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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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그만해.”
“뭘 그만합니까. 보자 보자 하니까 너무하잖아요? 아무리 요즘 애들이 싸가지가 없다고 해도 그렇지.”
단유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바라보는데, 연출부 막내의 불만스러운 표정은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엄연히 우리가 어른인데 말이야, 어른이 이야기를 하면 고분고분 듣는 척이라도 해야지. 안 그래요? 우리가 쟤를 어리다고 무시하길 했어요, 뭘 했어요? 나름 일 때문에 왔으니까, 그래서 같이 일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존중해줬잖아요. 그럼 자기도 존중을 해줘야지, 이건 뭐 지가 진짜 뭐 무슨 대스타라도 된 것처럼 말이야. 지 할 말 끝났다고 그냥 일어서는 건 뭐야? 안 그래요?”
단유는 자신이 정말 자기가 모르는 실수라도 했나 싶어 대화를 되짚어 보았다. 캐스팅 때문에 왔다길래 관심이 없다고 했더니, 예전에 어디 나온 적 있냐고 묻고, 재능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재차 단유가 하지 않겠다고 선을 긋고 일어나려 했더니 그제야 허겁지겁 배역 설명이며 급하게 캐스팅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다가 돌연 태도가 바뀌었다.
물론 단유 개인의 입장에서 본 상황이었고, 상대의 입장에서는 다르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유는 상대가 왜 불쾌감을 느끼는지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됐어, 야, 그만해. 아직 애잖아. 위아래 구분 못 할 때야.”
웃음을 흘리며 막내를 나무라는 조연출의 가학적인 유머 감각은 정도가 지나치다. 다만 ‘위아래’라는 조연출의 한 마디와 ‘어른’을 언급하던 막내의 이야기에서 ‘위계질서’를 침범당해 자존심 상한 모습이라는 걸 추측할 수 있었다.
단유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으니, 막내는 그 모습에 또 어떤 착각을 했는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애들은 도대체 자기가 잘못을 하고도 반성을 못 해요. 사과 한 마디 하면 될 것을 말이죠.”
“그만해라, 너도. 듣는 사람 민망하겠다. 말로 한다고 될 일이었으면, 요즘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겠냐?”
“그렇잖아요.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말 한마디면 또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그러면 우리도 가서 뭐 좋게 이야기라도 할 수 있지, 이건 뭐.”
다른 건 몰라도, 저 두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단유가 깊이 고개 숙여 사과하는 모습을 보며 통쾌해하고 싶어 한다. 자신들을 어른으로서 존중하고, 단유 본인은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위치한 계층으로서 당연히 보여야 할 굽신거림을 눈앞에서 재현하길 원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가 공정하길 바란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돈이 많든 적든, 남자건 여자건 할 거 없이 모두가 원하는 바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타인과의 불평등한 차이가 발생하지 않길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공정한 사회를 원한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에서 불공정한 사회와 현실은 불편하다.
지금 단유의 눈 앞에 있는 두 사람은 ‘자신의 입장에서’ 불공정한 현실과 맞닥뜨렸다. 감히(!) 어른을 존중할 줄 모르고 자기 혼자 잘난 줄 알고 멋대로 행동하는 아이는 그들의 기준과 사회에서 용납되기 어려운 사례였고, 그래서 ‘불편’함을 느낀다.
물론 ‘자신의 입장’이란 것이 무조건 이기주의적인 것만은 아닐 테다. 때로는 공리주의적인 시각으로 세상의 질서를 판단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그런 이들이라면 이타주의적인 기준으로 세상을 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앞에 있는 두 사람은 그런 기준은 아닌 듯하다.
‘이 놈의 사회가 어찌 되려고’, ‘요즘 애들은 너무 편하게 살아’, ‘오냐 오냐 해주니까 기가 살았어’ 같은 말들로 불공정함을 지적하는 그들은, 그들의 삶에서 공정하다고 교육받아왔던 가치관이 흔들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조금 무리하게 생각을 이어가자면, 어쩌면 이 두 사람, 나이가 들면 단유에게 보수적 가치를 부르짖던 전 교장 선생님처럼 될지도 모르겠다.
단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두 사람이 무슨 짓을 하려고 저러나 보는 사이, 핸드폰의 녹음 기능을 켜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뭐 하는 짓이냐?”
조연출의 물음에 단유는 녹음 버튼을 누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지금부터 여기서 있을 대화 내용을 녹취하기 위함이에요. 혹시나 서로의 입장이 갈려 분쟁이 벌어지더라도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에 다른 곡해가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거든요.”
단유는 액정 속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확인 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은 물론 두 분께서 하시는 말씀도 모두 녹취가 될 겁니다. 만약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꺼 드릴게요.”
“하, 나 참, 어이가 없네.”
단유는 두 사람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두 분과 저 사이에는 불필요한 갈등 관계가 형성되었어요. 그리고 앞으로 있을 대화에서도 서로의 입장이 좁혀지기 힘들 가능성도 있어 보이기에, 전 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녹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만약 제게 문제가 있는데 제가 모를 뿐이라면, 이 녹취는 두 분의 의견을 정당하게 입증하는 자료로 사용될 수 있어요. 동의하시나요?”
“누가 이 따위에 동의를 한단 말이야!”
막내가 탁자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집어 들어 던질 듯한 자세를 취할 때, 단유가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비록 녹음은 안 돼도, 녹화는 되고 있을 겁니다.”
검은 반구형 CCTV가 단유의 손가락 끝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것을 확인한 막내가 멈칫거렸다.
“타인의 재물을 손괴하시려는 행위 역시도 문제 삼으려고 하면 얼마든지 문제 삼을 수 있어요.”
조연출이 팔꿈치로 막내를 툭툭 치자, 막내는 못마땅한 얼굴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여전히 녹음이 되고 있음을 확인한 단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상황을 정리해보죠. 두 분께서는 두 분이 일하시는 프로덕션의 일 때문에 절 찾아오셨고, 저에게 캐스팅을 제의하셨어요. 그런데 전 그쪽으로 관심도 없을뿐더러, 두 분에게는 말씀드리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관계로 고사했습니다. 하지만 두 분께서는 저에게 ‘싸가지가 없다’느니 ‘사과를 하지 않느니’하면서 몰아 세우셨어요.”
“몰아 세우긴 누가 몰아 세웠다고 그래?”
막내가 눈을 치켜 뜨자, 단유가 핸드폰을 가리켰다.
“차분하게 말씀하시는 게 차후에 도움이 될 겁니다. 진정하세요.”
“이익!”
이를 가는 소리까지 녹음이 되면 어쩌려고. 조연출은 번들거리는 이마를 한번 짚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자 보자 하니까···.”
단유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만,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이 얼마나 상대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인지 아냐?”
“불쾌하시다고요?”
“속 다르고 겉 다른 사람의 이중성이 얼마나 사람을 열 받게 하는지 알아?”
“제가 이중적이었던가요?”
“지금 너의 말본새도 그래. 정중한 척 가식이나 떨면서 말이야.”
“제가 지금 가식을 떨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래! 녹음하기 전까지만 해도, ‘됐어요’ ‘관심 없어요’ 이렇게 싸가지없게 말을 해놓고선, 갑자기 녹음기를 켜놓고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라고 연기하는 모습이 참으로 역겹다.”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억울하네요. 다만 앞서의 대화는 녹음이 되지 않았으니 다시 돌려볼 수도 없고, 제 억울함을 토로해봐야 무의미하네요. 다행히 지금은 녹음을 하고 있으니 지금부터라도 서로의 의견을 제대로 나눠보도록 하죠.”
“너랑 무슨 말을 하자는 거냐!”
“처음에 그러셨잖아요?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고 결정하라고. 사실 전 마음이 바뀔 리가 없으니 하지 않겠노라고 먼저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저에게도 그렇지만 두 분께도 시간은 소중한 것이잖아요?”
기도 안 찬다는 표정으로 실소를 터뜨린 막내의 눈초리가 부리부리했다. 조연출도 등을 등받이에 기대고 팔짱을 낀 채 단유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시간 낭비를 하지 않으려고 이야기도 듣지 않았다는 거냐?”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는 태도 이전에요, 제가 연예인이나 배우 지망생 같은 게 아니란 건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보시다시피 전 학생이고 일반인이에요. 그냥 지나가는 학생을 붙잡고 대뜸 너 왜 내 말 안 듣고 그냥 가? 내 말 들어, 라고 우격다짐으로 붙잡는 것과 마찬가지란 생각 안 드시나요?”
“와, 이 새···. 와, 나.”
말을 잇지 못하고 어이없다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는 막내 곁에서 조연출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단유를 보고 있었다. 단단하게 엮은 팔짱에서 강한 의지가 보인다. 네 말 따위 절대 나한테 통하지 않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 지켜야 할 예의란 게 있어. 넌 그 예의를 지키지 않고 있잖아? 지금도 말이야. 너, 우리가 너보다 얼마나 더 나이를 먹었는지 알아? 너랑 우리가 몇 살 차인데 말이야···.”
단유는 말을 자르는 대신 조용히 상대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조연출의 씹는 듯한 말투 때문에 중간중간 알아듣지 못할 내용도 있었지만, 요는 ‘넌 예의를 지키지 않았고, 싸가지가 없어’ 라는 내용의 반복이었다.
‘나이’와 ‘예의’를 엮으면 유교적 관습에 근거한 ‘질서’가 튀어나온다. 옛 것이니, 고리타분하니, 조선을 망하게 한 사고니 하면서도 그 뿌리가 너무도 깊숙이 내려서 누구도 유교적 사고방식, 메커니즘을 버리지 못한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나누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이유는 ‘윗사람’이기 때문이고, 그가 위인 이유는 나이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이 질서 하에서 결코 용납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데, ‘대화’였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지시’나 ‘명령’을 내리고, 아랫사람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 ‘대화’란 있을 수 없었다.
단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사랑’과 ‘호의’에 대한 감정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 했던 지난날의 그것과는 다르게, 지금 단유는, 계속해서 치밀어오르는 ‘손쉬운’ 문제 해결책을 선택하지 않으려고 머리를 혹사시키는 중이었다.
하지만 가슴속 충동은 쉽게 이겨내기 어려웠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충동과 마법의 힘은 아마도 지난번, 그 충동에 따라 움직였던 ‘사건’의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단유의 손 끝에서 펼쳐지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사그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지금도 단유는 자신의 충동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논리적 정당성을 머릿속에서 꾸며내는 중이다. 만약 이성적으로 정당성을 입증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단유의 마법은 그 형태를 온전히 갖추고 구현될 것이다. 하지만,
“후우.”
호흡으로 미쳐 날뛰는 충동을 잠재우며 단유는 머리를 비우려 애썼다. 이들은, 만약 이대로 헤어지더라도 자신이나 자신의 주변 사람에게 해를 끼칠 인물은 아니다. 사소한 문제로 감정적 다툼이 있을지언정, 그게 크게 확대될 일도 아니었고, 따라서 자신이 쉽게 힘을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충동을 느끼는 건, 그저 손쉬운 결과만을 바라는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다.
‘그러면 안 돼.’
점점 쉬운 방법만을 찾으며 힘을 쓰다간, 그 끝이 파멸에 이를 수 있음을 가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쨌든 하나는 인정하고 가야 한다. 이 자리에서 약자는 단유다. 앞의 두 사람은, 적어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강자이며, 자신은 보호받아야 할 약자인 동시에, 그냥 ‘약자’다. 보호고 뭐고 그냥 고개 숙여야 하는 약자.
물론 그들의 사회적 선입견에 기대어 보호받을 생각도 없고, 고개 숙일 생각도 없다. 대화? 가슴 답답해지는 대화는 계속해봐야 무슨 소용일까. 힘? 자신을 파괴할 생각이 아니라면 적어도 자신의 비밀스런 무기는 되도록 ‘비밀’에 묻혀있게 하자.
‘그래.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일이야. 내 감정의 문제만 아니라면, 이렇게 앉아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감정 싸움을 벌일 일이 아니었어.’
불쾌하다고? 싸가지가 없다고? 그게 뭐?
호흡을 가다듬으니 가슴이 진정되고 머리가 맑아진다. 저들이 그렇게 애써 지키려고 하는 자존심? 다 부질없다. 생각해보면 저들은 굳이 16살의 어린 중학생 앞에서 잘난 척을 하고 싶어 하는 게 다인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과 어울려 감정 싸움을 벌이는 것은, 스스로를 그 수준에 매이게 하는 것일 뿐, 아무런 득도 없는 일이다.
‘유치하게.’
단유는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껐다. 그리고 바라보니 두 사람의 얼빠진 표정에 실소가 나올 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