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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512화 (512/956)

요령(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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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리는 날씨지만 학생들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편하게 앉아 있었다. 물론 자세가 편하다고 마음도 편한 건 아니다.

불편한 마음을 한가득 안고 펜을 움직이던 학생들을 멈추게 한 것은 종소리였다.

“그만. 다들 펜 놓고 머리 위로 손 올려. 거기, 너 빨리 손 떼.”

끝났다고 기뻐하는 학생과, 마킹을 끝까지 하지 못해 울상인 학생들이 뒤섞인 가운데 제일 뒷자리에 앉은 학생들이 답안지가 마킹된 OMR 카드를 앞으로 넘겼다. 제일 앞자리까지 다다른 카드는 다시 선생님 손에 거둬졌고, 선생님은 카드 매수를 헤아린 뒤 시험이 끝났음을 선포했다. 아이들은 와, 하고 소리 지르며 자리를 벗어났다.

서로의 답안지를 확인하며 탄식과 환호가 터져 나오는 교실에서 명수는 단유에게 넌지시 물었다.

“오늘 PC방 어때?”

“나 회사 가보려고 했는데.”

“회사는 나중에 가도 되잖아? 메일 보냈을 거 아냐?”

“메일이야 보내긴 했지. 그래도 회사에 가서 새로 책도 받아와야 하고.”

“내일 가면 안 돼? 오늘 시험 끝났는데 뭉쳐야지.”

“너랑 상미만 뭉치면 되는 거 아냐?”

“야, 말 섭섭하게 하지 마라.”

“그 입이나 제대로 수습해. 아주 귀에 걸려서 내려올 줄 모르네.”

제 속도 제대로 감추지 못하는 명수를 보며 단유가 피식 웃었다.

“티 나냐? 아, 됐고. 아무튼, 같이 가. 이 게임이 원래 한 스쿼드로 해야 재밌단 말이야.”

원래 뭔가 바쁠 때 하는 일탈이 더 짜릿하고 재밌는 법이라, 시험공부 기간에 하게 된 게임에 푹 빠진 명수였다. 상미랑 같이해서 더 재미를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태랑 채윤이랑 같이 해.”

“하려면 다 같이 해야지! 그리고 네가 와야 맛있는 것도 많이 먹지.”

“내가 물주냐?”

“응.”

으이구.

“그래, 가자. 내가 널 먹여 살려야지.”

“오케이! 그리고 지금까지 네가 나 시험공부 도와줬으니까, 오늘은 내가 널 가르쳐줄게. 나만 믿고 따라와.”

“굳이 배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허. 이 게임은 상당한 전략 이해와 순발력이 필요한 게임이야. 네가 아무리 공부를 잘한다고 해도, 이 게임에선 풋내기라고.”

“내 말은, 굳이 내가 같이 게임을 해야 하냐는 이야기였어.”

“한 번 해보고 그런 말을 해. 아마 너도 푹 빠질걸?”

“이제껏 내가 네 말대로 푹 빠졌던 게임이 있었나?”

“이번엔 다를 거야. 꼭 그렇게 되고 말걸?”

명수가 자신 있게 외쳤다.

시험이 끝났다고 모두가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5반에서 십여 명 정도의 학생들은 학내 봉사 활동을 위해 움직여야 했다. 이례적으로 빠르게 진행된 학폭위는 학부모 간 합의가 있었음을 전제로 학생들에 대한 제재 수위를 정했는데, 결국 병억에게나 다른 아이들에게나 모두 학내 봉사 활동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병억에게는 40시간의 봉사 활동을, 다른 아이들에게는 10시간에서 15시간의 봉사 활동을 하도록 정해졌다. 다만 기말시험이 끝날 때까지는 유보되었다가 이제 각자 받은 시간대로 봉사 활동을 해야 했다.

“다행인 줄 알아, 이것아.”

아이의 등짝을 세게 내려치는 어머니와,

“쓸데없이 끼어들어서 이 고생을 하니, 글쎄.”

라며 아이의 쓸모없고 융통성 부족한 정의심을 비판하는 어머니들 속에서 아이들은 오늘도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야, 가자.”

아이들이 우르르 교실을 빠져나가는 와중에 병억만 축 처진 어깨로 가방을 싸고는 어깨에 둘러멨다. 그 날 이후, 병억은 말수가 급격히 줄었다.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고, 병억도 등교 이후부터 하교할 때까지 누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사소한 이유로 시비를 거는 일도 없었다.

“역시 자기도 당해봐야, 아! 내가 함부로 하면 안 되는구나, 느낀다니깐.”

“참교육각이었다. 인정?”

“인정!”

하지만 병억이 기가 죽은 듯 보이는 이유는 단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당한 기억 때문만은 아니었다.

“윤병억 학생 맞지?”

“네.”

“우리가 왜 왔는지 알아?”

“······.”

“듣기로는 너도 그 당구장에 자주 왔었다고 들었다. 맞지?”

“······.”

“혹시 그···아는 게 있니?”

“없어요.”

“아무것도?”

“네.”

장 형사는 수첩을 펼쳤다.

“깨어난 학생들 말로는 운종이라는 녀석이 너희들한테 시킨 게 있다고 하던데?”

병욱은 다른 이야기보다, ‘깨어난 학생’이라는 단어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시킨 게 뭐지?”

“······.”

병욱과 장 형사의 대치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너무 우스운 거 아닙니까?”

“뭐가?”

“애들 말입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고 있으니.”

병억은 시킨 대로 하지 않으면 운종이 자신을 때려죽였을 거라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했노라고 말했다.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이다.

“말 같지도 않은데, 그걸 믿는다니까, 애들은.”

“도대체 왜 그걸 믿는 거죠?”

장 형사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진짜니까.”

“네?”

“도하인가 하는 녀석이 했던 말 기억 안 나? 살인이 별거냐고. 그 아이들은 진짜로 죽일 수도 있었던 거겠지.”

“에이, 설마요.”

“그러니 이런 사건도 벌어진 거 아니겠어?”

후배가 바라보더니 물었다.

“그럼 범인이 또래 아이들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봐야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범행 도구가···.”

확실히 현재 이 사건의 가장 큰 방해물은 증거물의 행방이었다. 운종을 죽인 범행 도구는 물론이고, 다른 아이들을 한순간에 기절시킨 방법 혹은 도구가 무엇인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는 것이다. 증거가 나오지 않다 보니 수사 방향 자체가 마구잡이식으로 뻗어 나가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장 형사가 살해된 일진 학생의 모임에 참석한 학생들의 주변 관계를 살피고 있는 동안, 다른 팀은 운종의 가족 관계와 부모님의 주변 인물을 탐색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솔직히 그쪽도 의심스럽긴 하던데.”

운종의 가족은 잘사는 편이었다. 그냥 잘 사는 게 아니라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정도였다. 그런데도 운종은 아이들에게서 삥을 뜯거나 비싼 물건을 갈취하는 범죄행위를 지속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런 운종네 집의 부는 아버지가 사업으로 큰돈을 벌어들인 까닭인데, 그 사업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많은 적이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들을 건드리기야 하겠습니까?”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하고, 수상한데. 별의별 인간이 다 나오는 판국이잖아?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수사하는 수밖에.”

하지만 장 형사는 느낌상, 이 사건은 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졌다.

****

반 아이들이 학교에 남아 봉사 활동이라는 명목의 대청소를 하고 있을 때, 단유네는 피시방으로 향했다.

네 명이 자리를 잡고 앉아 게임을 켰고, 명수는 단유에게 게임을 가르쳐주었다.

“너 왜 이렇게 답답하냐?”

명수가 가슴을 치며 단유를 타박했다.

“미안.”

단유는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가리켜 보였다.

“이게 마음대로 안 되네?”

“조금만 움직여야지. 적이 여기서 여기로 이동하면, 너도 마우스로 이만큼만 움직여야 하잖아? 그치?”

“응.”

“그런데 여기서 여기까지 거리가 있으니까, 네가 먼저 쏴야 상대에게도 맞을 거 아냐? 그렇지?”

“그런데 아무리 거리가 있다고 해도, 이 총의 표제 속도대로라면 초속 10㎧라는 건데, 그러면 이 정도 거리는 쏘자마자 맞아야 하는 거리야. 내가 먼저 쏘면 탄환이 먼저 지나가고 말걸?”

“아, 몰라. 그런 건 현실에서나 그런거고, 여기는 봐봐. 총알 날아가는 거 보이지? 이 총알이 여기에 박히려면 네가 대략 0.2초에서 0.5초 정도 빠르게 마우스를 눌러야 한다고.”

“0.2초와 0.5초를 구분한다고?”

“아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명수가 가슴을 치며, 지태를 돌아보았다.

“야, 나 답답해서 못 하겠다. 네가 해라.”

“난 편하게 게임 하련다. 말 걸지 마라.”

“그럼 단유는?”

“깍두기. 어차피 상미 오면 바꿀 건데.”

마침 상미가 나타나 네 아이 뒤로 모습을 드러냈다.

“벌써 시작했어?”

“야, 너 단유랑 자리 바꿔라.”

“왜?”

“단유 너무 못해.”

“야, 못 한다고 그러면 안 되지. 될 때까지 하자, 우리가 한 달 동안 계속 들은 이야기 아니니?”

시험공부 기간에 아이들이 지쳐 쓰러지고 무너질 때마다 단유가 ‘조금만 더 하자’, ‘될 때까지 해야 후회하지 않는다’, 고 응원(?)과 격려(?)를 쏟아붓던 사실을 상기시킨 상미의 말에 지태가 인상을 찌푸렸다.

“야, 내가 그 이야기 들을 때마다 스팀에 연기 날 뻔했어.”

“스팀이 연기라는 뜻이야.”

지태는 ‘아몰랑’ 하며 팔을 내저었다.

“야, 대충 좀 들어. 아무튼, 단유 쟤는 진짜 공부 빼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니까. 아, 운동도 좀 하나? 아무튼, 보고 있으면 답답해서 미쳐.”

상미는 단유의 뒤에 서서 바라보았다.

단유가 방향키를 조정하여 총구의 방향을 적에게 놓는데, 절대 함부로 쏘지 않았다. 화면에 나타난 십자가가 적의 몸에 정확히 맞을 때까지 누르지 않는다. 그러나 끊임없이 움직이는 적의 움직임 때문에 단유는 사격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있다 보면 단유 자신이 맞추기 좋은 표적용 마네킹이 된다. 어느새 탄환이 날아와 ‘헤드샷’이라는 문구를 남기며 단유의 화면을 잿빛으로 물들였다.

“단유야, 화살표가 적당히 맞다 싶으면 바로 눌러야지.”

“정확히 몸에 맞아야 쏘지.”

“쏘다 보면 맞아.”

“그럼 탄환 낭비야.”

“···나 참. 뭐 캐시로 총알 사서 쓰니? 어차피 게임하면서 나오는 총알 먹으면 되잖아?”

“그런 게 아니라 무의미하게 빗나가는 총알이 없어야 한다는 소리야.”

“그게 뭐가 중요해?”

“게임이라 해도, 사람은 효율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어. 낭비는 결코 효율적인 행위가 아니야.”

상미는 각자의 모니터에 빠져 있는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얘 왜 이래?”

“아까부터 그랬어.”

“얘 누가 데려왔어? 너 집에 가서 책 읽어.”

“안 돼.”

명수가 반대했다.

“왜?”

상미의 물음에 명수가 단유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물주야.”

상미가 얼른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 물주님. 죄송합니다. 원하시는 대로 하시지요.”

단유가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빙글 돌렸다. 다리도 꼬았다.

“뭐가 필요해?”

“라면 한 사발이면 감지덕지하옵니다.”

“먹어.”

“저도 먹어도 됩니까?”

눈치 보던 지태가 고개를 쭉 뻗으며 물었다.

“먹어. 채윤이 너도.”

“감사합니다. 물주님.”

신나게 라면을 주문하는 친구들이었다. 게임보다, 이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기쁘고 재밌다.

‘그런데 게임은 영 내 체질이 아니야.’

마우스를 움직이고 키보드를 눌러서 모션과 제스처를 제어하는 방식이 단유에겐 익숙하지 않았다.

“상미도 왔으니까, 너희끼리 해.”

“넌?”

“난 이만 갈게.”

“혼자?”

“나 일 있다니까.”

명수가 그 말뜻을 알아채고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알았어.”

아직 다른 아이들은 단유가 번역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다만 자기들이 모르는 아르바이트를 비정기적으로 하는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을 뿐이지만, 단유나 명수는 굳이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줄 생각이 없었다.

“계산하고 갈게.”

“땡큐!”

“고마워 단유야!”

아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피시방을 나선 단유는 집으로 향했다. 어차피 번역일은 며칠 전에 끝내서 메일로 보낸 상황이라 손댈 게 없었다. 다만 내일 회사로 찾아가기 전에 자신의 스케줄을 한 번 조정해서 일을 줄일 생각이었다. 6개월간 3권의 책을 완역했는데, 이는 번역 회사에서도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라고 했다. 첫 번째 책은 가게에 나왔으나 두 번째 책은 아직 감수도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세 번째 책까지 완역이 되어서 제출된 상황.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일이라면 계속 이 정도 페이스로 작업했을 때, 대기업 초임 연봉 이상도 벌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목적도 아닐뿐더러, 단유 스스로 자신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3학년 한 학기가 단유 본인에게는 이제껏 없던 혼란의 시간이었고 그 정점이 며칠 전의 사건. 남들 보기에 편안할지 몰라도, 드러나지 않는 단유의 속은 진도 9.0의 지진에 무너진 도시 같은 혼돈 그 자체였다.

그러나 상황은 단유가 생각한 것처럼 평탄하게 흐르지 않았다.

“김단유군?”

집 앞에서 단유는 두 남자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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