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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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으로는 자제해야 한다고, 되뇌고 되뇌면서도 막상 상황을 만들면 머릿속이 검게 물들어서 통제가 되지 않는 병억이었다. 분명 학교에 갈 때까지만 해도―사전에 정한대로―두 사람을 불러 데리고 나오는 것까지만 하려 했다. 그러나 두 놈을 마주하자 괜히 울컥하는 마음에 머릿속이 깨끗이 비워졌다.
한 발을 밖으로 빼고 앉은 채로 자신을 쳐다보는 단유의 자세에서 어제처럼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단지 그것뿐일까? 병억의 뇌 속을 뚫고 들어오는 듯한 강렬한 눈빛과 침묵을 강요하는 듯한 굳게 다문 입술이 병억의 입을 쉽게 열지 못하게 만들었다.
“얌전히 있어라, 윤병억.”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단유의 목소리에 병억이 반응했다.
“얌전히 있지 않으면 어쩔건데?”
“이 새끼가!”
명수가 발끈하는 걸, 한 손으로 말린 단유가 병억의 물음에 답했다.
“어차피 넌 학폭위 소환 대상이야. 그런데 여기서 더 사고 치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래?”
“그걸 네가 왜 걱정해?”
“걱정하는 거로 보여? 경고하는 거다. 행동 조심하라고.”
“이런 미친….”
“여기 있지 말고 얼른 생지부로 가. 등교하면 생지부로 오란 이야기 들었잖아.”
“새끼야, 내가 어딜 가든 네가 왜 신경을 써!”
단유가 일어서자 갑자기 교실에 찬 바람이라도 분 것처럼 온도가 뚝 떨어졌다. 어떤 아이는 진짜 소름이 돋는다는 듯 팔을 쓰다듬었다. 비록 아침이지만 한참 더워지기 시작하는 6월에 이런 소름이 돋다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긴 하나 물러서지 않는 병억에게 한 걸음 다가간 단유가 그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 피해 주지 말고 그냥 가.”
“이 새끼가….”
비록 단유에게 ‘제압’당하긴 했어도, 결코 싸움에서 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힘에서 밀린 것도 사실이라 그간 저도 모르게 기죽어 지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무시’당할 순 없었다.
‘운빨로 이긴 주제에, 날 무시해?’
아슬아슬 이어지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
“근데 병억이가 잘할 수 있을까요?”
“뭘?”
우성이가 재떨이를 갈며 물었다.
“단유한테 쫄아서 말도 못 거는 거 아닐까 해서요.”
“그 반대겠지.”
“네?”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깊게 빨아들이니 담배 끝이 빨갛게 타들어 간다.
“워낙 멍청하고 단순한 녀석이라야 말이지. 흥분해서 싸움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일 거다.”
“걔가 싸워요?”
“그래도 나름 기술을 배운 녀석이야. 자기 싸움 기술에 자신감이 넘치는 게 문제지, 싸우는 걸 피하진 않는 녀석이야.”
“만약에 진짜 싸우면요?”
“지 할 일만 잊지 않는다면 뭐 싸우든 맞든 상관없지.”
병억의 쓸모는 오직 단유를 데리고 나오는 것, 까지라는 말이었다.
‘내 쓸모는 어디까지일까?’
이미 도하에게도 배신을 당했던 경험이 있는 우성이었다. 입술을 살짝 깨문 우성은 담배 연기를 뿜으며 당구대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곳, 지하 당구장에서 자신은 더 내려갈 데가 없는, 바닥에 기어다니는 지렁이 같은 존재다. 자칫 실수라도 했다간 선배들의 장난에 짓밟혀 꿈틀대다 죽을 수도 있다. 만사에 조심스러워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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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억은 벼락같이 발을 내질렀다. 하얀 운동화의 발등이 단유의 허벅지를 강타하기 직전, 단유는 무릎을 들어 올리며 로우킥을 방어했다.
‘가볍다.’
병억의 공격이 가볍다고 느끼기가 무섭게, 병억은 뻗었던 무릎을 빠르게 접으며 거둬들인 뒤, 허리를 더 틀면서 다시 발을 내뻗었다. 이번에는 아래가 아닌 위였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공격은 병억이 이 기술에 얼마나 숙달되어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발등이 아닌, 신발의 딱딱한 코 부분이 단유의 얼굴을 향했다. 조금 전 공격이 진짜가 아니었던 게, 이번에는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단유는 위험을 느끼고 고개를 뒤로 뺐다. 그리고 깨달았다.
‘실수다.’
단유가 싸움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그런 동작이 나오고 말았지만, 병억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비록 단유가 몸을 빼는 동작으로 공격을 회피하긴 했지만 대신 중심을 뒤로 놓는 우를 범했고, 간격이 좁혀진 상황에서 중심을 잃은 단유는 병억에게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병억은 돌려차던 그 회전을 그대로 이어, 뻗었던 발을 접고 땅을 강하게 딛은 후, 몸을 돌리며 뒷발을 단유를 향해 스트레이트로 밀었다.
단유는 병억의 다리를 붙잡을 요량으로 손을 뻗었으나 뒤차기는 속도도 빠르고 공격의 궤도도 직선이라 붙잡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회전력을 더한 뒤차기의 힘은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단유의 손을 스치며 내질러진 발에 배를 걷어차인 단유는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지만, 뒷걸음질해야 했다. 뒤에서 명수가 잡아주기도 했고.
“단유야!”
단유는 한 손으로 배를 감쌌다. 병억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짧게 말했다.
“내가 한다고 했다.”
그마저도 채 말을 끝내지 못했다. 뒤차기의 성공으로 자신감이 붙은 병억이 두 걸음 정도 달려와 정권을 내지른 탓이었다. 단유는 날아오는 주먹을 보며 이번엔 허리를 숙여 주먹을 피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병억의 정권은 다음 공격을 위한 페인트였다. 가볍지만 빠르게 내지른 정권을 거둠과 동시에 레프트 훅의 궤도를 따라 휘둘러진 주먹에 단유는 급히 숨을 들이켜며 다시 한번 피하려 했지만, 허리를 숙인 상태에서는 달리 피할 곳이 없었다.
이번에는 관자놀이 부근을 맞았다. 다행히 정확하게 들어맞지를 않아 충격이 크진 않았지만, 스친 공격도 만만하게 볼 것은 아니었다.
구경하던 아이들에게서 소란이 일었다.
“지는 거 아냐?”
“설마….”
“존나 세게 맞았는데?”
단유가 한 걸음 물러설 때마다 구경하던 아이들이 두세 걸음씩 물러나야 했다.
“저 새끼 미친 거 아냐?”
용감한 누군가의 지적질도 병억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사실 이미 병억은 흥분 상태였다. 자신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단유는 확실히 힘만 센 바보였다. 초보적인 기술만 섞어도 이렇게 당하지 않는가?
“죽고 싶지?”
놀리듯 한 마디를 뱉고는 다시 정권 찌르기를 시도했다. 다른 아이들이 정직하게 주먹을 던지는 것과 달리, 병억은 주먹과 발을 내지르거나 거두는 요령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단유는 이전의 다툼처럼 그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기껏해야 천부적인 반사신경으로 겨우 급소만 피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 새끼!”
명수가 주먹을 쥐기만 할 뿐 달려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챈 병억은 좀 더 마음 편하게 단유를 요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병억이 좀 더 잔인한 눈빛으로 단유를 바라볼 때, 단유는 남몰래 심각한 고민에 처했다. 혼자만이라면 어떻게든 묵묵히 버텨내며 시간을 끌어볼 수도 있을 것이고, 싸울만한 공간을 만들어내서 움직임을 크게 가져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뒤에는 명수가 서 있었다. 비록 전날부터 몇 번이고 강조해서 자신이 맡겠다 했지만, 자신이 이렇게 당하고 있는 걸 두고 보기만 할 명수가 아니었다. 자칫 위험하다고 ‘착각’이라도 한다면 싸움에 끼어들 우려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싸움을 빨리 끝내든지, 아니면 완벽하게 ‘제압’을 하는 방식을 택해야 할 테다. 하지만 단유의 생각 이상으로 병억은 노련하고, 단유의 힘은 병억의 기술을 완벽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짜 마음 같아서는 그냥 마법으로 눕혀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많은 상황. 어떻게든 버텨내야 한다. 그런데.
병억이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단지 한 걸음인데 단유의 뒤에 선 명수와 아이들, 좌우로 움직임을 제한하는 의자와 책상과 같은 집기들이 단유를 둘러싸게 하였다.
비열한 병억의 웃음이 입꼬리를 스치고 지난 뒤, 기습적으로 뛰어들었다. 단유는 얼른 손을 올려 손바닥으로 무릎을 막았지만 밀고 들어오는 힘을 쉽게 막기 힘들었다. 직접적인 충격은 받지 않았지만 몸을 실은 플라잉 킥에 떠밀려야 했고, 명수가 단유의 등을 받치다 함께 넘어졌다.
두 발이 땅에 닿자마자 달려들어 샤커킥을 날리려는 병억을 보며 단유는 이를 악물었다.
“아악!”
발을 뻗던 병억이 갑자기 주저앉아 발목을 부여잡더니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구경하던 아이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걷어차인 것은 단유였다. 맞기 직전 단유가 머리를 틀어 타격점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긴 했지만, 걷어차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비명은 병억이 질렀다.
‘잘못 차서 다쳤나?’
그러나 병억이 발목을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보였을 때, 아이들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어? 피?”
맨살이 드러난 발목에 붉은 혈선이 그어져 있고, 그 선에서 피가 송글 솟고 있었다. 하지만 병억이나 아이들은 왜 갑자기 병억이 다친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물론 단유가 한 짓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단유는 이마가 빨갛게 부어오른 채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에도 무기로 쓸만한 뭔가를 들고 있지 않기도 했고.
“이 새끼, 뭐야!”
하지만 병억은 분명 단유가 뭔가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상처를 입을 이유가 없으니까. 단유를 차고 난 다음 순간에 통증이 왔다는 것도 단유를 의심하는 이유였다. 방법은 알 수 없었지만. 병억은 꼭지가 돌 정도로 화가 났다.
얕지 않게 베인 상처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리고 병억은 범인이 단유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다만 이 짜증나는 상황의 화풀이 대상이 눈앞에 쓰러진 단유라는 점이 중요했다.
“개새끼야!”
단유가 쓰러지며 동시에 도미노처럼 넘어진 의자들이 널려 있었고, 병억은 손에 닿는대로 아무거나 집어 던졌다. 힘이 과하게 들어갔는지 단유를 정확히 맞추지 못하고 단유 앞의 바닥을 친 의자는 바닥에 퉁겨진 뒤,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 오르며 구경하던 아이들을 공격했다.
“워어.”
물러난 아이들과 맞아서 상처를 본 아이들이 병억을 힐난했다.
“저 미친 새끼가 또 체어샷이야!”
“잘못해서 죽으면 어쩌려고!”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까지 다치게 만들잖아, 저 새끼?”
“야, 저 새끼 잡자!”
병억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 잡아? 누구야! 어떤 새끼야!”
“야, 저 새끼 말려야 하는 거 아냐? 눈깔이 완전히 돌았는데?”
“누구야! 어떤 새끼야!”
병억은 수군대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열을 내더니 아무거나 집어서 던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놀람과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물러섰다.
“야, 이 새끼야. 왜 의자를 집어 던지고 지랄이야?”
“…이 새끼들이 사람을 가마니로 보나….”
의자, 책상 잡히는 대로 여기저기 던져대니 아이들이 물러서다 못해 맞는 아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씹새가….”
설마 이 반에 성격 더러운 이가 오직 병억뿐일까. 누군가가 자기 책상의 의자를 집어 병억에게 던졌다. 병억은 던지려던 의자를 반사적으로 들어 올려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의자를 막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어떤 아이는 들고 있던 책이나 도구들을 집어 던졌고, ‘눈에는 눈’이라고 자기 주변의 의자를 병억에게 던지는 애들도 있었다. 곧 병억에게로 의자와 잡동사니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씨발 니미….”
병억은 의자를 내려놓지 못하고 의자가 날아올 때마다 의자를 들어 막았다. 혼자보다 함께일 때 우린 강했다, 는 어느 영화의 선전 포스터 멘트처럼 아이들은 합심해서 병억에게 의자를 던져댔다.
하지만 모두가 의자를 던질 수 없었고, 던질 수 있는 의자 수도 많지 않았다. 즉, 언젠가는 끝이 나고 말 일. 곧 날아오는 의자가 뜸해지고 대신 병억의 옆으로 날아들었다가 바닥에 나뒹구는 의자, 책상, 필기구 등이 눈에 띄었다.
“야, 이 개새끼들아!”
반격의 시간. 병억은 손에 잡히는 대로 의자를 교실 여기저기에, 아이들이 보이는 곳마다 던지기 시작했다.
“그만해! 다들! 너도! 그만해!”
단유가 일어나서 말려보려 했지만 애초에 단유의 말을 들을 병억이가 아니었다.
“닥쳐! 이 새끼들아!”
아이들은 날아드는 의자를 피하거나 맞불을 놓는 식으로 대응했다. 처음 자신에게로 날아드는 물건들을 막다가 어떻게 잘못 막았던지 검지가 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픈 티는 내지 않는 병억이었다. 오히려 더 열을 내며 반 전체와 싸우기 시작했다.
의자가 날아다니고 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칼만 가지고 싸움을 벌이는 보스몹 레이드 같아 병억은 기분이 더러웠다.
“죽어, 이 새끼들아! 다 같이 죽으라고!”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병억은 의자며 책상이며 할 것 없이 던져댔고 그야말로 전쟁의 한복판이 된 교실의 소란은 선생님이 들어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너희들 뭐, 아악!”
희선은 날아오는 의자를 피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