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상(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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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미는 여름이란 계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땀이 나기 때문이었다. 친구 중에도 땀 흘리는 걸 싫어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피부가 민감해서 땀이 흐르면 피부염이 자극을 받아 난리가 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미의 경우는 그것과 달랐는데, 그냥 땀이 흘러내리는 느낌이 불쾌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여름에는 되도록 집 안에만 있으려 했고, 그런 ‘어쩔 수 없는’ 이유로 게임을 즐기는 시간이 늘었다.
물론 겨울도 싫긴 마찬가지였다. 이유야 뭐, 대충 추워서, 라고 해두자. 아무튼, 그래서 날이 더워지면 상미는 당연하다는 듯 고민에 빠진다.
‘이번 여름에는 어떤 게임을 하지?’
새로 나온 게임 타이틀이 있는지 검색도 해보고, 온라인 게임 유통 시스템 ‘스팀’에서 여름 세일을 할 때 살만한 게임도 찾아서 ‘찜’을 해 놓는다.
오늘도 상미는 한 달도 남지 않은 기말고사를 걱정하는 대신, 핸드폰으로 게임 커뮤니티에 들어가 할 만한 게임을 물색했다.
“이건 평가가 좋네. 체크.”
게임 평가 댓글에 빠져 정신없던 와중이었다. 뒤에서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려는 찰나, 휙 하고 지나가나 싶던 키 작은 남자아이가 상미의 손에 들렸던 핸드폰을 낚아챘다. 그리고 달리던 방향으로 내뺐다.
“어?”
상미가 잠시 얼이 빠진 틈에 남자아이는 빠르게 달려나가기 시작했고, 뒤늦게 상미가 정신을 차리고 뒤쫓았을 때는 저 멀리 앞서나가고 있었다.
관자놀이 옆으로 스크래치를 새긴 남자아이가 뒤를 돌아보니, 과연 상미가 붉어진 얼굴로 쫓아오고 있었다. 울면서 주저앉으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 상미는 잘 쫓아왔다. 그냥 잘 쫓아 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야, 이 개새끼야! 거기 안 서!”
피식, 웃음을 지으며 스크래치는 적당한 속도로 간격을 유지했다.
“야, 이 씨발 놈아! 거기 서라고, 새끼야!”
생긴 것과 다르게 입이 꽤 걸었다. 그래도 그 정도는 같이 노는 아이들과 비슷한 수준이다.
“난쟁이 똥자루 새끼야! 안 서면 죽인다!”
···조금 듣기 거슬리긴 하지만, 그런다고 멈추면 바보다.
“야 이 대가리 새끼야!”
···자신의 머리가 조금 크긴 하다. 귀가 괜히 간지럽고 뒷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이었지만, 참았다. 그나저나 달리면서도 숨이 차지 않는지 잘도 떠든다.
“개시부랄호로잡놈의 새끼야!”
저도 모르게 달리기를 멈출 뻔했다. 생긴 건 예쁘장하고 여리여리하게 생겼던데 반전이다. 보통 반전이 아니라, 욕 나올 것 같은 반전이다.
“똥통에 밥 같은 새끼야! 대낮에 할 일이 없어서 핸드폰이나 뽀리고 다니냐, 병신 존만아!”
···아, 뭐 저런 여자애가 다 있어? 슬슬 머리에 열이 난다. 뜀박질을 멈추고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욕이 입 끝에서 살살 맴돈다.
“돼지 오줌물에 밥 말아 먹을 병신 새끼야! 난쟁이 존만한 새끼야!”
“아, 놔!”
결국 스크래치는 달리다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씨발, 듣자 듣자 하니까 존나 싸가지 없네? 야 이 년아! 내가 키가 얼마든 니가 무슨 상관인데, ×년아!”
땀이 가득한 얼굴을 잔뜩 구기며 돌아선 스크래치에게 겁 없이 달려드는 상미.
“내 핸드폰 내놔, 병신 쪼다 새끼야!”
“아, 씨발, 엿 같아서 못 해 먹겠네. 야, 야! 너 내가 몇 살인 줄 아냐? 몇 살인데 반말지거리야!”
핸드폰을 집어 던질 듯한 자세를 취하는 스크래치의 험상궂은 얼굴과 마주한 상미는, 그제야 더 가까이 가지 않고 멀찍이서 소리만 빽 질렀다.
“내가 니 나이를 어떻게 알아! 내 핸드폰이나 내놔, 개새야!”
“와, 저게 계속 사람 빡치게 만드네. 야, 내가 니 새끼야? 응? 내가 니 새끼냐고?”
“닥치고 내 핸드폰이나 내놔, 도둑놈 새끼야!”
한참 뒤에서 쫓던 우성은 이마를 감쌌다. 도대체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고작 욕 몇 마디 먹었다고 이 시점에서 깽판을 치나.
“아니, 이 년이 미쳤나? 씨발, 입에 걸레를 쳐 물었어? 응?”
“걸레를 쳐 물든 말든, 니 아가리 찢어버리기 전에 내 핸드폰이나 내놔!”
“진짜 이 년이!”
스크래치는 눈을 뒤집고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높이 쳐들었다. 상미도 지지 않겠다는 듯 눈에 힘을 주고 끝까지 스크래치를 노려 보았다.
그때 골목 끝에서 쌩하고 달려온 자전거가 스크래치를 향해 돌진했다. 자전거가 미칠 듯한 속도로 달려오는 것을 본 스크래치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릴 즈음, 자전거를 타고 있던 덩치가 풀쩍 뛰어서 스크래치를 덮쳤다. 갑자기 그렇게 덮쳐 올 줄은 몰랐던 스크래치는 덩치와 함께 바닥을 구르며 넘어졌고, 그 틈에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명수야!”
상미는 달려든 덩치가 명수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갑자기 나타난 것도 놀랍지만, 심하게 바닥을 구르며 신음도 냈기에―정확히는 명수인지, 스크래치인지 모르겠지만, 소리가 났던 것은 사실이었다―혹시 크게 다친 게 아닐까 싶어 명수에게로 뛰었다. 그때 명수가 벌떡 일어나 함께 구른 스크래치를 위에서 눌렀다. 멱살을 잡고 조르며 소리 지르는 명수.
“이 개···.”
명수의 욕설은 한참을 이어졌고, 그동안 스크래치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갔다.
“명수야, 그만해. 이러다 진짜 죽겠어!”
너무 심하게 멱살을 조른 터라 숨을 쉬지 못할 정도였던 스크래치는 상미가 명수를 말린 탓에 가까스로 풀려났다. 상미가 명수를 붙잡고 일으켜 세운 뒤, 스크래치는 몸을 모로 눕히며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다. 필사적이다 싶을 정도로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미는 명수를 살폈다.
“괜찮아? 어? 너 머리에 피난다.”
“어? 피?”
명수가 이마를 짚은 손을 내려 보니 손가락 끝에 피가 묻어 있었다.
“어, 피다.”
“어떻게 해?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냐?”
상미가 발을 동동 굴렀다.
“많이 피나?”
“응. 많이 나.”
“안 아픈데?”
“그래도 병원 가자.”
상미는 명수의 팔을 잡아당겼다. 명수는 끌려가는 대신 널브러진 자전거를 보며 말했다.
“내 자전거 챙겨야 하는데.”
“내가 끌고 갈게.”
상미가 명수와 명수의 자전거를 챙겨 급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뒤에서 쳐다보던 우성은 발을 세게 구르며 방법을 모색해 봤지만, 지금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아, 씨발. 이거 어떡하지.”
약속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선배들을 다시 부른다고 해도, 그 선배들이 여기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명수와 상미는 자리를 떠나고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혼자 얼굴을 드러내고 명수를 막는 것도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명수와 상대할 때 상미가 핸드폰으로 신고라도 한다면 큰일이 나겠다 싶어서 섣불리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아, 진짜 왜 갑자기 저 새끼가 튀어나온 거야.”
우성의 투덜거림에 대답이 이어졌다.
“우리 동네니까.”
우성은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천천히 돌아보니 단유가 자전거를 벽 옆에 세우고 있었다.
“여긴 왜 온 거냐, 유우성.”
“······.”
“설마 상미 때문에 온 거야?”
“······.”
우성은 대답 대신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만으로도 단유에겐 충분했다.
“내가 그때 말했을 텐데. 내 친구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 그래서 어쩔 건데!”
저도 모르게 물러서고 있는 우성이었지만,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했다.
“내가 최근에 느낀 게 있는데 말이야, 모든 일에는 발아라는 과정이 있더라고.”
무슨 뜻이지?
“착한 씨앗은 꾸준히 물을 주고 애정을 가져주지 않으면 싹을 틔우지 못하고 말라 죽거나 자라더라도 금방 시들어 버려. 그런데 못된 씨앗은 물도 안 주고 될 대로 되라고 방치해도 혼자서 싹을 틔우고 자라서는 주변으로 못 된 씨앗을 퍼뜨리더라.”
단유가 한 걸음 다가왔다.
“내가 최근에 그 못된 씨앗을 그대로 뒀을 때, 어떤 결과가 만들어지는지 몸소 체험했거든? 그래서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씨앗을 거둬볼까 해.”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네. 꺼져 새끼야. 난 그냥 갈 테니까!”
우성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단유는 멈추지 않았다.
“오지 말라고, 새끼야!”
“조용히 해. 여기서 소리 지르면 사람들한테 민폐니까.”
아까 니 친구는 이보다 더 크게 소리 지르고 욕했다고, 새끼야!
“오지 마, 오면 가만 안 둔다.”
“가만두지 마. 나도 너 가만 안 둘 거니까.”
뭔가 심하게 꼬였다. 우성은 급히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여기로 좀 와주세요, 얼른요!”
―왜? 무슨 일인데?
“여기, ···앗!”
갑자기 뭔가가 쓱 지나갔다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바닥에서 두 번 튀어 오른 핸드폰은 액정이 거미줄처럼 금이 가며 전원이 꺼졌다.
“어? 뭐야?”
줄곧 단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우성이었다. 뭔가를 던진 것도 아니고 손을 뻗은 것도 아닌데 갑자기 핸드폰을 치고 지나간 뭔가가 있었다. 그런데 그 ‘뭔가’에 대한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우성은 오싹한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너···무슨 짓 한 거야?”
“무슨 짓? 뭘 말하는 거지?”
시치미를 떼는 단유의 모습이었지만, 우성은 아무것도 지적할 수 없었다.
“나 그냥 갈 거니까, 따라오지 마.”
“그냥 가게 내버려 둔대? 그런 말 있더라? 올 때는 네 맘대로 왔지만, 갈 때는 네 맘대로 갈 수 없다고.”
“무슨 개소리야!”
“병억이 건도 네가 한 짓이지?”
불시에 급습한 질문에 우성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었던 거야?”
“그, 그런 거 없어, 새끼야!”
“네가 꾸민 거야?”
“아냐!”
“음, 아니구나. 그럼 다른 사람이 또 있다는 소리네.”
“모, 모른다고 했잖아!”
“아니라고는 말 안 하네.”
“아, 아니야.”
“늦었어.”
“···씨, 씨발.”
이미 굴욕스러웠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 고 생각한 우성이 태도를 바꿨다.
“난 모르겠고, 너랑 할 말도 없어, 새끼야. 그러니까 넌 그냥 네 갈 길이나 가.”
“내가 가는 길에 네가 서 있는데?”
“비켜 가면 될 거 아냐!”
“다른 사람에게도 방해가 될 거 같으니까, 그냥 내 손으로 치우는 게 좋을 거 같아.”
“뭔 개소리야!”
부리부리한 눈으로 단유를 노려보려 하지만, 저도 모르게 눈에 힘이 빠지고 시선을 피하고픈 충동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우성이었다.
그때 좁은 골목으로 경광등을 빛내며 들어오는 순찰차가 우성을 살렸다. 단유가 시선을 돌린 틈에 우성은 빠르게 몸을 돌려 내뺐다. 단유가 우성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 때, 순찰차가 멈추며 경찰이 내렸다.
“네가 여기서 소란 피운 거야?”
아마도 이 근처에 사는 사람이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경찰이 도착했음을 알았는지 빼꼼, 고개를 내밀고 구경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 전에도 몰래 구경하고 있었겠지만 괜히 눈에 띌까 두려웠던지 모습을 가리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걔는 방금 온 애고, 방금 도망간 애가 한 패거리예요.”
누군가가 전화기를 흔들며 말했다. 아마 저 핸드폰으로 상황을 찍고 있었던 모양이다.
단유는 다시 우성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같은 ‘패거리’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어 텅 빈 골목이었다. 명수에게 전화해서 어디인지 물어봐야 할 거 같다.
‘아, 그러고 보니···.’
자신이 수습해야 할 것들이 몇 개 있었다. 본인 자전거와 상미의 핸드폰, 그리고 우성이 떨구고 간 핸드폰. 단유는 허릴 숙여 발밑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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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다친 사람은 너거든?”
“네가 오버해서 병원에 온 거지, 사실 여기 올 정도도 아니었거든?”
명수의 이마에는 작은 밴드 하나만 붙어 있었다.
“그래도 병원에 왔으니까 약이라도 바르는 거지. 나 아니었으면 너 머리에 흉 졌어.”
“이 정도는 흉 질 것도 없거든?”
상미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명수의 이마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명수가 괜히 헛기침하며 말했다.
“금방 단유 올 거야. 걔가 네 핸드폰도 챙겼대.”
“아, 그래? 다행이다. 아무튼 이상한 놈이야. 백주 대낮에 핸드폰 소매치기나 하고.”
“네가 약해 보여서 그랬겠지. 하여튼 요즘 세상이 너무 험해.”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입에 담아보는 명수의 태도에 상미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고, 고맙긴 뭘. 친구끼리.”
“그래도 고마워.”
“고, 고마우면···보답해.”
“보답? 원하는 거 있어?”
“아니, 뭐 딱히 원하는 건 없는데, 그래도 준다면 거절은 안 할게.”
“그럼 말이야. 내가 아까 봐둔 게 있는데 그거 줄까?”
“그게 뭔데?”
“이번 여름에 세일하면 사려고 찜해뒀던 게임. 나중에 세일하면 너한테도 하나 선물할게.”
명수는 물끄러미 상미를 보다 히죽 웃었다.
“그래.”
그다지 개운해 보이는 웃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