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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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명수의 말을 무시하고 하은에게 시선을 던졌다.
“선생님. 이만 가보세요. 여긴 제가 지킬게요.”
“가긴 어딜 가, 내가?”
“학원이요.”
“괜찮아. 명수가 아픈데 어떻게 그래?”
“선생님, 저 괜찮아요. 약 먹었더니 좋아졌어요. 의사 선생님도 포도당 주사만 맞으면 금방 나을 거라고 그랬잖아요? 이참에 푹 쉬는 건데요, 뭐.”
하은이 과장되게 눈썹을 추켜세우며 놀란 척을 했다.
“뭐니, 너? 기껏 선생님이 너 걱정돼서 옆에 있겠다는데, 내가 옆에 있으면 귀찮니? 옆에 있으면 쉬는 게 아냐?”
“솔직히 뭐···.”
시치미 뚝 떼고 당연한 걸 묻는다는 명수의 표정.
“왜 말을 하다 말아? 진짜 선생님이 갔으면 좋겠니?”
단유는 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려는 만담을 조기에 붙잡았다.
“그만 해요. 다른 사람도 보고 있는데 부끄럽게 그래요. 명수 말대로 병간호가 크게 필요하지도 않은 상황 같으니 선생님은 이만 가서 일 보세요.”
“오오, 말인즉슨 가서 돈 벌어와라?”
“왜 또 그래요.”
명수가 또 손가락을 퉁겼다.
“맞네, 그 말이네. 선생님, 단유가 돈 벌어오라잖아요. 단유가 시키면 해야죠.”
이번엔 단유가 발끈했다.
“야, 내가 언제 그런 말 했어?”
“아니야? 내 귀엔 그렇게 들리는데?”
“그치? 네 귀에도 그렇게 들리지? 저게 요새 돈 번다고 위아래 구분을 못 하는 거 같애. 명수야, 네 친구 점점 건방져지는 것 같지 않아?”
“저도 요즘 조금 그런 걸 느끼고 있어요. 며칠 전에는 저보고 돈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기가 막혀서. 단유가 입을 벌리고 바라보자, 하은이 옳다구나 명수의 말을 받았다.
“어머, 그게 정말이야? 단유가 너보고 그랬어? 지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그래? 돈 번다고 유세 떠는 거네?”
“맞아요, 유세. 단유가 요새 유세 떨어요. 되게 많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죽이 척척 맞네요, 두 사람.”
“그럼 선생님이랑.”
“제잔데.”
두 사람이 서로 바라보며 키득거리는 모습이 참 가관이라 헛바람을 뱉는데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태가 양 볼에 익살을 한 주머니 가득 채우고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지태, 너 아무 말 하지 마라. 너까지 끼어들면 진짜 정신없다.”
“···아, 알았어.”
지태는 단유의 서늘한 눈초리에 찔끔 놀라며 입을 닫았다. 그 모습을 본 후 다시 명수를 보자, 명수는 슬금슬금 누우며 담요를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하은을 바라보니, 하은이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쟤는 왜 저렇게 농담을 못 받아줘? 괜히 무섭게.”
그러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너한테 쫓겨나는 게 아니라, 내가 갈 때가 돼서 가는 거야. 원래 가려고 했어.”
“다녀오세요. 아, 그리고 끝나고 집으로 오세요.”
“집으로?”
“네. 말 나온 김에 냉장고 청소나 하죠.”
“여기는 어쩌고?”
단유가 명수를 바라보았다. 명수는 코 밑까지 담요를 끌어올렸다.
“지 말대로 아픈 거 하나 없다니까, 굳이 자리 지킬 필요 있나요? 저도 집에 갈 거예요.”
“단유야!”
명수의 놀람은 한 손을 내저음으로써 물리쳤다.
“말 나온 김에 묻자. 너 도대체 뭘 먹었던 건데? 대충 살피긴 했어도, 냉장고에서 상한 음식 같은 건 없던데?”
“아, 어제저녁에 책 읽다가 조금 출출하기도 하고 목도 마르고 그래서 우유를 마셨는데, 그게 좀 탈이 났었나?”
책이라면 ‘만화책’이겠지. 그런데 우유라면 냉장고에 있었을 텐데, 냉장고에 있는 우유를 먹고도 식중독이 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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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것으로 조회를 마치도록 하죠. 아, 그 전에 임 선생님.”
주임의 부름에 일어서려던 희선이 주춤거리며 대답했다.
“네?”
“윤 선생님 반에 학생 한 명이 식중독이라고요?”
“네, 선생님.”
희선은 여전히 앉지도 서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였다.
“다른 반 선생님들도 애들 건강 관리 차원에서 공지 한 번 하세요. 음식 섭취 시 주의하도록 이르고요. 실제로 식중독은 여름철보다 봄 가을에 더 많이 발생한다고 하니까요.”
봄과 가을에 식중독이 많이 발생하는 이유는 음식이 잘 변질되어서라기 보다는 여름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람의 주의가 덜한 계절이기 때문이다. 여름은 음식이 잘 상한다는 것을 알기에 음식 보관이나 섭취에 주의를 많이 기울이지만, 봄과 가을에는 음식이 변질될 수 있음에도 잘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다.
“학생도 이와 같습니다. 너무 특정 학생에게만 신경이 편중되면 다른 학생들에게 소홀할 수 있으니 그 점 유의해서 학급 관리 부탁드립니다.”
공평한 시선, 공평한 처우. 형평성은 교사의 책임감과 직결된다.
“그리고···.”
교장, 교감, 주임. 이분들은 말이 끝날 듯 끝날 듯하면서 끝나지 않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희선은 아침부터 강제로 스쿼트를 해야 했다. 강제로 하는 운동은 효과가 제로다.
“···그러니까 목마르다고 식수대 물 함부로 마시지 말고, 매점에서 빵 같은 거 사 먹을 때도 꼭 유통기간 확인하고. 알겠지?”
“네!”
“하여튼 대답들은 잘해요. 아무튼, 만약에 교실에서 갑자기 아프면 선생님한테 바로 알리고, 선생님이 없으면 반장에게라도 알려야 한다. 알겠니? 반장은 지체없이 선생님께 보고할 수 있도록 하고. 그럼 여기까지. 수업 때 졸지 말고.”
희선은 출석부를 챙겨 들고 교무실로 향하다, 2반 담임 선생님과 만났다.
“조례 끝났어?”
“네.”
2반 담임 선생님은 희선보다 5년 빠른 선배 여교사였다.
“선생님은 좋겠다.”
“뭐가요?”
“반에 사고가 없잖아?”
“없긴 왜 없어요. 당장 식중독 환자도 나온 판국인데.”
“그 정도는 사고 축에도 못 들어. 식중독이야 병원에서 며칠 쉬면 금방 낫는 병인데. 3일 정도면 바로 퇴원일걸? 그리고 5반에는 단유가 있잖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 시치미를 떼? 애들끼리 하는 말 모르니? 단유가 학기 초에 싸움을 벌이는 건 1년 동안 사고가 안 나도록 ‘액땜 굿’하는 거라고.”
“그건 애들 말이죠.”
“단유네 반이 다른 반에 비해 유독 조용한 건 사실이지.”
“대신 단유가 제일 큰 걸 터뜨리곤 했었죠.”
굳이 상관관계를 따지면 작년 초겨울 즈음 벌어졌던 교복 반대 집회의 시작은 단유의 생방송 발언 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학급 담임 입장에서는 반 조용하고, 반 평균 올라가는 일만 있으니 얼마나 좋아. 단유도 처벌을 받진 않았고. 결국, 업무평가에는 결과만 올라가는 거야.”
“아, 그러고 보니 곧 ‘자평’해야 하네요.”
새 교장 선생님 취임식 때 교장이 직접 제안한 ‘자기 평가 제도’에 따라 자신에게 ‘성적’을 매겨야 했다.
“전 이거 좀 불편해요. 마치 북한에서 ‘자아비판’하는 거랑 똑같은 거 아니에요?”
“임 선생, 그렇게 생각하면 밑도 끝도 없는 일이야. 일본에서 먼저 도입한 제도라잖아? 공정한 평가를 위해서라는 취지에는 공감을 해줘야지.”
“뉘앙스만 들으면 선생님도 별로이신 거 같은데···.”
“그럼 누군 좋겠니? 그런데 어쩌겠어? 교장 선생님인데. 군대에 그런 용어 있다잖아? 까라면 까라고.”
“여기가 무슨 군대도 아니고.”
어느새 교무실에 다다른 두 선생님은 교무실에 들어서면서 각자의 자리로 가기 위해 갈라졌다. 본인 자리에 와 털썩 앉은 희선은 첫 수업 일정을 살핀 뒤 잠깐 시간이 남는 것을 확인하고는 의자에 계속 앉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학년 주임 선생님의 말씀처럼, 편중된 시선이 소외학생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일견 이해가 가는 부분이긴 했다. 하지만 시선이 절로 가게 하는 아이가 있다면?
김단유, 그 아이는 블랙홀 같다. 자신의 신경만 끌어당기는 게 아니라, 온갖 소음과 소란을 모두 흡수해버리는 것 같았다. 2반 담임의 말처럼 첫날 이후, 단유네 반은 시끄럽게 떠드는 일은 물론이고 수업 태도도 좋다고 소문이 났다. 몇몇 아이들의 성적 하락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치트키 같은 단유의 성적이 반 평균을 쭉쭉 끌어 올려주니 다른 담임들이 부러워할 만도 하다.
실제 담임을 맡은 바로서 솔직히 평가하자면, 5반은 ‘무난한’ 반이었다. 자신이 보지 못한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귀에까지 들어오는 일들은 전혀 없다. 다른 반의 경우에는 온갖 일탈, 사고, 심지어는 가벼운 시비에서 이어진 몸싸움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건너 책상, 옆 책상 할 것 없이 소란스러운데, 자신의 책상만 고요하다. 그러니 남들은 부러워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희선은 그게 마치 태풍 속 눈처럼 느껴졌다. 거대한 태풍의 한가운데에서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착각을 느끼게끔 하는 현상. 그 고요가 길고 깊을수록 그 뒤에 따라올 일들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 생각을 2반 담임에게 들려줬다면 ‘오버하지 마’라고 한 소리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학교 전체에 울렸다. 희선은 상념을 갈무리하고 일어나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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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김단유.”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에 들려오는 소리에 돌아보니 도하가 단유를 부르고 있었다. 지가 무슨 선비라도 되는지 팔자걸음으로 느긋하게 걸어오는 모습에 단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단유와 같이 있던 아이들이 슬금슬금 걸음을 빨리하여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뭐야?”
“뭐긴. 같이 매점이라도 가자고.”
“너희 반 애들이랑 같이 가.”
“이제 같은 반 아니니까 모른 척하자 이거야?”
“너희 반에는 친구 없어?”
“내가 친구 같은 걸 만들겠냐?”
비록 도하가 예전의 삶을 버렸다 해도 다른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무서울 수 있는 도하였다. 2학년 때 얌전해졌다지만 단유네 무리 외에는 도하에게 다가가는 아이들이 없기도 했었고, 도하도 별로 다가가려는 노력이 없었다.
“뭐 사줄 건데?”
“네가 사줘라.”
“내가 왜? 설마 삥 뜯는 거야?”
“그래, 오늘은 오랜만에 삥 한 번 뜯자. 라면 사줘.”
이미 단유와 같이 있던 아이들은 먼저 교실로 돌아가고 없었다.
“가자.”
단유는 도하를 데리고 매점으로 향했다.
“너 밥 안 먹었어?”
“먹었어.”
“그런데 그게 들어가?”
“네가 음료수 마시는 거랑 똑같아.”
“내가 마시는 건 그냥 물이고, 네가 먹는 건 탄수화물이 다량 포함된 음식이잖아. 같을 수 없지.”
“아 몰라. 그냥 먹고 싶어서 그래.”
후루룩 먹어치우던 도하는 금세 컵라면 한 그릇을 비웠다.
“아, 잘 먹었다.”
배를 툭툭 두드리며 만족스런 표정을 짓던 도하는 단유를 바라보며 물었다.
“단유 너, 조심해야겠더라.”
“응?”
“너희 반에 병억이가 널 저격할 거란 소문이 있어.”
“저격은 무슨. 그리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 꼬봉이 말해주더라.”
“꼬봉? 너 다시 그쪽 길로 발 들인 거야?”
“아니. 그냥 가만히 있는데 와서 꼬봉 시켜 달라는 애들이 있어서 그래.”
“가만히 있는데 와?”
“그런 애들 많아. 작년에도 병호가 나한테 와서 꼬봉하겠다는 걸, 네가 막았었잖아.”
“그런 적이 있었나?”
힘이 약하고 보호가 필요하다고 스스로 판단한 아이들은 자신을 지켜줄 적당한 우산을 든 이에게 먼저 다가간다. 우산을 든 이는 그런 이들을 ‘꼬봉’이라고 부르며 우산 아래로 불러들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아무튼 몰래 밑 작업을 한다는데, 우성이도 판에 끼었나 보더라.”
유우성. 2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도하와 친구였다가 도하가 개심한 이후, 홀로 단유와 대적했던 아이. 하지만 단유에게 혼쭐이 난 뒤로 쥐죽은 듯 얌전히 지내던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은 단유가 또 한 명의 일진을 물리쳤다, 고 소문을 냈지만, 우성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축구대회 때 응원하러 온 상미를 불쾌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 아니라 음흉한 생각까지 품었었고, 이를 알게 된 단유가 분노로 가득 차 우성을 힘으로 제압하고 협박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다시 복수를 꿈꿨고, 여전히 그 복수는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도하는 단유가 마시던 물을 빼앗아 마시며 입을 헹궜다.
“너도 참. 인생 참 힘들게 산다.”
도하가 혀를 차며 말했다.
“뭐가?”
“적을 만드는 스타일인가 봐.”
적을 만든다, 라.
“그거 말해주려고 라면 사달란 거였어?”
“정보료라 생각해.”
“걱정해줘서 고맙다.”
“걱정은 무슨.”
비록 표현은 안 했지만, 도하는 단유가 고마웠다. 단유 덕분에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기도 했거니와 오랜 시간 그를 괴롭혔던 트라우마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명수 나으면 다 같이 노래방이나 가자.”
“그래.”
“먼저 간다.”
도하는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 뒤돌아섰다. 단유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하여튼 저 뜬금없는 인간은 끝까지 컨셉으로 밀고 갈 모양인가보다.
“적이라니.”
무슨 전쟁이라도 난 줄 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