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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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이 단유에게 전활 하겠다고 마음을 먹기까지 꽤 오랜 시간 동안 고민을 해야 했다.
지난 교육부 홍보 영상 이후, 도연은 다시 본업인 아이돌 ‘리본 소녀’로 돌아갔다. 학교의 중간고사도 끝났으니 다시 기말 고사가 있기까지는 시간의 여유가 있었고, 5월과 6월은 대학교 행사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어, 리본 소녀의 스케줄은 바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도연도 한동안 연기 때문에 힘들어했었던 기억도 잊고 열심히 무대 활동을 이어나가야 했다.
그런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공중파 방송의 야외 공연 프로그램 때문에 지방에 온 리본소녀가 방송 전 카메라 리허설을 마친 후였다.
“도연아, 너 요즘 무슨 문제 있니?”
모니터링을 하던 리본 소녀의 리더가 도연에게 물었다. 대기실 소파에 반쯤 엎드린 채로 쉬고 있던 도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요? 아무 문제 없어요.”
“그런데 너 표정이 너무 굳었어. 아픈 사람처럼.”
리더가 보고 있던 핸드폰을 도연에게 넘기며 말했다. 영상을 다시 재생시키며 자신들의 리허설 장면을 함께 보다가 도연의 얼굴이 나오는 장면에서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이것 봐. 너 전혀 웃지를 않잖아.”
말 그대로 웃지 않는 도연이었다.
“혹시 어디 아프면 지금 말해. 무대에서 쓰러지면 방송사고야.”
마침 밖에서 방송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온 매니저도 리더의 이야기를 듣고 동의를 표했다.
“너 요즘 확실히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나오고 있어.”
“제가요?”
팬사이트 등에서 도연의 건강 이상설이 간간이 나오는 와중이었다.
“식사도 잘하고 평소에는 괜찮으니까 문제가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무대 위에서만 그러니까 걱정이 되지.”
“저 아무 문제 없는데요.”
매니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지금까지는. 하지만 오늘 리더가 모니터링을 하면서 지적할 정도로 도연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점에서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춤도 열심히 추고, 자기 파트에서는 노래도 곧잘 부르지만, 굳어버린 표정 때문에 웃어도 억지로 웃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일반 행사라면 모를까, 오늘은 카메라를 받아야 하는데 표정이 그렇게 굳어 있으면 분명 사람들이 의심하던지 염려를 할 꺼야.”
비록 대세라 해도 1년 차라 더 자주 얼굴을 알리기 위해 많은 활동을 하는 중인 리본 소녀다. 때문에 팬 사이트에서는 아이들을 쉼없이 굴린다고 소속사를 향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도연이 전국으로 방송되는 행사에서 저런 표정을 짓는다면? 후폭풍이 여간 심하지 않으리라.
“혹시 그날이니?”
“아닌 거 아시잖아요.”
아이돌의 건강 관리는 소속사의 가장 큰 의무 중 하나였다. 당연히 아이들의 생리 주기도 매니저가 챙겨야 했다. 그러니 아닌 줄 알면서도 묻게 되는 일이다.
“그럼 혹시 뭐 잘못 먹어서 체했거나, 그런 거 아니지?”
“아픈 데 없어요. 정말이에요.”
“그럼 왜 그랬는데?”
“저도 몰라요. 제가 저런 표정이었는지도 몰랐는걸요.”
“정말이야?”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는다는 건 좀 더 심각하게 여겨야 할 문제였다. 왜냐하면, 스스로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무대 위, 카메라 앞에서 통제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안고 방송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걱정하지 마세요. 본 무대 때는 웃으면서 잘할게요.”
“잘할 수 있겠니?”
“그럼요.”
도연은 미소를 지어 매니저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날 저녁, 팬 사이트에서는 ‘도연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 ‘리본 소녀 불화설’, ‘매니저에게 꾸중 듣는 도연’ 등의 글들이 올라왔고, 소속사 홈페이지의 게시판과 SNS의 댓글은 수많은 팬들의 글들로 도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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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몰랐어?”
―몰랐는데요.
도연은 단유가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에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이미 단유가 TV를 잘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연예인에게도 관심이 별로 없다는 것을 지난 촬영 기간에 들은 바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함께 고생하며 촬영을 했는데 조금도 궁금하지 않을까?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게 아니란 건 말투에서 이미 잘 느껴진다.
“그래서 얼마 전에 건강 검진도 새로 받기도 했거든. ···요점만 말하면, 나한테 심리적인 문제가 있대.”
―······.
반응이 영 심심하다. 하지만 급해서 전화를 건 쪽은 자신이었으니, 도연은 계속 말을 이었다.
“대인 의존증이요?”
매니저가 되묻자, 하얀 가운을 입은 여의사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대인 의존증이 그저 혼자서 어떤 결정도 주체적으로 내리지 못하고 타인에게 의지하려고만 하는 사람을 가리켰어요. 하지만 이 부분은 의존성 인격 장애(Dependent Personality Disorder)와 엄격히 구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의존성 인격 장애는 병입니다. 남에게 의존하려는 욕구가 아주 강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것을 병적으로 꺼립니다. 자신감이 없고, 혼자 있을 때 불안과 초조를 강하게 느껴서 스트레스를 유발합니다. 의존적 관계를 맺고 지내면서도 언제 이 관계가 깨어질지 몰라 두려워하죠. 그래서 종종 불안 증세와 신경질적인 어투가 나옵니다.”
“저희 도연이는 그렇진 않은데요. 그렇지···않은 거 맞죠?”
“네. 도연 씨는 그 정도까지 심각하진 않죠. 하지만, 대인 의존증이라 볼 만큼 불안감을 많이 드러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매니저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혹시 저희가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 때문에 그런 건가요? 그러니까, 직업 때문에 그런 증세가 생긴 건가요?”
여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영향이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네요. 아직 가치관이 정립되지 못한 어린 시기의 아이들이 연예계에 발을 들이면서, 그런 의존증을 보이는 경우가 다수 있거든요. 예전에 어떤 사람은 혼자 은행에도 못 갔다잖아요. 창구에 앉은 은행원이 물어보는 게 두려워서 못 갔다던가?”
그런 건 매니저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 왜···아니 그럼 고칠 순 있는 건가요?”
여의사는 들고 있던 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신중히 말을 고르는 모습을 보였다.
“도연 씨? 처음 데뷔했을 때는 어땠는지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도연은 의사의 질문에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사실 처음에는 별로 감흥이 없었던 것 같아요. 데뷔무대요. 오랫동안 꿈꾸던 데뷔여서, 연습을 많이 했어요. 밤새도록 연습하고 하루에 두 시간도 못 자는 날들이 무려 한 달이 넘었죠. 그래도 힘들다는 생각보다 무섭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데뷔무대에서 실수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 그리고 만약 사람들에게 외면받는다면, 그래서 만약 가수를 계속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요.”
도연은 손가락을 꼬면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공들여 받았던 네일 아트가 많이 망가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큐티클도 지저분한 게 조금 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그런 생각과 고민이 많았던 데뷔무대였어요. 그런데 막상 데뷔무대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무대였어요. 실수도 없었고, 연습한 대로 다 잘 됐던 무대였거든요. 리더 언니는 물론이고 매니저 오빠도 끝나고 나서 칭찬을 해줬어요. 잘했다고. 하지만 혼자서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잘했나? 한 달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군살 생길까 봐 먹는 것도 조심하며 지냈던 게 바로 이 무대를 위해서였는데, 그런 노력에 비례한 결과였을까? 솔직히 조금 의심도 들었어요.”
여의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도연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는 자세를 보였다.
“그런데, 아세요? 저희 첫 노래가 나오고 3주 뒤에 음악 프로에서 1위를 했어요. 그제야 마음이 놓였죠. 우리가 잘했구나. 사람들이 우리를 좋아하는구나, 라고요.”
“그렇군요. 그럼 지금은 어떤가요?”
“지금은, 솔직히 말씀드리면, 좋아요. 무대에 오를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응원해주는 함성을 들으면 힘이 나죠. 기분도 좋고요.”
“기쁜가요?”
“그럼요.”
“그럼 다른 걸 물어보죠. 요즘 힘든 점은 없나요?”
도연은 너무 당연한 걸 물어본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사실 저희가 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 보니, 잘 시간도 모자라고 먹는 것도 계속 관리해야 하는 데다, 음원 차트에서 우리 노래의 순위가 계속 변동되다 보니 그런 걸 신경 쓰는 게 전부 힘들죠. 하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의사는 작성하던 서류에 뭔가를 적어넣은 뒤 도연과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
“하지만 도연씨는 최근 무대에서 웃질 못하고 있다고 하죠.”
“네. 그게 이상해요. 사실 아픈 것도 아니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도 않았는데 왜 그런 걸까요?”
“제가 보기에는 지금 도연씨가 자기도 모르게 받고 있는 스트레스를 표출한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스트레스요?”
“먼저 지금 그 증상이 언제부터 나왔는지를 알아봐야겠죠? 매니저분의 이야기로는 한 달 전에는 그런 모습이 없었다고 하던데요.”
“한 달 전에는 제가 촬영을 하는 게 있어서 무대에 오를 일이 없었어요. 중간고사도 있었고요.”
“학교 생활이랑 연예계 활동을 병행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럴 지도요.”
“또 들어 보니 한 달 전, 영상 촬영 당시에 많이 힘들었다고 하던데요?”
“그때는, 네. 그랬어요. 하지만 금방 좋아졌어요.”
“그때 이야기를 해보실래요?”
도연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처음 하는 연기에 대한 부담감과 부족한 실력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에 힘들어했던 기억. 하지만 연기 수업을 받으며 자신감을 얻고 이후에는 별 탈 없이 촬영을 마쳤다는 이야기에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같이 촬영했던 아이가 있었는데, 그 친구 덕에 연기를 잘할 수 있었어요. 상대의 감정을 잘 받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연기가 자연스러워진다고 연기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거든요.”
“저도 봤어요. 연기가 나쁘진 않던데요?”
도연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건 편집의 힘이에요. 자신감을 얻긴 했지만, 제가 봐도 제 연기는 아주 어설펐어요.”
“자신에 대한 평가가 너무 박하네요.”
“사실인데요, 뭘.”
“도연씨의 대인 의존증은 사실 연예계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거로 보여요.”
의사의 말에 매니저가 의아해했다.
“들어오기 전이요?”
“자기 결정권이 부족한 증상을 보이는 장애(Disorder)라기보다는 대인 의존증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유에요. 도연 씨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많이 부족해요. 그래서 더 자신을 몰아세우는 경향이 있어요. 학교와 연예계 활동을 동시에 하는 것도 실은 스스로가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보다 실패에 대한 불안과 자신에 대한 불신을 가리기 위한 결정이었죠. 그리고 그 결정도 스스로 내리기보다는 부모님의 권유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이뤄졌고요. 활동 이후에도 회사에서 정한 스케줄에 군말 없이 따랐다고 하죠?”
매니저는 도연의 그런 자세가 다른 연예인들이 모범으로 삼아 마땅할 성실함의 표본이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난 연기 연습 때, 카메라 공포증이라고 했나요? 회사에서는 그렇게 생각했었다고 하셨죠? 물론 카메라 공포증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본질은 대인 의존증에 의한 불안감이 표출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아요. 데뷔 초기에는 멤버들에 대한 신뢰와 본인에 대한 신뢰가 낮은 상태여서 당시 무대에서는 만족감이 낮은 점수를 기록하고 있어요. 반면, 점점 무대를 하면서 멤버들에 대한 신뢰가 올라가고 팬들의 함성과 같은 평가지수에 신뢰를 부여하면서 만족감이 상승하네요.”
여의사는 서류를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첫 연기를 시작했을 때, 그녀의 신뢰 수치는 다시 낮은 점수로 내려와요. 첫 연기라는 불안감도 있겠지만, 그 현장에서 자신이 신뢰할 만한 주변인이 없었던 모양이에요. 그러니 스스로가 ‘엉망이었다’고 평가할 만큼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겠죠.”
매니저는 당시, 촬영을 마치고 낯빛이 어두워진 채로 차에 올라 교과서를 꺼내 들던 도연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때 그녀에게 도움을 준 친구가 있었네요.”
매니저도 금방 이해했다.
“남자 친구 역을 했었던 아이 말이군요.”
“네. 영상을 보니, 바로 이해가 되던데요? 사실 매니저님이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셨다면, 저라도 오해했을 거예요. 두 사람, 사귀는 거 아니냐고. 처음 촬영본에서 보여주던 얼굴이랑 마지막 촬영에서의 도연씨의 얼굴은 확연히 다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