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령(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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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가까워져 오는 시간이지만 여전히 날은 더웠다. 다만 자전거를 탄 데다 틈틈이 바람을 불러와 땀을 식힌 탓에 땀이 흐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단유를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은 이마가 번질번질 한 것이 여간 더운 게 아닌 모양이었다.
“김 단유군?”
“네. 누구시죠?”
“아, 난 이런 사람인데···.”
라며 건넨 명함에는 무슨 프로덕션의 연출부라는 직함이 찍혀 있었다.
“어떻게 알고 오셨죠?”
“그보다, 어디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까?”
오피스텔 로비 내의 그늘도 더위를 식혀주진 못했던 모양이었다.
“근처에 커피숍 있나?”
단유는 오피스텔 맞은편 거리에 있는 커피숍을 안내해 주었다.
일부러 칠하지 않은 듯, 시멘트의 거칠한 면이 두드러진 천장과 은빛 호일로 감은 것 같은 알루미늄 환기 덕트관 아래로 검은색 LED 핀 조명에서 비춰진 주광색 빛이 가게 전체를 은은하게 감싸는 가게였다.
“가게 분위기가 좋네.”
“이런 인테리어 하는데 돈 좀 들었겠네요.”
“저 조명은 색온도가 5400이 안 나오겠는데?”
“일부러 조절한 건가? 색온도 저렇게 다운시키려면 커스텀이겠죠?”
전문가 포스를 풀풀 내면서 카페에 들어서는 두 사람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 뒤를 따라온 단유가 맞은 편에 앉으니 ‘뭐 마실래’라고 묻는다.
“용건부터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시간도 많이 늦었는데요.”
피시방에서 시간을 보내다 온 단유는 살짝 배도 고팠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눈빛으로 의견을 나눈 뒤, 말을 꺼냈다.
“소개부터 다시 하자면, 난 실프 프로덕션의 연출부에서 일하는 강영식이고, 여기는 같은 연출부의 막내 조태영.”
“네,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고, 실은 우리 스튜디오에서 웹드라마를 맡게 되었는데, 원래 배역을 맡은 배우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그만두게 되어서 대체할 사람이 시급한 상황이거든. 그런데 우리 대표님이 어디서 너에 대해서 들었나 봐. 우리 감독님한테 널 추천했다네? 또 지금 출연하는 배우 중에서도 한 명이 널 추천하니까 감독님이 궁금해하시더라고. 과연 어떤지 보고 싶다고 하셔서 말이야.”
단유로서는 전혀 감이 오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대답은 일찌감치 정해진 문제였다.
“캐스팅 때문에 오셨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렇지.”
“그렇다면, 잘못 찾아오셨네요.”
“왜?”
“전 연예인도 아니고, 연기 뭐 이런 건 별로 하고 싶지 않아서요.”
“연기에 관심이 없으면, 가수 지망생이나 전문 모델 쪽 그런 거야?”
“아뇨, 아예 관심이 없어요.”
“아예 없다고?”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두 사람에게 오히려 단유는 반대로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인지를 물어야 했다.
사실 사건의 발단은 단유가 홍보 영상을 찍을 당시, 영상을 촬영했던 촬영감독의 칭찬이 건너건너 전해진 결과였다. 신선한 마스크에 연기도 곧잘 하는 원석이 있더라는 이야기가 마침 대표의 귀에 들어갔고, 배우 한 명이 그만두면서 새 배우를 찾아야 할 처지에 있던 대표가 혹시 하는 마음으로 연출부에 단유를 찾아가 보라고 이야기를 꺼낸 것이지만, 그런 사정을 대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았으니 그들은 그저 추천하더라, 는 것까지만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럼 우리 대표님은 왜 널···. 아니 그보다 걔는 얘가 잘할 거라고 입에 거품 물고 추천하지 않았나?”
“그랬었지.”
두 사람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진데, 제작사 대표가 추천하고 배우 한 명이 덩달아 이름을 올린 이가 연예인도 아니고, 연습생도 아니며, 이쪽 계통으로는 꿈도 꾸지 않는 일반인이란 사실 때문이었다.
왜 그들은 일반인을 추천했을까?
“너 혹시 정유진이라고 알아?”
“누구요?”
“정유진.”
단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걔는 널 잘 아는 것 같던데.”
“그래요?”
“뭐야? 전혀 몰라? 그럼 걔는 왜 얘를 추천한 거야?”
“문자 넣어 볼까요?”
지금 그게 중요한가, 중요한 건 현재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냐는 문제였다. 촬영은 며칠 남지 않았다. 방학 기간 학생들을 타겟으로 하는 웹드라마였기에 최대한 빨리 촬영에 들어가야 한다. 본래라면 이미 들어가고도 남았을 일이지만, 조연급 배우의 공석 때문에 촬영이 지연된 참이었다. 주연도 아니고, 조연이라니.
감독은 지금도 나머지 연출팀과 제작팀을 모아놓고 촬영 스케줄 조정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을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캐스팅을 끝내지 않으면 안 된다.
제대로 빗지 않아 헝클어진 곱슬머리 혹은 일부러 저런 스타일의 펌을 한 것인지도 모를 막내가 핸드폰을 붙잡고 있을 때, 조연출이라는 짧은 체크 남방을 걸친 사내가 단유에게 물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미안한 이야기다만, 아예 생각이 없다는 거니?”
“네.”
“혹시 이전에 어디 출연한 적 있었어?”
단유는 체크 남방을 입고 얼굴에 곤란하다는 표정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예 경험이 없다면 모를까, 몇 번 저쪽 업계의 사람들과 일을 해보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을 전혀 이해 못 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추측건대, 대표는 감독에게, 그리고 감독은 다시 조연출에게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이런 애 있단다. 가서 만나보고 캐스팅해 봐.”
“누군데요?”
“나도 몰라. 대표님이 알아본 모양이니까, 가서 만나보고 이야기해봐. 결과 나오면 바로 연락하고.”
철저한 상명하복의 업계 질서는 군대를 방불케 한다. 예민한 예술가의 길을 걷는 감독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연출은 ‘눈치껏’ 행동하고 ‘빠릿빠릿하게’ 명령을 수행한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일 처리를 하려는 모양새는 아마도 단유가 유명 소속사의 배우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뮤직비디오랑 광고 조금이요.”
“그래? 그때도 개인으로 움직였어?”
“소속사가 있었냐는 물음이시라면, 네. 없었어요.”
단유는 그저 돕기 위해 잠깐 카메오 형식으로 참여했을 뿐이라고 덧붙였지만, 조연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출연작이 적지 않은데, 연예인은 하기 싫다? 요즘 애들은 다들 연예인하고 싶어 하지 않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막내를 돌아보며 묻자, 막내도 동의한다는 고갯짓을 했다.
“옛날에야 딴따라였지, 요즘은 못해서 안달인 직업 아닌가요? 솔직히···.”
그쯤에서 단유의 얼굴을 흘깃 쳐다본 막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 정도 마스크면 연예인 하겠다고 해도 말릴 사람은 없겠죠.”
그간의 경험으로 보건대, 연예인, 그러니까 가수든 배우든 단지 마스크 하나만 믿고 나서기엔 너무 어려운 직업이라는 것을 단유는 배웠다. 얼굴만으로 배우가 된다 한들, 혹독한 작업 환경과 제작 현장에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되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이 일을 계속 하기 힘들 테다. 가수라고 다를까? 무대 위에서 조그만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거울을 보며 몇시간이고 연습을 하는 이들이 가수들이고 가수 지망 연습생들이었다.
“편견 아닌가요?”
단유의 물음에 조연출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말해서 얼굴도 재능이야. 사람이 백 명이 있다고 하면 백 명의 취향이 모두 제각각이라고 하지? 천 명, 만 명 숫자가 늘어갈수록 그 취향은 더욱 갈라질 테고 말이야. 그 사람들의 취향을 모두 충족시킨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야. 하지만 개중 어떤 사람은 그 많은 사람들의 취향을 충족시키고 만족감을 선사한단 말이지. 연기로든, 노래로든. 그런 사람들이 바로 연예인이잖아?”
만약 대한민국 7천만 인구의 다수가 좋아하는 배우라면 국민배우가 되는 거고, 가수라면 국민가수가 되는 거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취향의 얼굴을 가졌다면, 그것 또한 노래나 연기 못지않은 재능인 거지. 재능을 넘어서 신의 선물, 정도? 물론 네가 그렇다는 건 아냐.”
마지막 말은 조연출 나름의 유머였을 것이다. 어쩌면 조연출이라는 저 남자는 가학적 유머를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 문자 왔네요.”
막내가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액정 속의 문자를 읽던 조연출이 단유를 바라보며 물었다.
“리본 소녀의 도연이랑 같이 촬영했다는데? 정말이야?”
단유의 가장 최근 필모그래피였는데, 생각해보니 우습다. 연예인 활동은 하지 않겠다면서 필모그래피는 점점 늘어만 간다. 이러다 진짜 연예인 하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
“그게 아까 말씀드렸던 광고영상이네요.”
단유는 간단하게 교육부 홍보물로 찍었던 사실을 알렸다.
“그거만 보고 추천을 했다는 거야?”
조연출의 물음에 막내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연출부 막내가 무의식적으로 들고 있던 핸드폰을 들여다 보았지만, 그의 핸드폰이 아니었다.
“제 거네요.”
단유가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낯선 번호와 낯선 이름. 그런데 아주 낯선 이름은 아니었다. 액정에는 방금 전에 들었던 ‘정유진’이란 이름이 찍혀 있었다.
‘뭐지?’
단유는 양해를 구하고 통화를 시작했다.
“여보세요?”
―야! 너 어떻게 나를 몰라?
“네?”
―네는 무슨 네, 야? 정말 나 기억 안나?
“예. 기억이 안 나네요.”
―나랑 같이 교육부 홍보대사 선출 인터뷰도 했었잖아? 그때 넌 폭탄 터뜨려서 면접장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기억 안 나?
안 날 리가. 그제야 ‘정유진’이란 이름을 가진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샐쭉하니 웃던 소녀. 그때 대학교를 나오기 직전, 대학교 입구에서 그 아이와 만나 연락처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스파크처럼 번쩍, 하고 떠올랐다.
“기억 나.”
―진짜?
“응. 청모 중학교 2학년 정유진. 학생들의 꿈과 끼를 찾는 행복한 학교 만들기에 참여하게 되어 기쁘다고 했었지.”
―우와, 그런 말 두 번 다시 하지 마. 나 방금 등에 소름 돋았어. 내가 그런 말을 했었다고?
“응.”
―너, 나한테 관심 많았나 보네? 내가 했던 말도 다 기억하고? 그러면서 왜 모른 척해? 나랑 밀당하는 거야? 그럼 진작에 연락을 하지 그랬어? 설마 내 연락처 지웠던 거야?
“거기까지. 지금 다른 분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나중에 통화해.”
―야, 그 오빠들 진짜 너한테 간 거야? 우와, 신기하다. 솔직히 내가 말하긴 했어도 진짜로 너한테 갈 줄은 몰랐는데. 잘 됐다. 너도 해. 같이 하면 재밌을 거야. 나, 너 얼마전에 도연이랑 찍은 거 봤었거든? 너도 연기 꽤 하는 거 같더라? 아마 그 정도면 최소한 감독님들한테 욕은 안 먹겠더라. 같이 하자? 응?
생각해보니, 그때도 마이웨이 스타일로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죽죽 늘어놓던 스타일이었던 기억이 난다. 핸드폰 번호를 주고받을 때도 저돌적으로 나서던 모습이었다.
“알았어. 나중에 통화하자. 끊어.”
―할 거지? 같이 하자, 응?
단유는 대답하지 않고 통화를 종료시켰다. 그리고 조연출을 바라보니, 조연출과 막내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희 둘 혹시 사귀니?”
어떻게 들으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아뇨. 예전에 한 번 만난 게 다입니다.”
“그런거 치곤 되게 친해 보였던 것 같은데?”
어디가? 왠지 지금 이렇게 헤어지고 나면 이 두 사람, 다른 곳에 가서 전혀 근거 없는 가쉽을 만들어내서 퍼뜨리고 다닐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 알 바는 아니지.’
아니 땐 굴뚝에 연기도 나고, 발 없는 말이 천 리, 만 리 달리기도 하더라.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아무튼, 이제 처음의 궁금했던 점들은 모두 해결됐다. 왜 왔는지, 어떻게 온 것인지 다 알게 되었으니, 향후에 걱정할 문제도 없겠다. 깔끔한 마무리만 필요한 상황.
“결론만 말씀드리면 처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전 전혀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죄송하지만 이만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잠시만. 우리 이야기도 조금 들어 보지 그래?”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조급해진 조연출이 다급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주인공인 남자 고등학생이 여자로 변하면서 겪는 에피소드를 웹드라마로 엮을 예정이라는데, 주인공의 친구 역을 맡을 남자 고등학생이 갑자기 소속사 사정으로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약간 아웃 사이더 같은 친군데, 독특한 세계관을 가진 친구라는 설정이야. 주변 일에 무관심하고 우주와 통신을 해서 외계인을 만나고 싶다는 등의 4차원 아이거든? 반 아이들이 모두 무시하는 가운데 주인공만 이해해주고 같이 어울려주기 때문에 주인공과 절친이라는 설정이야.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재미를 떠나, 올림피아드도 거절한 마당인데, 지금 무엇이 내키겠는가.
“죄송합니다.”
단유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좋은 대답 들려드리지 못해 안타깝네요.”
“아니, 잠깐만. 거, 너무 하네.”
막내의 까칠한 반응이 단유를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