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500화 (500/956)

권투(4)

-------------- 500/952 --------------

단유가 일어서자 모여있던 아이들이 한걸음 물러섰다.

“윤병억.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몰라도 자중하자. 사고 치지 말고.”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병억에게로 향했다.

“사고는 니미. 니들이 먼저 조용히 하든가! 꼴에 TV 나왔다고 깝치지나 말든가.”

다시 단유에게로 향하는 시선. 그때 분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는 명수에 의해 시선이 가려졌다.

“아, 저 새끼 오늘 왜 저래? 야, 너 진짜 죽고 싶어?”

“와, 저 눈깔 봐라? 왜? 죽이게? 죽여. 죽여봐, 이 새끼야.”

한쪽 다리를 떨면서 느긋한 표정으로 도발하는 병억의 태도에 명수가 움찔하는데 뒤에서 단유가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병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뭘 꼬나봐, 새끼야.”

“······.”

단유가 말없이 지켜보자, 점점 교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주위 아이들도 단유가 말이 없으니 화가 난 게 아닐까 추측하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병억도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을 직시하는 단유의 태도에 무작정 욕만 내뱉진 못하고 같이 노려봤다. 그렇게 단유의 검은 눈동자가 병억에게 고정된 동안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러자 아이들이 슬금슬금 자리로 돌아가며 경직됐던 분위기가 풀리기 시작했다.

“고아 새끼들 주제에.”

그 말만 없었다면 말이다. 운동장에서 공을 쫓아갈 때처럼 허벅지에 모인 힘을 터뜨리며 자리를 박찬 명수가 병억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병억을 향해 주먹을 던졌다.

앉아있던 병억이 명수가 달려오는 걸 인지하고 일어서려던 찰나에 명수는 이미 지척에 다다랐다. 몸을 날리듯 기울이며 주먹을 던지는 명수의 공격이 병억에게 닿기 직전, 가까스로 단유가 뛰어들어 명수를 덮쳤다. 의자와 책상들이 무너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고, 명수와 단유가 바닥을 굴렀다.

“인명수! 참으라고 했잖아!”

단유가 명수를 위에서 누르며 소리쳤다. 보기 드물게 화를 내는 단유의 모습에 아이들은 얼떨떨한 느낌이었다.

“저 말을 듣고 어떻게 참아!”

바닥에 엎드려 있던 명수는 어깨를 들썩이며 벗어나려 했지만 단유의 힘을 쉽게 이겨내긴 힘들었다.

“생활기록부에 줄 긋고 싶어! 고등학교 가서도 축구하고 싶다며! 그럼 참아!”

“어떻게 참냐고! 저 새끼가···.”

명수가 눈을 돌려 이 사태를 만든 원흉을 바라보는데 눈동자가 커졌다.

‘이때다!’

애초에 병욱은 싸움을 벌일 생각까지는 아니었다. 아니, 싸움이 벌어진다 해도 자신이 먼저 선제공격을 할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시비만 걸 생각이었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은 기회였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두 놈이 서로 얽혀서 바닥에 엎어진 상황. 방어를 위해 일어섰던 틈에 병욱은 자신의 의자를 집었다.

“야!”

누군가가 말리려는 것인지, 경고하려는 것인지 소리를 쳤다. 하지만 이미 병욱의 머리 위로 의자가 들어 올려졌다.

단유는 병욱이 의자를 들었다는 것을 인식했다.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피하면 명수가 맞게 된다. 단유는 이를 악물고 등에 힘을 주었다.

퍽, 하고 등에 강력한 충격이 가해졌다. 집어던진 게 아니라 강하게 내려친 것이라 더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읍!”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뒤이어 달려온 병욱이 발로 단유의 옆구리를 찼다. 하지만 단유는 버티면서 충격을 감당했다. 맞고 굴렀다면 충격이 덜어졌을지도 모르지만, 명수가 싸움판에 끼는 것은 막아야 했다.

“단유야!”

명수가 계속 일어서려는 것을 단유는 굳이 손으로 어깨를 눌러 막았다. 그 사이 단유의 옆구리에 병욱의 신발코가 틀어박혔다. 이번의 공격은 전신에 전기가 흐르는 느낌까지 줬다.

‘이대로는 안 돼.’

명수를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도 더 피해를 누적시켜서는 안 될 것 같다. 1분만, 아니 2분만 참으면 선생님이 오시겠지만 그 사이에 몸이 상할 것 같다. 통증이 두려운 게 아니라, 몸이 상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어질까 두려웠다.

병억은 다시 의자를 집어 들었다. 의자가 내려오는 순간은 1초도 걸리지 않는다. 몸에 닿기까지 길어야 0.5초 안팎. 그 사이 단유는 몸을 돌려 의자의 다리를 붙잡았다. 병억의 눈에 놀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게 보였다.

힘으로는 또래의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단유였다. 게다가 매일 철봉을 붙잡고 풀업(pull up)을 해온 단유는 악력이 좋아서 잡은 의자의 다리를 붙잡고 끌어당기니 절로 병억이 딸려왔다. 병억은 얼른 손을 놓고 물러섰지만, 몸의 중심이 흐트러진 상태. 여기서 단유가 의자를 휘두르거나 발로 밀어도 병억은 꼼짝없이 당할 테지만, 단유는 그러지 않았다.

의자를 옆으로 던져놓고 즉각 몸을 돌려 명수를 붙잡았다. 단유가 어깨를 놓는 순간을 포착해 일어선 명수가 달려들려던 참이었다.

“놔! 저 새끼 죽일 거야! 죽일 거라고!”

“인명수.”

단유가 나직하게 불렀다. 명수의 눈은 이미 반쯤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고아’라는 모욕도 모욕이지만, 감히 단유를 때린 놈이었다. 단유가 무방비로 있던 틈을 노려 비겁하게 의자로 때리고 발로 찬 놈이었다. 가만둘 수 없었다.

하지만 단유는 다른 무엇보다 명수를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놔!”

“인명수.”

그때 드르륵 교실 앞문이 열리며 사회 선생님이 들어왔다.

“뭣들 하는 거야!”

아이들이 급히 제자리로 돌아가며 의자와 책상들을 밀치는 소란에 교실이 난장판같이 되자, 선생님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동작 그만!”

몇몇 아이들은 급히 자리에 앉았지만, 몇몇은 자리에 서서 선생님의 눈치를 살폈다.

그 사이, 단유는 여전히 명수와 눈을 맞추고 나직하게 말했다.

“쟤, 내가 처리할 거다. 넌 손대지 마.”

“······.”

명수는 이를 악물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청소, 내가 잘하는 거다. 넌 그냥 구경해라.”

“거기, 반장! 뭐하는 거야! 나와!”

단유는 명수의 어깨를 슬며시 놓았다. 그리고 돌아섰다. 병억이 숨을 헐떡이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저 눈동자에 공포를 새겨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

“야.”

“······.”

“야.”

“······.”

“쌩까냐?”

“아니요.”

“그럼 고개 들어 새끼야.”

병억이 고개를 들었다. 하얀 담배 연기가 얼굴에 뿜어졌다. 살짝 눈을 찌푸리긴 했어도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하지만 곧 뺨을 향해 날아오는 손바닥에 고개가 휘청거릴 정도로 돌아갔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죄송합니다.”

병억은 볼을 감싸 쥘 생각도 하지 못하고 허리를 숙였다. 숙인 머리 위로 손바닥이 날아와 뒤통수를 치고 지나간다. 설마 머리에 꼬인 파리를 쫓느라 그러는 것은 아닐 테고, 있어도 그렇게 많은 파리가 머리에 있을 턱이 없다.

“내가 뭐랬냐?

“···그냥 시비만 걸라고···.”

“그게 어렵냐? 그게 그렇게 어려워?”

물음표 하나에 손바닥 하나. 얼얼한 뒤통수에 혹이 생길 것 같다.

“죄송합니다.”

뒤로 물러서는 발의 움직임이 보였지만, 병억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담배 연기가 얼굴을 감싸고 내려오다 흩어진다.

“말 좀 잘 듣자? 응? 좋은 말 할 때 들으면 서로 좋잖아. 응?”

“예.”

시야에서 사라진 신발은 멀어져가는 소리만 남겼다.

“윤병억.”

한참 옆에 서 있기만 하던 이의 목소리가 들릴 때쯤에야 병억은 접었던 허리를 펴며 고개를 들었다.

“단유, 불러내.”

“어디로?”

“일단, 영운 슈퍼 앞으로. 거기서 뒤로 가면 공터 나오잖아. 그쪽으로 데리고 나와.”

“언제?”

“내일. 시간 끌면 안 좋아.”

“알았어.”

병억에게 담배를 물려주고 볼을 톡톡 두드려준 뒤, 뒤돌아서서 옆에 잠시 놔뒀던 수건을 챙긴 우성은 앞에 놓인 당구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다음날, 희선은 조례를 위해 교실로 올라가는 걸음이 무척 무겁다고 느꼈다. 전날 벌어졌던 사건은 명백한 폭력 사건임과 동시에 의자 등을 투척하는 싸움이었다. 아니 일방적 폭행이었다. 시비의 발단은 병억이었고, 명수가 달려들려는 걸 단유가 막았다. 그리고 단유가 바닥에 엎드려 있을 때 병억이 의자 등을 수차례 내리치고 발로 차는 등의 폭행이 가해졌다는 진술은 보는 내내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특히, 단유가 절대 반항하지 않고 맞기만 했다는 여러 아이의 진술서는 희선의 양심을 건드렸다.

“말로 하지 왜 주먹질을 해! 학교에서 싸우면 안 된다는 거 모르니?”

학기 초 단유에게 했던 말이었다.

“피할 수 없는 싸움도 있습니다.”

라던 단유의 말은 이런 상황을 예견한 것일까? 시비를 거는 상대에게 어떤 식으로 ‘대화’를 해야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까? 폭력의 피해자가 된 단유에게 잘했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말을 잘 들었다고 칭찬해야 하는 걸까? 도망가지 않고 미련하게 맞고만 있었냐고 질책해야 하나?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병억이는 도대체 왜 싸움을 걸었단 말인가? 사건 직후 받아든 진술서들인지라 서로 입을 맞출 겨를이 없었을 테니, 공통적으로 나오는 내용은 진실이라 봐도 무방할 테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란 게 너무나 하찮고 어이가 없어서 이게 무슨 싸움이 날 일인가 싶을 정도였다. 아이들이니까 이런 ‘사소한’ 이유로도 싸울 수 있는 건가, 납득을 해보려 해도 쉽지가 않다.

‘모르겠어.’

어차피 병억이는 학폭위에 소환될 터이니 거기서 처벌을 받든, 소명기회를 얻든 할 것이지만, 폭력의 피해자인 단유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희선은 교실 앞에서 쉽게 문을 열지 못했다. 그때 그녀의 정신을 깨우는 소리가 교실 안에서 들렸다.

“개새끼가!”

우당탕탕 집기들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희선은 급히 문을 열었다. 의자가 날아오고 있었다.

“꺄아악!”

비명을 지르며 희선이 주저앉은 틈에 날아든 의자가 교실 앞문에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바닥을 굴렀다.

30분 전, 병억이 불퉁한 얼굴을 하고 교실에 들어왔을 때, 아이들이 그의 얼굴을 힐긋힐긋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뭘 봐, 새끼들아!”

아이들은 얼른 시선을 돌려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퉤.”

바닥에 침을 뱉으며 자리로 향한 병억은 둘러맸던 가방을 화투장 집어 던지듯 책상 위에 던져두고 그 위에 두 발을 올렸다.

“뭘 보냐고, 새끼들아? 뒤질래?”

손에 집히는 거 아무거나 들고 던질 시늉을 하니 또 아이들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피하는 게 아니라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려 그의 반응을 살피는 모습이었다. 병억도 단유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는 식으로 초연한 태도 덤덤히 책을 읽는 단유의 모습은 한 학기 동안 줄곧 보아온 모습이었다.

‘오늘 방과 후, 학교 뒤 영운 슈퍼로 데리고 와.’

병억이 오늘 해야 할 일이었다.

솔직히 병억이 그 일을 하려 했던 것은 단유를 물 먹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단순히 물만 먹이는 게 아니라, 성질머리를 고쳐놓을 수만 있다면 나락으로 떨어졌던 자신의 권위도 세울 수 있고, 자존심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게 당시에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만약 어제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굳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학기 초엔 잘 몰랐지만, 이번에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단유에게도 약점이 있다는 점이고, 그 점만 잘 공략한다면 저 두 놈을 때려눕히고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은 얌전히 가자.’

다시 시킨 걸 제대로 하지 않으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것이다.

병억은 생각을 정리한 뒤, 일어섰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 아이들의 시선이 모일 때도 단유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다만 명수가 그 소리에 반응했다. 날 선 시선이 병억에게로 향할 때였다.

“명수야.”

나직한 단유의 목소리가 명수의 이성을 붙잡았다. 책을 탁 덮더니 몸을 45도쯤 돌리고 다리 하나를 책상 바깥으로 내놓은 단유는 일어선 병억과 눈을 마주했다.

“얌전히 있어라, 윤병억.”

일정한 톤의 목소리가 어쩐지 병억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