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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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대충 알겠습니다. 그래서, 고칠 수 있는 건가요?”
사실 이유야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상황이 나아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 순간에도 매니저의 머릿속에는 여러 상황에 맞춘 보도자료 머리말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의사는 책상 위에 펜머리를 콕, 찍으며 말을 이었다.
“도연씨에게 지금 필요한 건, 적응입니다.”
“네?”
무슨 약이라든가, 아니면 심리 상담이라든가 그런 게 필요한 건 아니고 그냥 적응? 매니저의 머릿속에 ‘시간이 약이다’라는 문구가 고속도로 표지판처럼 홱 스치고 지나갔다.
“쉽게 이야기를 드리자면, 대인 의존증은 결국 적응의 문제입니다. 도연씨는 이제 겨우 17살이에요. 데뷔했을 때는 16살. 데뷔 당시에는 부모님의 반대도 심했다지요? 이런 상황에서 가치관이 채 정립되지 않은, 말 그대로 ‘미성숙’한 자아를 가진 도연 씨는 정체성의 성장에 방해를 받았을 거라고 봐요.”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한 사람의 정체성은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성장을 합니다. 다양한 갈등 상황을 겪고, 거기에서 자신만의 가치관을 정립해 나가며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거죠. 때로는 사랑하고, 때로는 다투고, 뭐 그런 감정과 경험들이 인간의 정체성에 영향을 준다는 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그런데 그런 관계 맺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어떻게 될까요?”
의사는 쓰고 있던 종이를 뒤집어 하얀 여백에 그림을 그렸다.
“자라면서 맺는 가장 최초의 인간관계는 바로 가족이에요. 이 가족이란 연결고리는 사실 거의 인생의 끝까지 이어지죠. 그런데 이 가족 안에서만 사람이 살 수 있나요? 언젠가는 이렇게 고리 밖으로 나가야 하죠. 그리고 이 고리 밖의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겪으면서 사람은 비로소 ‘사회성’이라는 것을 가지게 됩니다. ‘사회성’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요소지요.”
종이 위에 동그라미를 여러 번 겹쳐 그리며 ‘아시죠?’ 라고 묻는 여의사의 말에 매니저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람이 다 그렇듯이, 때가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새로운 인간 관계를 형성하고, 새로운 가족을 만든다. 산속에 움막 짓고 평생을 살지 않는 한, 사람은 끊임없이 관계 맺기를 해야 하고 거기에 ‘적응’을 해야 한다.
“한 사람에게, 혹은 특정인에게 의존하는 형태는 미숙한 자아의 문제라는 거죠. 자아정체성은 청소년기 동안에 획득해야 하는 일종의 포괄적인 성취로, 성인기가 되기 전의 경험으로부터 유래하며 성인기의 과제를 해낼 수 있다, 고 <에릭슨>이라는 심리학자가 말한 것처럼, 보통 이런 정체성은 사춘기 시절에 정립되기 마련이거든요.”
“잠시만요, 갑자기 무슨 심리학 강의를 듣는 기분이라 좀 그렇네요. 그래서 말씀하시는 건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이건가요? 어떤 조치도 무소용이라는 건가요?”
여의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 제일 좋은 방법은 적당한 휴식을 두고 주변의 스트레스로부터 떨어지는 일이죠. 그리고 그동안 편안한 상태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과 상황에 적응을 하는 거죠. 혼자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상황에 말이죠.”
“제일 좋은 방법, 이라는 말은 다른 방법도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여의사는 또 한 번 펜머리로 책상을 콕, 하고 찍었다.
****
단유는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틈에 거실에서 명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른쪽, 옥상에 한 명, 아니 두 명!”
그리고 잠시 후,
“담벼락으로 돌아간다, 체크!”
거실로 나가보니, 명수가 컴퓨터 앞에 앉아 헤드셋을 끼고 열심히 마우스와 키보드를 조종해서 캐릭터를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 전부터 상미와 함께 하던 그 게임이었다.
“안 자?”
하지만 명수는 단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계속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일 방학을 하고 나면 매일 저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뒤에서 쳐다보니, 명수가 조종하는 캐릭터가 허리를 숙이고 달려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곧 자리를 잡더니 수류탄을 꺼내 들었다. 수류탄의 지연시간을 기다려 쥐고 있다가 목표로 한 곳을 향해 ‘힘껏’ 던졌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 중앙에 메시지가 뜬다.
“잡았어!”
명수가 신이 난 듯 격앙된 목소리로 리포팅을 하고 다시 돌격한다. 손가락의 경쾌한 움직임에 캐릭터가 전장을 활보하고, 거침없이 총을 쏘고, 적들이 바닥에 드러눕는다. 경쾌하고, 가볍고, 쾌활하다.
‘게임이니까.’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게임에 몰입한 아이들을 보며 혀를 찰 것이다. 시간 낭비라고, 학생이 공부는 하지 않고 놀기만 한다고 비난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명수는 건강하다. 건강한 모습과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건전하게 ‘게임’을 즐기는 것이지,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사실 단유처럼 살아가는 것, 겉보기엔 모범생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좋을지 몰라도, 단유가 겪었던 일들을 겪는다면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진 못할 것이다.
단유는, 차라리 보통의 아이들처럼 사는 모습이 부러웠다. 부모가 있고, 부모가 잔소리하고, 그 잔소리에 짜증도 내면서 사소한 갈등에 혼자 고민하고 고뇌하고 그러면서 성장하는 삶이 건강한 삶, 바른 삶인 것만 같았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단유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내일 만나죠.]
문자를 전송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뒤, 단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만약 자신의 비밀과 자신의 경험을 모두 본 이들이라면,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
****
방학식은 별다른(?) 일 없이, 무난하게 끝이 났다. 비록 반 아이들 중 다수는 방학 중에도 학교에 나와서 봉사활동을 해야 하는 과제가 남았지만, 일단은 방학이니까, 그래서 아이들의 얼굴은 밝았다.
“방학 때는 제발 사고 좀 치지 마라. 알겠니?”
“네!”
선생님의 당부는 도서 머리말에 적힌 작가의 감사 인사 같았다. 선생님의 진심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귀에는 소귀에 경 읽기나 마찬가지였다.
“명수야, 오늘 같이 한 판 할래?”
반 아이들 중 몇몇이 몰려와 명수에게 말했다.
“콜!”
명수는 단유에게도 물었다.
“너는?”
“나는 약속 있어.”
“약속?”
명수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 단유를 흘겨보았다.
“이것 봐, 이거. 나 몰래 또 여자 만나는 거지?”
“여자? 반장 여자 있어?”
“얘, 아주 카사노바라니까?”
“진짜? 와, 반장 능력 좋네?”
“누군데? 어디 학굔데?”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가방을 둘러맸다.
“그런 거 아니야.”
“진짜 미스테리야. 어제도 계속 집에만 있었잖아? 나 몰래 밤에 나가서 누구 만나고 다니는 거 아냐?”
“밤에?”
“밤일이야?”
“좋겠다, 반장!”
키득거리는 아이들의 눈에 장난기가 서려 있다. 적당히 어울려줄까, 생각하다 관뒀다.
“됐어. 나 먼저 간다.”
명수도 장난기를 거두고 물었다.
“몇 시에 올 건데? 저녁은?”
“모르겠어. 그런데 저녁 먹기 전에 들어올 거야.”
“아, 그래? 난 저녁 먹고 올지도 몰라.”
당연히 그러겠지. 단유는 피식, 손을 저으며 먼저 교실을 빠져나갔다.
****
“그런데 중요한 게 한 가지 있어요.”
“뭡니까?”
“매니저님을 비롯해서 도연 씨의 주변 사람들이 뭘 해주려고 나서지 않아야 돼요.”
그 부분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요?”
“도연이가 스스로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찾게끔 질문을 던져줘야죠.”
“질문이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게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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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가 미리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도연 대신 다른 사람이 나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야.”
매니저는 단유의 인사를 가볍게 받아주었다.
“전화, 미리 줘서 고맙다.”
“뒤탈이 없으려면 그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뜻밖이네요.”
생각이 깊은 아이, 라는 생각을 하며 되물었다.
“뭐가?”
“만나지 말라고 할 줄 알았거든요.”
“뭐,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렇게 했겠지. 그런데 지금은 조금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연이한테 어디까지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도연이한테 조금 문제가 있어.”
“듣기로는 심리 치료를 받고 있다던데요?”
“그것도 이야기를 한 거야? ···뭐, 다행히 지금 공식 활동도 끝났고, 컴백도 아직 정해지지 않은 시간이라 여유가 있으니까.”
그즈음에 두 사람이 있던 상담실의 문이 열리며, 여직원 한 명이 들어왔다.
“커피, 드릴까요?”
“뭐 마실래?”
“아니요.”
“저도 됐어요.”
“네.”
“아, 그리고 도연이 오면 여기로 안내해 주실래요?”
“그럴게요.”
여직원이 나간 후, 매니저가 다시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회사에 온 손님인데, 회사 구경도 못 시켜 줬네.”
“괜찮아요.”
“그래, 뭐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하고.”
매니저는 허벅지를 손으로 쓸며 잠시 말을 골랐다.
“날이 좀 덥지?”
단유는 매니저가 쉽게 말을 떼지 못하는 심정을 헤아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담당하는 연예인의 치부를 타인에게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을 테다.
“그, 음, 저기 도연이는 뭐라고 이야기했어?”
단유는 어젯밤의 통화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요. 그냥 통화로는 이야기하기 어렵다고만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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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요?”
-응.
부탁이란 게 고작 대화라니. 그런데 막상 ‘대화’를 부탁하니, 뭔가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밤 11시에 공중전화로―물론 핸드폰이 없어서 그럴 테지만―대화를 요청하는 또래 여자아이의 마음이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밖에 오래 있을 수 없어서 그런데,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지금 만나자는 이야기는 아니죠?”
-아니, 아니. 지금 말고, 그러니까···약속을 정해서 만나서 이야기를 했으면 해서.
“어떤 대화를 원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러니까, 그냥 잡담이나 하자고 말하는 건 아닐 거잖아요? 혹시 말동무가 필요한 거라면, 저 아니더라도 많잖아요.”
-없어.
“뭐가요?”
-친구.
그 순간, 단유는 거실에 있는 명수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멤버들, 있잖아요.”
-사실은 말이야.
도연은 어렵게 자신이 심리 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심리 치료 과정에서 자신이 필요한 게 감정을 공유할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친구란 게, 그런 거래. 서로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고.
친구, 교우 관계는 인간의 성장에 있어 꼭 필요한 과정 중 하나였다. 교우 관계를 통해 가족의 결속에서 벗어나 관계를 확장하고 사회성을 발달시키고, 자아를 성장시킨다.
“그런데 왜 저예요?”
-그게, 나도 모르게, 그냥 네 생각이 나서.
언뜻 들으면 마치 사랑 고백을 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도연이 단유를 떠올린 것은 ‘연기 연습’ 과정에서 겪은 교감의 영향 때문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받아주고, 거기에 맞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보여주던 단유에게 정서적인 면에서 영향을 깊이 받은 까닭이었다.
-너랑 연기 연습을 하면서 마음이 즐거웠던 기억이 있어. 그런데 이후에는 그런 기분을 느끼지 못하니까, 그래서 조금 기분이 뭐랄까, 우울한 것 까지는 아닌데, 나도 모르는 뭔가가 있나 봐.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냥 그런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라고 토로했다.
-의사 선생님이 그랬어. 이 문제는 나 혼자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뭐든지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해보라고. 그래서 전화를 했어, 너한테. 어쩐지 너랑 이야기를 하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만약 단유가 누군가에게 ‘너 혼자 해봐’라고 말을 듣는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는 하지 않을 거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 속에 담긴 어떤 절실함이 단유가 쉽게 통화를 끊지 못하게 막았다.
매니저는 단유의 이야기를 들으며 살짝 걱정도 들었다. 철저히 자신의 기준에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어쩐지 도연은 친구와 연인의 중간 쯤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친구로서, 도연이 단유와 만나 그녀의 의존증이 나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과겠지만,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서 단유에게 의존하게 된다면 더 문제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