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99화 (499/956)

권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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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는 정확히 4일을 입원했다가 퇴원했다.

“아, 정말 푹 쉬었네.”

집에 돌아온 명수의 첫 마디였다.

“좋아?”

“좋지. 모처럼 푹 쉰 건데.”

“그렇게 말하면 평소에 전혀 못 쉰 것 같잖아?”

“야, 솔직히 말해서 못 쉬었지. 그동안 학교에서 네가 얼마나 눈치 줬어? 수업시간에 잠도 못 자게 하지, 숙제는 꼬박꼬박해야 했지, 집에 돌아와도 복습하고 예습해야 하지···. 어휴, 완전히 감옥이 따로 없어.”

듣고 있던 하은이 명수를 쥐어박으며 타박했다.

“듣자 듣자 하니까 말이야. 명수 너, 그 당연한 걸 하면서 피곤하다고 말하는 그 뻔뻔함에 내가 또 놀란다. 그럼 여태까지는 한 번도 그걸 안 지켰다는 말이잖아? 도대체 너 여태 학교는 어떻게 다녔던 거니?”

“그야, 축구부 연습 때문에 바빴잖아요?”

“학교에 공부하러 가지, 공 차러 가니?”

“전 공 차러 갔어요.”

“퍽이나 자랑이다!”

단유가 두 사람을 말리며 말했다.

“그만들 하세요. 그리고 명수 너도 이제 중3이고 내년에 고등학교 들어가려면 최소한은 해야 하잖아. 그리고 이제 시합도 다 끝나서 나갈 시합도 없고.”

단유가 교육부 홍보 영상 촬영 등으로 바빴던 4, 5월에 명수는 중등부 춘계 대회에 나갔다 왔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지만, 대회 MVP는 명수가 받았다.

“나 고등학교도 축구부 있는 데로 가고 싶은데?”

사실 벌써 하은과 축구부로 컨택이 들어오고 있었다. 명수가 2년간 보여준 실력만 두고 보면 어느 학교든 명수를 탐내지 않을 수 없었다. 특이한 건 명수만이 아니라 단유에게도 영입 제의가 들어온다는 점이었다. 그 학교는 아마도 지난해 가을 대회에서 단유가 보여줬던 활약을 직접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명수의 문제는 직접 상의하고 연락드리겠노라 대답을 보류하던 하은이 단유의 건에 있어서만큼은 단호하게 반대 의사를 보였다.

“우리 단유는 축구 안 해요.”

―실력을, 재능을 낭비하는 일입니다. 그 선수는 꼭 축구를 해야 돼요.

“우리 단유는 다른 재능이 더 뛰어나요.”

―공부 잘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공부 잘하는 건 그저 학창시절의 일일 뿐입니다. 아시잖아요? 만약 전국에서 10% 안에 드는 똑똑한 학생이라 해도 그뿐입니다. 하지만 그 재능은 전국 1%입니다.

“우리 단유는 공부도 전국 1%에요.”

―학생의 미래를 위해 좀 더 심사숙고해주세요, 어머니.

“···‘어머니’ 아니거든요?”

―네? 여보세···.

뚝, 끊어버리는 전화를 소파 위에 내던지는 하은의 모습이 종종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튼, 자랄수록 두각을 나타내는 단유와 명수였다.

****

허름한 골목에 누가 찾아오기나 할까 싶은 당구장이 하나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좁고 긴 계단을 걸어가 삐걱거리는 철문을 열면 담배 연기가 먼저 훅 다가오는 당구장이었다. 당구공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딱딱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가운데, 카운터에선 왠지 모르게 지친 얼굴의 중년인이 조그만 TV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경우는 화장실을 갈 때 외에는 거의 없었다. 계산도 앉아서 하거나 혹은 아르바이트생에게 맡겼다.

이런 허름한 당구장에도 아르바이트하는 아이가 있을까 싶지만, 어린 얼굴의 소년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재떨이 갈아주고, 심부름도 해주었다. 손님이 떠난 자리를 청소하는 것도 아르바이트 소년의 몫이었고, 공을 수거해서 당구공 세척기에 넣고 돌리는 것도 소년의 일이었다.

“우성아, 여기 콜라 좀.”

“네, 선배님.”

씻었는지 말았는지 모를 스테인리스 컵에 콜라를 담아 게임판 아래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당구대를 들고 순서를 기다리던 선배 한 명이 검은색 세손 장갑을 낀 채로 컵을 집었다.

한참을 공을 보며 큐를 앞뒤로 재보던 다른 선배가 딱, 소리를 내며 힘차게 공을 굴린 뒤 우성을 향해 말했다.

“내거는?”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야, 넌 한 번에 해도 될 일을 왜 나눠서 하냐? 미련스럽게.”

“죄송합니다, 선배님.”

“몸이 안 되면 머리라도 써, 새끼야.”

“알겠습니다, 선배님.”

“야, 야. 그만해라. 불쌍한 애잖아.”

키득거리는 소리가 우성의 등을 떠밀었다. 우성은 도망치듯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쟤 완전히 갔다며?”

다음 공을 노려보며 계산을 하던 소년의 말에 큐를 어깨에 걸치고 있던 다른 소년이 비웃음을 날렸다.

“같은 반 애한테 처 발리고 나서 맛탱이가 갔다더라.”

“같은 반 애가 누군데? 우리가 아는 앤가?”

콜라를 홀짝대며 마시는 소년의 물음에 딱, 하고 빨간 공을 맞힌 소년이 허리를 펴며 대답했다.

“우리가 아는 애란다.”

“아는 애? 다른 라인이야?”

“아니. 그냥 공부 좀 하는 애.”

“공부?”

“거 있잖아? 우리 3학년 때, 신입생들 중에서 사고 대판 쳤던 새끼.”

“신입생 중에 사고 친 새끼가 한둘이어야 말이지.”

“아, 이런 무식한 새끼들. 1학년 전교 1등 하던 새끼 말이야.”

“주먹 말고 진짜 공부로 전교 1등? 아, 누군지 알겠다.”

“알겠지? 이름은 생각 안 나도 얼굴은 알잖아? 뉴스에도 나왔던 애.”

“아, 그럼 그 새끼한테 당한 거야?”

“완전히 발렸단다.”

“그런 애한테 처 발리고 바닥에 드러누웠으면 쫑난 거지.”

“근데 왜 여기서 저러고 있냐?”

다음 공격을 아쉽게 날리며 혀를 차던 소년은 카운터에서 컵 하나를 들고 돌아오는 우성을 보며 대답했다.

“재기의 희망을 놓지 못했달까?”

“븅신이, 한 번 발렸으면 끝난 거지. 뭐, 설마 우리가 지 대신 뭐라도 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뭐야?”

“해줄 수도 있지, 새꺄.”

“왜? 왜 우리가 해줘?”

“요것만 있으면 말이야.”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말아 보이는 동작에 다들 키득거렸다.

그들은 고등학생인데, 이렇게 뭉쳐서 돌아다니며 후배님들의 주머니를 가볍게 하거나, 혹은 정당한(?) 대가를 받고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는 일을 소일거리로 하고 있었다.

“여기요. 콜라.”

“거기 놔.”

“네, 선배님.”

우성은 공손하게 잔을 내려놓고 꾸벅 허리를 숙여 보인 뒤, 돌아섰다. 돌아선 그의 표정은 야차의 그것처럼 잔뜩 찡그린 얼굴이었다.

사실 여기서 일하는 이유는 그저 유흥비 마련을 위한 아르바이트이자, 마음 놓고 당구를 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곳보다 아르바이트비가 무척 낮았지만, 우성은 별 고민 없이 아르바이트를 선택했다. 들어오고 나서야, 볼 때보다 더 힘들고 짜증 나는 일이란 것을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의 처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뒷담화도 아닌 빤히 보는 앞에서 듣는 비웃음 섞인 힐난은 정말 참기가 힘들었다. 이 바닥은 그랬다. 한 번 드러누우면 평가가 바닥으로 치닫는다.

‘씨발.’

하지만 고등학교 선배들이 보는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릴 순 없는 일이라 그저 속으로 삭힐 뿐이었다.

싸움에서 지는 것은 그저 힘이 약하다는 뜻이 아니다. 자존심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뜻이고, 명성이 추락했다는 뜻이며, 존재가 무의미해진다는 뜻이다. 제대로 살고 싶다면 반드시 ‘복수’를 해야 한다.

‘개새끼. 두고 봐라.’

우성은 이를 갈았다.

****

단유가 찍은 영상이 소개되었지만, 예상했던 대로 반향은 크지 않았다. 교육부의 정책이 백년대계라는 국가 교육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잘 알지만, 형식적이며 식상한 교육부의 홍보 영상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는 이는 많지 않았다.

학생은 물론이고 선생님들도 굳이 찾아서 보는 이가 없었으며, 학부모나 일반인들도 굳이 찾는 이가 없는 그런 영상이었다. 그나마 ‘리본소녀’라는 이름에 기대어 골수팬들 몇몇이 찾아보았지만, 교육부가 기대했던 만큼의 조회 수는 나오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영상들이 인터넷에 등장하는데 그 와중에 개인적 취향에 맞는 것들만 찾아보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혹은 별 관심도 없는 내용의 영상을 보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는 이들은 드물었던 것이다.

아예 보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대박. 반장 진짜 도연이랑 이렇게 가까이 있었어?”

“도연이 어때? 예뻐?”

“커?”

단유는 손을 내저어 그들의 호기심을 물리쳤다.

“난 관심 없고, 할 말도 없으니까 그런 거 묻지 마. 굳이 내게 물을 게 있으면 공부나 시험 관련해서만 물어. 나머지는 대답 안 해.”

“야, 반장. 너무하네. 그냥 예쁜지만 대답해줘. 실물이랑 화면이랑 달라? 실물존예, 라던데 진짜냐?”

포기하지 않고 달려드는 도연빠를 비롯하여 많은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단유의 대답을 기다렸다.

“별로.”

“별로라고? 진짜?”

“나한테 별로라고.”

단유는 급히 말을 바꿨다. 비록 자신이 마음이 없다고 해도, 도연에 대해 나쁘게 말할 이유까지는 없으니까.

“왜? 어떤데?”

단유 옆에 앉아있던 명수가 끼어들었다.

“얘한테 묻지 마. 얘 되게 눈 높아.”

“야, 도연이 정도 얼굴이 안 예뻐 보인다고 하면 도대체 얼마나 눈이 높은 거냐?”

“엄청나지.”

명수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단유를 힐끗거렸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갤럭시즈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의 경악을 불렀던 단유의 심미안이었다. 사실 외모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단유가 아니기에 망정이지, 만약 외모를 우선으로 생각한다면 단유의 눈에 들 이는 단 한 명도 없을지도 모른다.

“너 예전에 뮤직비디오도 나오고 그랬다면서? 나중에 배우 쪽으로 가는 거 아냐?”

어른들에게나 아이들에게나 연예인이란 직업은 선망의 대상이자 전도유망한 직업 중 하나로 인식되는 모양이다. 비싼 외제 차 수 대를 끌고 다니고, 틈틈이 일하고 대부분 시간을 외국으로 놀러 다니며 인생의 황금기를 여유롭게 보낼 수 있는 직업, 이 연예인이라는 인식이었다.

그때였다.

“아주 지랄들 나셨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아이들의 대화가 잠시 멈춘 틈에 들린 목소리라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돌아가니, 병억이 입술을 삐죽이며 이죽거리고 있었다.

“뭐냐, 너?”

명수가 코웃음 치며 병억을 쳐다보았다. 병억이 고리눈을 뜨고 명수를 쳐다보았다.

“씨발, 졸라 잘난 척 오지다고.”

“뭐야!”

명수가 일어서려는 걸, 단유가 붙잡았다.

“놔 봐!”

단유는 대답 없이 세게 끌어당겨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왜! 저 새끼가 먼저 시비를 걸잖아?”

“시비를 건다고 다 받아주지 마.”

“왜?”

“잊었어? 학기 초에 있었던 일?”

“그럼 저 새끼 지랄하는 거 그냥 눈감아?”

“응. 눈 감아.”

병억이 두 줄 떨어진 자리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바라보다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븅신들.”

“누가 병신인데? 맞고 쫄아서 얌전히 있더니 무슨 간댕이로 시비냐?”

“쫄긴 누가 쫄았다고 그래, 븅신아.”

아마도 일부러 ‘븅’이라는 발음을 내는 것이겠지. 아니면 ‘병’자를 발음하지 못하는 구강구조를 가졌나?

“병신은 지가 병신이면서.”

“뭐 이 새끼야? 뒤질래?”

“왜? 또 한 번 붙을까?”

명수가 벌떡 일어나더니 턱을 삐죽삐죽 내밀며 병억과 붙을 기세를 보이자, 병억도 껄렁대며 손가락을 까닥까닥거렸다.

“네가 와 이 새끼야.”

“와, 나. 미치겠네. 단유야. 이래도 참아야 하나?”

이미 주변 아이들은 입을 다물고 흥미로운 상황으로 전개되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중이었다.

“참아야 돼.”

“이걸 왜 참는데?”

“참지 마, 새끼야! 덤벼, 덤비라고.”

단유는 명수의 소매를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은 채 병억을 쳐다보았다. 저건 진짜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라기보다는 일부러 시비를 걸어서 싸워보자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당장 싸우자는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건, 악기로 가득 찬 눈처럼 보여도 간간이 보이는 떨림과 입꼬리의 어색한 움직임 때문이었다.

문득 며칠 전, 도하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라 단유는 병억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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