, 이런 부탁 해서.”

“네.”

‘괜찮아요’같은 겸양의 표현은 없었다. 살짝 머쓱해하는 도연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여기는 처음이지?”

“아니요, 지난 번에 한 번 왔었어요.”

“진짜? 언제?”

“누나랑 촬영하던 기간에 한 번 초대받아서 온 적이 있어요.”

“아, 그래?”

첫 인사로 가볍게 말을 건넸지만, 그 이후에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도연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니, 확실히 예전의 도연과 조금 달라졌다는 느낌도 들긴 했다.

“생각해보니까 어제는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한 게 아닌가 싶어. 사실 우리, 아무런 관계도 아닌데 말이야.”

어제 밤 통화를 마친 후, 나름 생각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조금 후회도 되고.”

단유는 대답 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기, 그러니까 뭐 물어볼 말은 없어?”

말없이 바라만 보는 단유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웠던 모양인지 얼굴이 살짝 상기되는 도연이었다. 이대로 두면 더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할까 봐 적당히 받아주었다.

“사실 전 그런 경우가 없었지만, 길을 가다가 갑자기 누가 붙들고 ‘도를 아십니까’ 라고 물으면 이런 느낌일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도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면박을 주려는 건 아니에요. 100% 이해는 못 해도 어느 정도는 느껴요. 누나도 나름 절실하니까 저에게까지 전화를 한 거라고···. 다만 제가 누나한테 어떤 존재였기에 그런 부탁을 할 정도였을까 되짚어봐도, 잘 모르겠네요. 그래서 지금 이 자리가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솔직하네.”

“지금 이 자리가 소개팅 자리는 아니잖아요?”

굳이 말을 가리면서 좋은 모습만 보이려 노력할 필요가 있냐는 단유 식의 비유였지만, 도연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해봤어? 소개팅?”

“아니요.”

어색한 침묵이 다시 찾아왔다. 도연은 뭐라도 말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아무 말이나 시작했다.

“오전에 병원엘 다녀왔어.”

“네.”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면 남들이 날 미쳤다고 생각할까봐 조금 겁이 나기도 하는데, 너한테는 해도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넌 나 이상하게 보지 않을 거 같거든.”

“요즘 정신과 치료 받는 연예인들이 많다잖아요? 공황장애 뭐 그런거로.”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한다는 건 어려워. 특히 난 여자잖아.”

“여자, 라는 건 별로 논리적인 근거가 되지 못하는데요.”

뻘쭘해진 도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지금도 나한테 어떤 문제가 있는 건지 자각하지 못해.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대에 서면 전혀 웃질 않아. 웃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데도 되질 않고.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심리적인 문제래.”

“그렇군요.”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내가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고. 그게 내가 자신감이 부족해서래. 난 내가 자신감이 그렇게 부족하다는 생각은 많이 해보질 않았거든. 사실 자신감이 늘 넘치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야. ···아무리 연습을 많이 해도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

“그렇죠.”

단유가 몇 마디 덧붙였다.

“시험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시험 성적이 잘 나올지 자신할 수 없는, 뭐 그런 거겠죠.”

“맞아. 그런 거. 너도 그런 경험 있지?”

맞장구쳐준 단유의 대답에 손뼉을 마주치며 되물었다.

“아뇨.”

“응?”

“전 별로 그런 경험이 없고요, 대신 그런 불안을 느끼는 친구들을 많이 봤었죠.”

“넌 불안한 적이 없어?’

“네.”

“···아, 넌 전교 1등이라고 했지.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머리가 좋으면, 그런 경험이 없구나.”

“아뇨, 그런 의미는 아니고요. 별로 시험 성적에 연연하지 않아서 그래요.”

“왜?”

“뭐가요?”

“아니, 시험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게 이해가 안 돼서. 너 전교 1등 하는 건 맞아?”

“물론 성적은 그렇게 나오긴 하지만, 반드시 시험을 잘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공부하는 건 아니란 뜻이에요.”

“그럼 어떤 생각으로 공부하는데?”

“전, 그냥 책을 보고 공부를 하는 게 재밌을 뿐이에요. 누나는 가수가 꿈이었다고 했었죠? 그럼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 거예요. 그냥 책 읽고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게 재미있었던 거예요. 시험 성적은 덤 같은 거죠.”

“와, 너 같은 애가 진짜 있구나. 말하자면 공부가 천성이라는 거네?”

“글쎄요. 그런데 어딜 가나 자신이 좋아하는 거에 몰두하면 다 그렇지 않나요?”

성공한 사람들은 다 그렇다더라, 하는 이야기로 들렸다. 도연은 단유의 이야기를 곱씹다 씁쓸한 어조로 대답했다.

“어쩐지 내가 초심을 잃었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네.”

“초심이 뭐였는데요?”

단유의 물음에 도연은 시선을 들어 허공의 어느 즈음을 응시하며 읊조리듯 말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나.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본 TV 화면에서 클로즈업 된 가수의 당당한 표정이 나를 붙잡았어. 무대 위에서 빛나던 그 모습이 되게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는데,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던 것 같아.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흔해 빠진 이야기. 하지만 도연에게는 특별한 기억이었다. 그녀의 미래를 결정할 만큼 특별했던 기억이지만, 입 밖으로 나온 이야기는 그저 그런 정도의 추억.

“그때부터 가요프로도 계속 찾아보고, 노래도 자주 찾아 듣게 되면서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던 거 같아. 내 노래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겠다, 는 거창한 생각은 하지 못했어.”

갑자기 도연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말하고 보니까 나, 되게 이기적인 인간이었네. 내 욕심만 밝히는 사람 같아. 아! 그러고 보니 지금도 달라진 건 없구나. 너한테 전화를 걸어서 부탁한 것도 결국 내 생각만 한 거니까. 난, 결국 그 정도의 인간이었던 거네.”

자조적인 미소가 도연의 입에 걸렸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에요.”

“넌 아니잖아? 고작 몇 번 만난 것밖에 없는 나 때문에 여기까지 와줬잖아?”

“아니요. 저도 다르진 않아요.”

한숨을 고른 단유.

“초심 이야기가 나오니까 생각이 나는데, 저도 그래요. 처음의 제가 가졌던 생각과 지금은 많이 달라졌거든요.”

과거의 기억들이 조용한 상담실을 부유하며 맴돌다 흩어졌다.

“초심이란 거, 그런 거 같아요. 늘 같을 수는 없죠. 상황이 변하니까요. 제가 지키고 싶다고 지킬 수 있는 게 아니죠. 사람이란 계속 변하는 거잖아요? 처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니까요.”

그간 겪었던 수많은 일들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단유의 생각과 태도도 많이 바뀌었다.

“한때는, 가족을 위해서였고, 또 한때는 친구를 위해서였죠.”

마법으로 잃어버린 가족을 찾으려 했다. 마법으로 친구를 돕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자기만족이에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살인도 불사한 단유. 어떤 변명으로도, 어떤 논리적 정당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 후회와 다른 감정,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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