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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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야. 나 아파.”
새벽 운동을 위해 일어난 단유가 명수를 깨워주기 위해 그의 방에 들어갔을 때, 명수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단유를 불렀다. 보기에도 얼굴이 하얗게 질린 데다 식은땀을 흘려 옷이 젖어 있었다.
“선생님!”
명수를 부축한 채로 소리를 질러 하은을 깨웠다. 곧 하은이 졸린 눈을 하고 나타났다.
“무슨 일인데 새벽부터 부르니?”
“명수가 아파요!”
비몽사몽 잠이 덜 깼던 하은은 신음을 흘리는 명수의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차 갖고 나올게, 먼저 명수 데리고 나가!”
그렇게 지시를 내린 하은은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간단히 옷을 챙겨 입고 자동차 키를 챙겨서 나왔다. 그 사이 단유는 명수를 둘러업고 집을 나가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도착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집 문이 벌컥 열리며 하은이 뛰쳐나왔다. 셋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어떡해? 많이 아파?”
“선생님, 아파요.”
“어디가? 어디가 아픈데?”
“배가, 배가 너무 아파요.”
비록 명수를 둘러업고 나오긴 했지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외출 나갔던 이성이 돌아온 단유는 침착하게 제안했다.
“구급차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여기서 병원이 멀지 않아. 이 새벽이면 5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하은의 말처럼 병원까지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물론 하은이 제 속도를 지키며 달리지는 않았다. 아직 6시도 되지 않은 새벽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맹장이나 복막염 같은 거면 빨리 가야 돼.”
단유는 뒷자리에서 명수를 부축한 채로 다른 손으로는 명수의 손을 꼭 붙잡았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그렇게 되뇌었다.
“식중독입니다.”
“식중독이요?”
“네.”
집에 상한 음식 같은 게 있나를 고민할 때, 의사 선생님은 친절하게 식중독 예방법을 알려주는 대신 병원 원무과에 가서 약 받으라고 일러주고는 다른 환자에게로 향했다.
하은은 명수 곁에 앉아서 잠이 든 명수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 나는 줄 알았잖아.”
촉촉한 하은의 눈을 피해 단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는 가운데 묘하게 가라앉은 공기가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 멈춰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새벽임에도 응급실에는 사람이 많았다. 모든 침상이 꽉 들어찬 건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응급실을 찾는 모양이었다. 신음을 흘리며 죽는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지만, 낮게 코를 골며 잠을 자는 이도 있었고, 도란도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었다.
드르륵 바퀴 끌리는 소리가 나며 응급실 자동문이 열리더니 주황색 유니폼을 입은 119 구급대원들이 이동침상을 끌며 나타났다. 다른 환자를 보던 의사가 곧 그쪽으로 향했다. 단유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잘 들리진 않지만, 구급대원들이 의사에게 뭔가를 설명하고 의사는 간호사와 함께 빈 침대로 환자를 인도했다.
다시 명수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링거를 꼽고 잠이 든 명수가 눈에 들어왔다. 응급실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통증에 이를 악물고 신음을 흘리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다행히 진통제를 맞고 잠이 든 명수는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집에 상한 음식 같은 게 있었어?”
하은의 물음에 단유는 고개를 내저었다. 곰팡이가 필 정도라면 모를까, 음식이 상했는지 안 상했는지는 눈으로 봐선 알 수 없었다. 눈으로 알 수 있는 정도라면 명수도 먹지 않았을 테고 말이다.
“모르겠어요.”
하은은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단유를 돌아보았다.
“우리 냉장고 청소 언제 했었지?”
“냉장고 청소를 한 적이 있나요?”
학교는 가야 하지 않겠냐는 하은의 주문에 단유는 어쩔 수 없이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들어온 단유는 먼저 냉장고부터 살폈다. 명수나 하은이 가끔 야식으로 먹기 위해 주전부리를 사놓은 것들도 있었고, 반찬 가게에서 사다 놓은 반찬들도 적지 않게 있었지만 그중 어떤 것이 상한 것인지는 쉽게 파악하기 힘들었다. 후각이 예민한 편이라 냄새가 이상한 것이 있다면 진작에 찾았을 테지만, 그런 냄새도 맡기 어려울 뿐 아니라 냉장고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냉기에 섞인 냄새 덩어리는 이것저것 섞인 냄새라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청소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냉장고 안쪽 깊숙이에 생긴 성에라든가, 냄새 덩어리 속에 묘하게 섞인 쿰쿰한 냄새도 어쩌면 청소를 안 해서 생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여태 냉장고를 청소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적이 없었다. 청소해야 한다고 알려준 이도 없었고, 청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한 적도 없었다. 그저 정리만 잘하면 되겠거니 하며 내버려 뒀던 것이다.
자전거를 끌고 홀로 등교를 하던 중에도 단유는 명수에 대한 걱정과 냉장고 청소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병원에 갔다 오느라고 등교가 늦은 단유가 교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1교시가 진행 중이었다. 국어 과목을 수업 중인 선생님께 간단히 사정을 설명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교무실로 향했다.
“명수는 괜찮니?”
“네. 제가 나올 때는 자고 있었는데요,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밤새 통증으로 잠을 못 자고 있다가 진통제 때문에 아픈 게 사라지니까 피로가 몰려 잠이 든 거라고 하더라고요. 자고 나면 괜찮을 거라네요.”
“그럼 다행이구나. 너는? 너는 괜찮고?”
“네.”
“그래, 알았어. 들어가 봐.”
“네, 선생님.”
단유는 담임 선생님께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몰려와 물었다.
“반장, 명수는?”
“명수 아파서 병원에 있어.”
“아파? 왜? 다쳤냐?”
“식중독.”
“그럼 오늘 결석이네? 오진다!”
아이들은 식중독이란 말에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넘겼다.
“요새 점점 더워져서 교실에 앉아 있기도 힘든데. 나도 어디서 뭐 좀 주워 먹어볼까?”
“혼자 먹고 째게? 하려면 다 같이 해야지.”
“그거 웃기겠다. 우리 반 애들 다 같이 식중독 걸리면 뉴스에 날 거잖아? 그러면 급식 막 조사하러 오고 그러는 거 아냐?”
“애들이 수업 째려고 일부러 상한 음식 주워 먹었다고 하면 인터넷에 기사 뜨면 지린다고 댓글 달리는 거 인정?”
“그 밑에 이거 실화냐, 이러면서 댓글 달릴 각 인정?”
“인정!”
“역대급 주작이라고 난리 날걸?”
농담처럼 주고받는 이야기들의 가벼움은 ‘식중독’이란 질병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일까? 아니면 자기 일이 아닌 것에게는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구멍 난 백지, 혹은 고장 난 저울.
하지만 비웃지도,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마치 단유가 냉장고 청소를 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과 비슷할 것이다. 배우지 못하거나, 가르치는 이가 없으면 모르고 사는 것이다. 언젠가는 배울 수도 있고, 혹은 평생 배우지 못한 채 살아갈 가능성도 있다. 시쳇말로 ‘실전’을 거쳐야만 알 수 있는 이도 있을 것이다.
“식중독 그거 심각한 병이다.”
단유의 말에 ‘아무 말 대잔치’를 이어나가던 아이들이 돌아보았다.
“식중독 방치하면 사람 죽을 수도 있어.”
“에이, 오버 쩐다, 반장. 나도 예전에 식중독 걸려봤거든? 그거 처음에만 조금 아프고 마는 거거든.”
“대부분의 식중독은 구토나 설사로 부족해진 수분을 보충만 하면 나을 수 있긴 해. 하지만 때로는 장기가 손상되거나 열이 심하게 나서 항생제 치료를 병행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 약한 식중독이라면 네 말대로 약간의 통증과 설사 증상만 있을 수도 있겠지만, 심한 경우라면 앞서 말한 증상에 구역질과 심한 복통은 물론이고, 사망에 이른 사례도 있어. 독일에서 장출혈성 대장균 식중독 감염으로 14명이 사망한 사례도 있거든? 미국도 연 5천 명 정도가 식중독으로 사망한다는 보고가 있고.”
아이들은 단유의 말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런 것도 알아?”
“와, 역시 반장은 모르는 게 없네. 쩐다!”
“반장 이야기 듣고 나니까 갑자기 식욕 돋네. 매점 갈 사람?”
“야, 지금 5분도 안 남았어.”
“졸라 뛰면 되지, 새꺄.”
“그거 말할 시간에 가겠다.”
“나도!”
몇몇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 교실 밖으로 향했다. 단유의 지식 대방출에서 ‘반장은 백과사전’이란 결과만 도출해 머리에 심은 아이들은 뇌의 나머지에 ‘쉬는 시간은 매점이 진리’라는 생각을 채워 넣으며 복도를 뛰어갔다.
“오늘 명수 아파서 결석한 거 알지? 점점 여름이 다가오는데, 날이 더울수록 음식이 잘 상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건 알 거야. 하지만 식중독은 여름에만 잘 나는 게 아니고 봄 가을에도 많이 발생하는 질병이야. 그러니까 항상 음식을 먹을 때 유통기한 같은 거 잘 확인하고 상한 음식 먹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알겠니?”
“네!”
대답은 큰 목소리로 열심히 외치는 아이들.
“너희 이제 기말시험 얼마 안 남은 거 알지?”
갑작스런 화제 전환에 아이들은 ‘에이’ 나 ‘우우’ 같은 야유의 목소리가 합창처럼 터져 나왔다.
“조용! ···학교 끝나고 딴 데로 새지 말고 제발 집으로 들어가자, 응? 괜히 쓸데없는 곳 돌아다니다가 몸 상하고 시간 낭비하는 일 없게 해라. 그래야 기말시험도 잘 칠 수 있는 거야.”
선생님은 종례를 마치기 전, ‘명수에게 안부 문자라도 하나씩 보내줘’라는 말을 덧붙인 후 교실을 나섰다. 우르르 빠져나가는 학생들 사이로 지태와 채윤이 들어왔다.
“가자.”
두 사람은 점심시간에 명수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래서 학교 마치고 같이 병원을 가자고 먼저 제안을 해왔다.
“너 학원 안 가?”
“친구가 아파서 병원에 있는데, 어떻게 학원을 가냐?”
지태의 말에 단유가 피식 웃었다.
“말은 고마운데, 어째 핑계처럼 들린다?”
“네 착각이다.”
“채윤이 넌?”
“병원 들렀다가 가도 돼. 어차피 병원에서 학원까지 별로 멀지도 않은데.”
“그래.”
세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참고로 지태와 채윤도 자전거를 마련했다. 채윤은 잘 모르겠고, 지태는 ‘단유’의 이름을 팔아서 샀다, 고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 대가, 라고 표현하긴 그렇지만 자전거 가격과 동일한 가치의 성적 상승을 위해 학원에 다녀야 하는 지태였다. 솔직히 여느 스타 강사보다 더 족집게 같은 단유와 시험공부를 하는 게 성적을 올리기엔 더 좋다. 하지만 학원도 같이 다니면 ‘시너지’ 효과가 날 거라고 굳게 믿는 지태의 부모님이셨다.
“선생님, 저희 왔어요.”
“왔어? 지태랑 채윤이도 왔네?”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지태 넌 학원 다닌다면서?”
지태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친구가 아픈데 어떻게 병문안을 안 올 수 있어요? 그치, 명수야?”
단유가 떠날 때와 달리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던 명수가 피식 웃었다.
“개구라 떨지마. 너 학원 땡땡이치려고 온 거잖아?”
“와, 친구의 진심을 이렇게 곡해하다니! 섭섭하다, 진짜.”
“내가 채윤이의 진심은 믿겠는데, 너의 진심은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내가 채윤이보다 못 믿을 놈이란 말이야?”
“당연하지. 너라면 채윤이를 믿을래, 너를 믿을래?”
“나라면 당연히, 채윤이를 믿지.”
명수와 지태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명수가 곧 미간을 좁히자 지태가 얼른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많이 아파?”
“아냐. 많이 나았는데, 웃으니까 배가 조금 당기는 거 같아서 그래. 아프진 않아.”
단유가 가방을 침대 옆에 벗어두며 끼어들었다.
“지금은 진통제 때문에 아픔을 덜 느끼는 거지, 완전히 나은 건 아니라서 그럴 거야. 게다가 새벽까지 아픈 걸 무식하게 참느라고 배에 얼마나 힘이 많이 들어갔겠어? 아마 근육이 조금만 당겨도 아플 거야.”
하은이 듣다가 풋, 하고 웃음을 지었다.
“왜요?”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마치 의사 선생님 같아서 그래.”
명수가 손가락을 퉁겼다.
“야, 네가 의사하면 좋겠다. 내가 축구 하다 다치면 너한테 찾아가서 고쳐달라고 하면 병원비 안 내도 되는 거 아냐?”
“병원비 생각하기 전에 다칠 생각을 하지 마.”
“축구 하면서 어떻게 안 다쳐? 축구 선수랑 부상은 부부 같은 거랬어.”
···별 이상한 걸 다 가르치네, 축구부 감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