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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515화 (515/956)

나무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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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핸드폰을 들어 번호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거기가 실프 프로덕션인가요?”

단유의 목소리에 앞에 앉은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단유가 얌전히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웹드라마를 찍는 곳 맞죠? 아, 다름이 아니고 전 장계중학교에 다니는 김단유라고 하는데요, 여기 그쪽에서 오신 두 분이 절 캐스팅하겠다고 오셨는데, 답변은 직접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야, 전화 안 꺼!”

막내가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소리가 컸던지 통화하고 있던 상대도 그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라 누구냐고 물었고, 단유는 침착하게 일러주었다.

“네? 이 분 성함이 조태영, 이었던가요? 조금 흥분하신 모양이네요. 네, 별일 없습니다.”

조연출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고는 있으나 그 시선이 향한 대상은 단유가 아니라 핸드폰 너머의 누군가인 듯했다.

“아무튼, 저에게 주신 관심은 감사드립니다만, 전 연예인도 아니고 연기에도 관심이 없기 때문에 주신 제안은 ‘정중히’ 거절하고자 합니다. 부디 좋은 배우 섭외하셔서 좋은 드라마 만드시길 응원하겠습니다.”

조연출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말하는 것만 보면, 어딜 보고 중학생이라고 할까? 아니, 그보다도 이런 짓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절대, 앞에 계신 두 분 때문에 거절하는 게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로 거절하는 것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랄게요.”

단유는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앞에 앉은 두 사람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눈앞에 있는 저 사람들은 강자다. 하지만 지금, 이 테이블에 한정된 강자일 뿐. 그러니 저들은 또 다른 강자에게 넘기기로 한다. 모든 것을 다 제 손으로 처리하겠다는 것만큼 또 어리석은 생각이 있을까?

집에 돌아와 호빵의 그릇에 간식을 채워주고, 싱크대에 담겨 있는 오전에 두고 갔던 컵과 식기를 씻기 시작했다. 베란다에 걸린 빨래들을 걷어 곱게 개어 각자의 방에 옮겨 놓고, 거실에 흩어져 있는 호빵의 흔적들을 청소기로 깨끗이 치워버렸다.

커피숍에서 시간을 조금 보내긴 했어도, 명수가 집으로 돌아오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다. 하은도 학원에 가고 없는 마당이니 한동안은 집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단유였다.

그래서 다행이다. 차분하게 자신의 안으로 들어가 볼 시간을 벌었다.

****

“다음에 또 보자!”

“잘 가!”

지태와 채윤이 횡단보도에서 크게 손을 흔들며 뛰어가는 것을 배웅한 뒤, 상미와 명수는 다시 집으로 걷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넷이서 왁자지껄 떠들다가 두 사람만 남으니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말없이 걷고 있자니, 어색한 느낌이 들어 명수는 참을 수 없었다. 분위기라도 바꿔볼 겸, 명수는 아무 말이나 꺼냈다.

“아까, 마지막 게임 아쉬웠다. 그치?”

“뭐, 조금 아쉽긴 했지.”

“집에서 쓰는 마우스였으면 금방 잡았을 건데.”

“장비 탓하는 거 아니랬다.”

“장비 탓이 아니라 진짜로 감도가 안 맞았어. DPI도 안 맞았고.”

그러자 상미가 목소리를 변조하여, 명수를 타박하는 흉내를 냈다.

“언제까지 장비 탓만 할 셈인가. 프로는 지고 나서 군말을 하지 않는 법이야.”

명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아쉬워서 잠도 못 잘 거 같애.”

상미도 아쉽긴 마찬가지였다. 랭킹을 올리려고 하는 게임은 아니지만, 이왕이면 방학 동안 높은 순위를 차지해보고픈 생각을 가진 상미였다.

“그럼 한 게임 더 할래?”

“그럴까?”

“집에 가서 접속해.”

‘집’에 가서 ‘각자’ 접속해서 게임을 하자는 이야기에 명수가 살짝 실망했다. 스치고 지나갈 감정이라도 들킬까봐 얼른 고개를 돌리는 명수였다.

“아, 응.”

“대답이 시원찮다?”

“응? 아, 아니. 지금 집에 가면, 아, 그··· 단유가 컴퓨터 쓰고 있지 않을까 해서.”

“단유도 게임해?”

상미가 ‘설마?’ 라고 묻자, 명수는 ‘그럴 리가’ 라고 대답했다.

“게임은 안 하지. 그냥 가끔···컴퓨터로 작업할 게 있나 봐.”

“그렇구나.”

“······.”

“······.”

그리고 다시 말이 끊어졌다. 낮 동안 달궈진 도로 위를 달리는 따뜻한 바람이 두 사람을 쓸고 지나갔다. 명수는 머리를 쓸어넘기며―물론 넘길 머리 따위 없는 짧은 스포츠 스타일이었지만―하소연하듯 혼잣말을 했다.

“아, 배고프다.”

“아까 라면 먹었잖아?”

‘돼지니’라고 묻는 눈동자에 명수가 발끈했다.

“난 운동선수야. 먹고 먹어도 계속 배고픈 축구 선수라고.”

“누가 들으면 되게 열심히 하는 줄 알겠다?”

“나 열심히 하거든?”

“열심히는 무슨. 너 요즘은 방과 후에 축구 연습 안 하잖아?”

“시험기간이라서 그렇지.”

“아냐, 작년에는 축구 연습을 더 많이, 더 오래 했었거든? 너 초심을 잃었어.”

‘초심’을 잃다니? ‘초심’하면 명수, 명수하면 ‘초심’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 달려온 명수는 오로지 그 꿈을 위해 아직까지도 공부를 가까이하지 않고 있다.

“만약에 내가 초심을 잃었다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라도 공부를 했겠지만, 난 내가 축구선수가 되고 말 거란 확실한 자신감과 신념이 있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않아.”

“넌 꼭 이럴 때만 말을 잘하더라?”

“이럴 때가 언젠데?”

“뻔뻔하게 변명할 때.”

“아니거든? 나 원래 말 잘하거든?”

“맞거든요?”

운율을 붙여 놀리듯 명수를 향해 혀를 쭉 내밀던 상미는 코웃음을 치며 웃다가 고개를 돌렸다.

“상미야!”

“어? 아빠!”

상미가 조르르 달려가 아버지의 팔짱을 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너 왜 이제 와?”

그렇게 물으며 고개를 들었더니 명수와 시선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어, 명수구나.”

“아빠, 오늘 우리 시험 다 끝난 기념으로 친구들이랑 놀다가 오는 길이에요.”

“도대체 그 놈의 기념은 1년에 몇 번을 하는 거야? 1년 365일이 매일 기념일인건 아니지?”

“그럼 더 좋지? 매일 매일이 신나는 하루가 되는 거잖아? 매일이 의미 있고 기분 좋은 하루가 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기분 좋은걸? 아빠는 안 그래?”

“듣고 보니 그러네?”

아버지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상미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다시 명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희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네!”

상미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매달렸다.

“맛있는 거 사줄 거예요?”

“마음이야 얼마든지 맛있는 걸 사주고 싶지. 그런데 그러면 아빠 집에 못 들어가. 알잖아? 엄마가 밖에서 사 먹는 걸 싫어하시는 거.”

“그래도 오늘은 아빠가 힘 좀 써라, 응?”

“다음에. 대신 고기나 사 가지고 갈까?”

“응! 좋아요!”

“명수야, 너도 같이 가서 먹자.”

“아, 네. 고맙습니다.”

“역시 명수는 빼질 않는구나.”

아버지의 우스갯소리에 명수가 히죽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이번엔 명수에게로 조르르 달려간 상미가 명수의 목 뒤로 팔을 걸더니 아버지를 쳐다보며 당당하게(?) 외쳤다.

“아빠, 명수 놀리지 마!”

“어쭈? 뭐냐? 너?”

아버지가 헛바람을 내뱉으며 바라보자 상미가 힘줘서 명수를 끌어당겼다.

“내 친구 놀리는 건 못 참거든?”

“너희 둘 사귀니?”

“아빠는! 그런 거 아냐!”

빽 소리 지르며 명수를 끌고 마트를 향해 걷던 상미가 걸음을 멈췄다. 그 옆에 어깨를 움츠리고 상미와 상미 아버지의 눈치를 번갈아 보던 명수도 덩달아 멈추고 눈동자를 굴렸다.

“단유도 부르면 고기 많이 사야 되는데 괜찮아?”

“괜찮다. 우리 딸 공부도 시켜주는 착한 친군데 고기 많이 먹여줘야지.”

“알았어.”

상미가 힘차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명수에게 속삭였다.

“고기 많이 살 거니까, 오늘 많이 먹어. 알았지?”

“응.”

대답하는 명수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지만, 스스로는 느끼지 못했다.

****

우주의 신비, 과학의 원리, 인간의 시원(始原). 열거된 그 무엇과도 비교하기 힘든 미스터리이자 실존이 증명된 ‘마법’은 단유의 가장 큰 무기이며, 동시에 지식의 결정체였다. 사실 지난 날들의 대부분은 바로 이 마법을 습득하기 위한 고군분투의 시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단유는 마법을 어떤 ‘파괴력을 지닌’ 혹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통제 수단으로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보통은 그저 자신이 아는 지식이 옳은지 그른지, 옳다면 그 작동하는 기제, 메커니즘은 어떠한지를 알아볼 수 있는 도구로서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법을 ‘살인’의 도구로서 사용한 단유는 자신의 마법이 가진 힘을 보았다. ‘살인’에 대한 윤리적 찬반도 중요한 문제이겠으나, 그보다 먼저 단유가 문제 삼은 것은 마법의 실질적인 효용성에 관한 부분이었다.

너무나 손쉽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은 손을 들어 컵을 집어 물을 따라 마시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물이 있다면’ 말이다.

마법도 마찬가지다. 단지 의지를 가지기만 하면 얼마든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다만 그 전제가 조금 복잡하긴 해도, 구현 가능한 마법을 구현함에 있어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다.

그렇다 보니 단유는 마법이 마치 어울리지 않는 두 손에 쥐어진 대도(大刀)처럼 느껴졌다. 아니, 손쉬움이란 기준에서 보면 ‘대도’라기보단 ‘피스톨 권총’이다. 검지를 까딱거리는 것만으로 상대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고, 아예 죽일 수도 있다.

조그만 더 과장하면, 권총이 아니라, ‘핵무기’다. 핵분열과 핵융합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연구하는 학문에서, 천문학적 재산 가치와 윤리학적 생명 가치를 한순간에 앗아가는 무기가 만들어진 것처럼, 그저 살아남겠다는 소박한 희망과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여 알아가는 희열 속에서 시작된 마법이 이제 너무나 쉽게 사람을 죽이고, 괴롭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핵을 단지 핵무기로만 사용했다면, 인류의 발전은 아직도 5, 60년 전에 머물렀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후퇴했을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마법 역시 그 가치를 새로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명수에게서 걸려온 핸드폰은 기말 시험이 끝난 기념으로 상미네 아버지께서 고기를 사주겠다고 하셨다는 이야기였다.

“너희끼리 먹지 그래?”

―우리끼리 먹으면 체하든지, 아프든지 둘 중 하나야. 빨리 건너와.

“알았어.”

들어올 때와 같이, 거실을 한 번 둘러보고, 호빵의 그릇과 물병 상태를 점검하고, 싱크대와 탁자 주변을 깨끗한 행주로 말끔히 청소한 후 단유는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끊어졌던 생각을 이어붙여 보았다.

마법이란 힘을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단유 본인이 어지간한 일은 모두 혼자 처리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단유가 워낙 책임감이 강한 아이라 뭐든지 혼자서 잘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만약 단유에게 청바지를 만들어 입으라고 한들, 단유가 혼자 만들기나 하겠으며 만들 시도라고 할까?

이 사회는―교과서에 배운 대로 말하자면―분업화되고 세분화된 세상이다. 혼자서 모든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비효율적인 것이다.

비효율은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이다. 잠깐의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는 단유에게 ‘비효율’이란 본래 의미 이상의, 끔찍한 자기파괴행위였다. 그러니 비효율을 경계해야 한다.

일단 지금 당장은 그렇다. 하지만 또 어떤 생각과 기준에 흔들려 지금의 방침이 바뀔지는 알 수 없다.

‘어쩔 수 없지.’

일전에도 그랬지만, 이 세상, 이 현실에 ‘100% 절대’란 없다. 기준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그때였다. 엘리베이터 도착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리고,

“김단유군?”

상상하지도 못했던 인물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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