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04화 (504/956)

미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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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을 하자’고 했지만, 말을 꺼낸 후에도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들이 납치를 밥 먹듯 하는 전문 납치범도 아니었고, 놀이동산 롤러코스터 타본 경험 자랑하듯 말할 경험도 전무한 상황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납치’는 고작해야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모방하려 해도 힘든 게, 납치를 하려면 ‘차’가 있어야 하는데, 차가 없는 건 물론이고 운전을 할 줄 아는 아이도 없었다.

“술 먹자고 꼬셔볼까?”

여태 놀았던 아이들은 그렇게 꼬셨을지 몰라도, 눈앞에 보이는 여자애는 그런 쪽과 거리가 먼 아이였다. ‘미친놈’ 소리 듣고 뺨이나 맞지 않을까?

“잘됐네. 뺨 맞으면 그걸로 시비 걸어서 끌고 와.”

우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도 머리 쓰는 걸 싫어하지만, 이 형들은 정말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다.

“말로만 떠들지 말고, 일단 해 봐. 우리가 언제부터 이빨만 털었어?”

머리를 짧게 깎은 소년이 건들거리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교문을 빠져나오던 상미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며 다들 심장이 쿵쾅거리는 긴장감을 느꼈다.

“야, 너 시간 있냐?”

상미와 상미 주변의 아이들이 멀뚱히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뇨.”

상미는 무시하고 지나가려 하는데, 소년이 상미의 팔을 붙잡았다.

“이야기 좀 하자고.”

그때, 학교 주변에서 서성거리던 남자애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소년이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는데, 남자애들 중 한 명이 소년에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 손 놔라.”

“뭐? 너 뭐야?”

“놓으라면 놔, 새끼야!”

목소리를 깔고 짐짓 히어로라도 되는 양 구는 그 남자애 혼자면 코웃음 치며 무시하겠는데, 여러 남자애들이 눈에 칼을 품고 바라보고 있으니 그럴 수 없었다. 슬그머니 상미의 팔을 놓은 짧은 머리는 무시하고 남자애가 상미에게 물었다.

“괜찮아?”

상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팔을 툭툭 털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오빠들도 좀 그냥 가요.”

이들은 상미의 외모에 반해서 방과 후 찾아오는 주변 학교의 남학생들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상미의 외모에 반해서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찾아와 사랑을 구걸하는 자칭 ‘남친 후보’들이자 타칭 ‘껄떡이’들이었다. 그런 이들 앞에서 상미의 팔을 거칠게 붙잡는 모습을 보였으니, 그들의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곱게 말할 때 꺼져라. 상미한테 함부로 하는 놈들은 우리가 절대 용서 못 하니까.”

상미가 듣는 자리라서 최대한 허세 끼를 듬뿍 담아 말을 건네는 남자애는 최대한 상미의 눈치를 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상미의 반응이 궁금해 눈이 계속 돌아간다. 다 알지만, 모른 척하는 상미와 그녀의 친구들은 씰룩이는 입꼬리를 감추려 애썼다.

짧은 머리는 기도 안 차지만, 자신을 둘러싼 남자애들의 험악한 분위기에 쫄아서 뒷걸음질 쳤다. 우성은 멀찍이서 보다가 혀를 찼다.

****

“매년 연례행사구나, 연례행사.”

“죄송해요, 선생님.”

단유가 고개를 숙였다.

“네가 왜 죄송하니? 넌 맞기만 했다며?”

“저 때문이에요.”

명수가 눈꼬리를 내리고 말하자, 하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맞고만 있니? 너도 좀 때리지 그랬어.”

풀 죽어 있는 명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은이 우스갯소리를 꺼내니 단유도 어울려주었다.

“그랬으면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못했겠죠?”

“하긴, 그렇지.”

“그런데 이제 시험 며칠 남지 않았잖아?”

교장 선생님이 따뜻한 찻잔을 들고 웃으며 ‘시간이 빨리 간다’고 푸념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너희 반 선생님도 답답하겠다. 기말시험도 준비시켜야 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져서.”

“그런데 선생님도 내일 오시나요?”

“가야지. 다 오라는데 안 갈 수 있니?”

좀처럼 없던 일이라 학교 측에서도 꽤 골머리를 앓은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유야무야 넘길 순 없는 일이라 절차에 맞춰 일을 진행하기 위해 애를 썼다. 진술서 상에 진술된 증언과 목격 증언을 토대로 당시 사태가 벌어졌을 때 끼어들었던 아이들의 부모들을 모두 불러 상황을 논의하기로 한 것인데, 그게 무려 20명에 이르렀다. 즉, 반의 3분의 2가 폭력 사건에 가담한 셈이다.

억울함을 토로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발뺌하는 아이도 있었다. 병억에게 책임을 돌리는 아이도 있었고, ‘반장’을 지키기 위한 일이었다고 변명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 부분은 모두 학폭위에서 결정할 문제야. 일단 학부모들 모시고 와.”

그렇게 해서 내일 오전, 강당에서 긴급히 학부모 회의가 열리게 된 것이다. 단유는 마지막에 병억을 제압하기 위해 메치기까지 했지만, 그리고 그 메치기가 실질적으로 병억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지만, 선생님들은 그것을 자기 방어로 보았고, 그 전까지는 주먹 한 번 내뻗지 않았다는 학생들의 진술을 토대로 ‘일방적 폭행의 피해자’로 단유를 지정했다.

물론 논란―학교 폭력에서 일방적 폭행은 거의 성립하지 않는다―이 있을 수 있지만, 해당 사건을 구별해야 학부모들 간의 협의―라고 쓰고 합의라고 읽는다―가 쉬워지기에, 학교는 그렇게 입장을 정리했다.

“너희 담임 선생님이 이야기하기로는 나는 별로 할 게 없다더라만, 그래도 영 마음이 편하진 않네.”

하은의 역할은 크다. 다른 부모들과 병억의 부모 간의 문제는 병억 측과 단유 측의 문제가 어떻게 결론 나는가에 영향을 받는다.

“진짜 마음 같아서는 그 자식을 가만두고 싶지 않아요.”

시간이 조금 흘렀고 약도 발랐지만, 여전히 부어 있는 단유의 이마를 보며 명수가 이를 갈았다.

“그럼 못 써.”

“걔가 먼저 우리한테 시비도 걸었고, 싸움도 먼저 시작했는데, 맨날 참으란 말이에요?”

“참은 덕분에 학교의 처벌은 피할 수 있게 되었잖니?”

“그 때문에 단유는 다쳤는데요?”

이번엔 단유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하은이었다.

“에휴. 나도 솔직히 마음 같아선 너랑 다르지 않아. 솔직히 내일 그 아이를 보게 되면 내가 참을 수 있을지도 걱정이야.”

단유는 하은의 손을 끌어내리며 부탁했다.

“선생님, 제발 내일은 성격대로 하지 말아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설마 내가 진짜로 걔를 때리기라도 할 것 같니?”

“네.”

“···그래, 나도 정말 그럴 거 같아. ···어디 때릴 데가 있다고 이 연약한 애를 때려!”

“연약하진 않죠.”

단유의 팔뚝을 가리켜 보이는 명수의 말에 하은은 눈을 좁혔다.

“맨날 공부만 해서 싸울 줄도 모르는 애를.”

“얘가 마지막에 걔를 바닥에 메쳤을 때, 걔 거의 죽으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진짜 그건 언제 배웠대?”

“학기 초에 걔가 썼던 거잖아.”

“와, 그때 한 번 보고 따라 한 거야? 넌 그냥 한 번 보면 다 외우고, 다 따라 하는구나? 역시 단유다!”

제대로 배운 게 아니고 힘으로만 메치다 보니 어설프기 그지없었지만, 효과는 좋았다.

“아무튼 이제 방학 때까지 부디 아무 일도 없길 간절히 바란다.”

단유나 명수도 하은과 똑같은 마음이었다.

****

우성과 그의 선배들은 쪼그리고 앉아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계획을 세우자’고 했지만 역시나 생각나는 게 없다. 하지만 두 번째도 실패하면 그들도 온전히 살아남긴 힘들 것이기에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학교 근처 말고 다른 데서 하는 게 어때?”

학교 근처에는 소위 ‘친위대’라고 불리는 정신 빠진 놈들이 죽치고 있어서 일을 치르기가 어려웠다.

“아까 보니까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가던데요? 일부는 같이 버스를 타기도 하고요.”

“미친놈들이야. 그 새끼들.”

“여자 꽁무니나 쫓는 놈치고 제정신인 놈이 있냐?”

우성은 대화를 자르고 들어가 화제를 돌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그럼 걔가 사는 동네에서 해야 한다는 이야긴데, 그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거기나 여기나 위험하긴 마찬가지지. 걔가 버스에서 내려 집에 갈 때는 혼자일 거 아냐? 그때 하는 게 어때?”

하지만 그에 대한 정보가 전무해서 혼자일지 아닐지, 그 아이의 집이 버스 정류장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일단 내일은 그냥 따라가 보죠.”

“버스에서 얼굴 보면 바로 알아차릴 텐데?”

“넌 내가 따로 연락할 테니까 뒤에 따라와.”

“나만?”

“그래. 너만 얼굴 팔렸잖아?”

“아이 씨.”

한심한 작태를 보이는 선배들을 보니 우성은 처음의 호기가 점점 꺾이는 기분이 들었다.

“잘 가!”

“내일 보자!”

환하게 웃으며 친구들에게 손을 저은 뒤 버스에 올라타는 상미의 뒤로 시치미를 뚝 떼고 올라타는 우성과 그 패거리였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서 힐끔 바라보니, 상미의 주변에는 멀건 얼굴의 남자애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 새끼들은 어디까지 따라가는 거야?”

“할 일 없으면 집에 가서 공부나 할 것이지.”

소곤거리며 떠드는 선배들을 조용히 시키며 우성은 생각했다. 만약 저들이 상미가 집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따라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도 어제보다는 사람 수가 적으니, 어제처럼 무력하게 밀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길에서 싸움이 나면 누가 신고를 할지도 모른다.

‘빠르게 치고 빠질 필요가 있어.’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차가 멈췄다. 그리고 새로 타는 사람들로 인해 버스 앞이 부산스러웠다. 우성은 옆에서 비집고 들어오는 아주머니에게로 시선을 빼앗겼다. 등이 굽은 중년의 아주머니는 허름한 옷차림으로 한 손에 무거운 짐이 든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학생, 조금만 옆으로 가지?”

같은 말도 없이 엉덩이로 밀고 들어오는 아주머니에게 인상을 쓰며 쳐다봐야 좋은 소리 듣기 힘들뿐더러 소란만 날 뿐이리라. 그 아주머니가 아니더라도 새로 탄 사람들이 워낙 많아 우성과 그 패거리는 불가피하게 버스의 뒤쪽으로 게걸음을 걸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상미와 가까워진 패거리였다. 얼굴이 팔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버티려 해도 밀고 들어오는 이들이 워낙 많았다.

다시 차가 출발하자 몸이 앞뒤로 심하게 흔들렸다. 겨우 몸을 고정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이 여간 많은 게 아니었다. 여름에 가까워지는 계절답게 날도 더웠다. 원치 않게 등과 등이 맞닿으면서 짜증 섞인 시선을 교환하는 경우도 있었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저편에서 상미를 보호하겠다고 몸으로 벽을 만든 남자아이들의 꼴에 코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성인군자 나셨군.’

고개를 돌려 선배들을 보니, 한 선배는 고개를 빼꼼히 빼고는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는 모습이었다. 그의 앞에는 창밖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젊은 여성이 있었는데, 선배는 그 여성의 가슴골을 보려고 용을 쓰고 있다.

갑자기 회의감이 밀려 들어왔다. 이 모든 게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누구는 죽지 않으려고, 명을 수행하기 위해 머리를 쓰는 데, 누구는 여자 가슴 한 번 보겠다고 저리도 어수선하다. 자기를 쫓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넋 나간 놈들의 호위를 받으며 여유를 부리는 여자애의 처지도 우습다. 살짝 몸만 닿아도 짜증이 나는 만원 버스 안에서 자기만 편하자고 엉덩이를 밀고 들어오는 아주머니도 짜증스럽다.

‘왜 나만 이 고생을 하는 거지?’

득이 되는 것도 없고, 기껏해야 선배들의 주먹세례를 피할 수 있다는 것뿐인 일이다. 복수? 하면 좋겠지만, 선배들은 자신의 복수를 돕기 위해 하는 게 아니다. 특히 자신에게 직접적인 명을 내린 선배의 목적은 단유가 아니라, 단유가 가진 자전거였다.

어디서 단유와 명수가 타고 다니는 자전거가 비싸다는 이야기를 듣고 탐을 내더니, 그 두 사람이 부모가 없는 고아라는 사실을 우성에게 듣고는 우성을 부추긴 것이다.

“복수? 그거 도와줄게.”

그 속을 왜 모를까. 하지만 알면서도 ‘고맙습니다, 선배님’이라고 허릴 숙여야 한다. 그리고 곤란한 일은 모두 자신이나 같이 있는 선배들 같은 무리가 맡고, 그 선배는 가만히 앉아서 떡이나 먹고 굿이나 본다.

치사한 세상이다. 부질없는 짓거리라도 해야만 하는, 그래야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역시 세상은 힘이 세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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