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상(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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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미가 내리는 정류장에서 우성과 패거리는 가장 마지막에 내렸다.
“존나 덥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신경질을 부리든 말든, 우성은 상미가 걸어가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미는 핸드폰을 보며 걸어가는 중이었다.
“다행히 혼자네요.”
“그럼 가자.”
“잠시만요. 여기는 보는 사람이 많아서 힘들 거 같은데.”
“그럼 어쩌자고? 계속 뒤에서 구경이나 해? 엉덩이 구경이 취미냐?”
질 낮은 개그는 무시하고 우성은 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살피며 적당히 일을 벌일 만한 장소를 물색했지만, 그런 장소가 쉽게 눈에 띌 리가 없었다.
“언제까지 가는데?”
“여기선 일을 벌이기 힘들잖아요. 만약 쟤가 소리라도 지르면 사람들이 돌아볼 테고 그러다 누가 신고라도 하면 어쩌게요.”
“그럼 신고 못 하게 핸드폰이라도 뺐을까?”
그 순간에 우성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걸음을 멈췄다.
“왜?”
“좋은 생각이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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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단유 담임인 임희선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두 아이의 보호자 역할을 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시겠어요.”
“수고는요. 두 아이 모두 자기 일을 알아서 잘하는 스타일이라 별로 신경 쓸 일이 없답니다.”
“두 아이 모두요?”
“뭐, 한 명은 손이 많이 가는 편이지만, 특별히 사고를 치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하긴 사고는 다른 쪽이 많이 냈었죠.”
하은은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본인 입으로 흉보는 건 괜찮아도, 남의 입으로 흉을 듣는 건 별로 원치 않는다.
“그래도 워낙에 바르고 똑똑한 아이잖아요? 모범생의 표본 같달까?”
“그럼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만장일치로 반장으로 뽑은 거겠죠.”
희선은 적당히 맞장구쳐주며 하은을 강당으로 안내했다. 이미 도착한 학부모들이 얼굴을 구긴 채 기다리고 있었는데, 희선은 그들에게 하은을 소개했다.
“아, 김 단유 학생 보호자요?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듣자니 학원 선생님 일을 하고 있다던데, 혹시 어떤 학원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무려 3년간 전교 1등을 하고 있는 단유의 보호자이며 ‘선생님’이다. 분명 자신들이 잘 알지 못하는 특별한 교수법이 있을 것이라 여긴 학부모들은 그녀가 다니는 학원을 궁금해했다.
“저는 고등학교 수학반을 가르치고 있는데요?”
“잘됐네요! 마침 저희 큰아들이 이번에 고 2가 되는데, 수학을 워낙 어려워하거든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전 문과반 수학을 맡고 있어서.”
“저희 아들도 문과예요.”
생각지도 못한 학원 홍보를 하게 된 하은이었다.
시간이 지난 후, 특별한 사정이 있어 참가하지 못한 두 학생의 학부모를 제외한 대부분의 관련 학생 학부모가 참석했다.
“조금 전에 에어컨 틀었으니까 잠시만 참아주시면 곧 시원해질 거예요.”
희선이 그렇게 양해를 구한 뒤, 생활지도부 선생님이 강당 앞으로 나와 소개를 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번 일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의 부모가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의 말을 잘랐다.
“제 아이에게 듣기로는 반장이 폭행을 당하는 걸 막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했다는데, 정당방위로 봐야 하지 않나요?”
“그게···.”
“저희 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솔직히 반 아이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반장인 김단유 군이 곤란한 상황에 놓일 수 있었을 거라고 하던데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사람은 하은과 담임 선생님뿐이었다. 하은이야 단유가 그리 쉽게 곤란해지지 않을 거라는 걸 믿기 때문이었고, 희선은 눈앞에서 맹수처럼 사납게 달려드는 병억을 손쉽게(?) 메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생지부 선생님은 헛기침을 한 뒤, 소란스러운 학부모들을 진정시켰다.
“예, 그런 의도였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다수의 학생이 한 학생에게 린치를···.”
“보세요, 선생님! 린치라뇨! 말씀 조심하세요!”
“우리 애가 무슨 조폭이에요? 선생님이란 분이 그렇게 쉽게 말하면 안 되지 않아요?”
생지부 선생님이 땀을 닦아내며 희선을 돌아보았다.
“에어컨 틀었어요?”
“네, 선생님.”
“그런데 왜 이렇게 더워.”
라고 중얼거리며 선생님은 다시 마이크에 입을 댔다.
“저기, 잠시, 잠시만 제 말 좀 들어주세요. 네, 네, 어머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는데요, 일단 말씀 좀 들어주시겠어요? 제 표현이 잘못되었습니다. 예, 죄송합니다. 아무튼, 다수의 학생이 한 학생을 상대로···한 일은 그냥 넘어가긴 어렵습니다. 비록 그 학생이 최초의 폭력 사건의 가해자였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하얗고 파란 투 톤 스카프를 목에 두른 중년 여성이 손을 들어 보인 뒤, 누가 뭐라 하기 전에 스스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우리 아이가 잘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폭력이라는 극단적 행위가 눈앞에서 벌어지는데 구경만 할 수는 없지 않나요? 듣기로는 병억이라는 아이가 싸움을 잘하는 아이라면서요? 다른 아이들도 그렇겠지만, 저희 아이는 싸움이라고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아이예요. 그래도 그 아이가 그 싸움판에 끼어든 건, 바로 정의감 때문이에요. 불의를 참지 못한 거라고요.”
중년 여성의 이야기에 동조하는 어머니들의 외침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어요? 힘도 약하고 싸울 줄도 모르니 가만히 있을까요? 차라리 가만히 있었다면, 어미로서 마음은 편했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 아이는 정의감 때문에, 양심 때문에 움직였던 겁니다.”
정의감과 양심. 비판하기 힘든 명분을 내세운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가 먼저 의자를 집어 던졌다면서요?”
“맞아요! 우리 아이가 맞았다고 했어요!”
스카프를 두른 학부모는 맞장구를 쳐준 어머니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가 돌아왔다.
“피해자가 늘어날 게 보이는 상황에서 단지 몸을 움츠리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요? 아니면 몸을 사려서 도망이라도 쳤어야 한단 말인가요? 다 도망치고 나면 교실에는 반장만 남을 텐데요? 곤경에 처한 사람을 두고 떠나라고 가르칠 생각은 아니시죠?”
하은이 남몰래 혀를 내두르며 그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말본새를 보아하니 어디서 한자리라도 하는 어머니가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지금 다들 놓치고 계신데요.”
고개를 돌려 여기저기에 시선을 던지던 어머니는 여유롭게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학교 아닌가요? 학기 초부터 말썽이었던 아이를 그대로 방치한 것은 물론이고, 학급의 반장이 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관계없는 아이들이 피해자가 되기 직전의 상황에 놓이도록 학교는 도대체 무엇을 한 건가요?”
‘맞아요, 맞아!’ 동조의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지금 이 순간까지 학교로부터 사과의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 계세요? 아무도 안 계시죠? 학교가 이렇습니다. 이 사태를 오로지 학생의 책임으로만 떠넘기려는 학교 측의 부당한 태도에 대해 저는 심히 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하은이 바라보니, 강당 앞 단상 위에 올라선 생활지도부 선생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학교는 학생들의 진학에 큰 영향을 미칠 생활기록부를 주무를 수 있다. 그런 점만 보면 당연히 학부모들은 학교의 눈치를 봐야 할 거 같지만, 현실은 반대다. 오히려 학교가 학부모들의 눈치를 보며 바짝 엎드려야 하는 현실. 힘의 역학 관계란 그래서 오묘하고 재미있다. 과연 학부모들과 그들의 자녀는 어떤 역학 관계를 구성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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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앉아요.”
“네.”
단유는 교장실에 오면 늘 앉던 그 자리에 앉았다.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번씩 방문하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진 교장실이었다. 그 사이에 여러 가구와 집기들이 바뀌면서 이전 교장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몸은 어때요?”
“괜찮습니다.”
“다행이에요.”
교장은 마주 앉아서 양복 앞 단추를 풀고 편한 자세를 취했다. 여유로움은 교장의 미소에서 잘 드러났다.
단유는 교장이 교실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자신을 불렀다고 생각했다. 과연 교장이 입을 떼고 뱉은 첫 마디는 그 일이었다.
“학교에서도 참 난감해요.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 말이죠.”
“벌어질 일이었어요.”
“벌어질 일?”
“제가 매 학년마다 겪은 일이었어요. 제가 직접 겪을 때도 있고, 간접적으로 보거나 들은 일이었죠. 하지만 학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요. 그때마다 학폭위만 열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학교 폭력이란 건 습관 같은 거예요.”
“습관이라. 학생들이 어릴 때부터 그런 습관을 고치지 못해서 그렇다는 말인가요?”
“아뇨. 이 사회가 가진 습관이요. 힘으로 해결하려는 습관, 폭력으로 힘을 과시하는 습관. 힘으로 위계질서를 세우고 정렬시키려는 습관 같은 거요.”
교장은 계속해 보란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폭력은 대물림 되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가정 폭력, 학대가 아이들을 폭력에 익숙하게 만들고, 그 아이가 자라 또 다른 가정 폭력과 학대를 낳는다고요. 그래서 학교에서도 그런 대물림을 막기 위해 교사의 체벌을 막은 것이라고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학생들이 보는 것은 단지 교사와 학부모만이 아니거든요. 이 사회가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민낯이 어떤가요? 대물림된다면 바로 이 사회로부터 직접 대물림받는 것이고, 계승한다면 바로 이 사회의 관습으로부터 계승된 폭력일 거라고 생각해요. 점점 잔인해진다느니 하는 말은 결국 이 사회가 점점 더 잔인해지고 있는 탓이 아닐까요?”
“꽤 열심히 궁리한 모양이구나.”
“아무래도 반복된 현상의 관찰은 그 원인을 탐구하게 만드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한쪽 다리를 절면서 걷는 것을 보게 되면, 왜 저렇게 절면서 걸을까 궁금해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그래서 학교의 역할이 중요한 거고 교사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지. 무엇이 옳다, 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 생각하게끔 돕는 게 이 나라의 교육이어야 한다.”
또 한 번 교장 선생님의 교육관을 엿볼 수 있었다.
“폭력을 행사하면 안 된다, 는 게 아니라 폭력을 행사하면 왜 안 되는가를 궁리해야지. 하지만 그 선택까지 학교가 좌우할 순 없다. 선택은 순전히 자유의지니까. 다만 학교는 최대한 사회에 유리한, 공리적 선택을 하게끔 유도할 뿐이다.”
교장 선생님은 스스로의 말을 되뇌며 고개를 끄덕인 뒤, 단유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건 아닌데 이렇게 됐구나.”
그리고 짧게 웃음소리를 낸 뒤, 몸을 돌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서류 하나를 집어 단유에게 건넸다.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IMO) 초청장이다.”
단유가 받아들고 바라볼 때, 교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웬만하면 이런 시기에 발표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쉽게도 이렇게 되었구나.”
단유는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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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의 계획은 상미가 들고 있는 핸드폰을 뺏는 것이었다. 뺏어서 달아나면 상미가 쫓아올 테고 적당한 곳까지 유인한 뒤, 그곳에서 상미를 어떤 방법으로든 납치해서 선배들에게 데려가는 것이었다.
“오오, 괜찮은데?”
“대신 그 아이가 쫓아올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돼요. 너무 멀리 떨어지면 아예 쫓는 걸 포기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네가 해야겠다. 네가 우리 중에서 달리기 제일 잘하잖아?”
“내가?”
“그럼 선배가 해 주세요.”
“난 여기 지리 잘 몰라.”
“이쪽 길로 가면 공원 하나 나오는데, 거기에 사람들 잘 안 오는 곳이 있어. 길 따라 그냥 죽 가면 돼. 우린 미리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붙잡으면 돼요. 오케이?”
“너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예전에 저 동네에서 산 적이 있었어.”
우성은 손바닥을 짧게 마주쳐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럼 형 말대로 하죠. 형들은 먼저 가서 기다리고, 형은 뺏어서 오세요.”
“넌?”
“저는 형 뒤에서 쫓아가면서 상황이 어떻게 변하는지 봐야죠.”
“너만 꿀 빠는 거 아냐?”
이 상황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올까. 우성은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시작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