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6)
-------------- 496/952 --------------
“드디어 오늘 마지막 수업이네요?”
선생님은 도연과 단유 두 학생을 바닥에 앉혀 놓고 마주 앉았다.
“두 사람 다 수고 많았어요.”
“선생님도 수고 많으셨어요.”
도연이 나서서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제가 보기에 두 사람 모두 연기에 재능이 있어요. 비록 속성 초단기 수업이었지만, 두 사람이 보여준 발전 가능성만큼은 제가 이제껏 만났던 학생들 중에서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예요.”
“고맙습니다.”
선생님은 고개를 슬며시 끄덕이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호흡이 참 잘 맞는 거 같아요.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예요.”
배려? 단유와 도연이 서로를 바라보았다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연기는 호흡이에요. 상대와의 호흡, 관객과의 호흡, 감독과의 호흡. 그 모든 호흡이 일치해야 비로소 연기가 완성된다고 할 수 있어요. 어려울 것 같죠? 어려워요. 하지만 그 어려운 걸 해내는 이들이 바로 연기자들이고 배우들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제가 보증하죠.”
“고맙습니다, 선생님.”
예의상 건네는 덕담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를 판단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나아졌다는 그 말이 도연은 너무 듣기 좋았다.
연습실을 나오며, 도연이 말을 건넸다.
“내일이 마지막이네요.”
“네.”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도연 씨도 수고 많으셨어요. 아, 제 친구가 사인 고맙다고 인사 전해달라더군요.”
“인사는요. 그게 저희가 팬들에게 해드릴 수 있는 일인데요.”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내일 뵐게요.”
“아, 네.”
단유가 먼저 작별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아, 저기요.”
“네?”
“저기 괜찮으시면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어요?”
“네?”
“지금 저희 매니저님이 아직 안 오신 거 같아서요. 오실 때까지만 같이 있어 주시면 안 될까요?”
도연은 붉어진 볼을 감싸며 수줍게 부탁했다. 단유는 도연을 보다가 학원의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매니저님 오셨네요.”
“네?”
때마침 매니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끝났구나?”
“네.”
“가려고?”
“네, 먼저 가볼게요.”
“그래. 도연아, 너도 빨리 준비해. 다음 스케줄 가야 돼.”
“네.”
도연은 학원을 벗어나는 단유를 보다 옷가지를 챙겨 들고 탈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매니저가 지켜보았다.
“에휴.”
저 나잇대 애들의 연애 감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본인도 그 시절을 거쳐왔고, 어린 애들이 어른들의 눈을 피해 연애하는 장면을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연애를 해도, 자신의 아이들은 안 된다. 이제 겨우 뜨기 시작한, 1년 차 아이돌이다. 회사 대표 입장에서야 엄청난 금액의 투자와, 그 투자에 기대어 성공을 거둔 ‘아이돌’로 인식되겠지만, 매니저에게 리본 소녀와 도연이는 동고동락한 자식들이나 마찬가지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건 부모의 공통된 마음이다.
지금은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다. 잠깐의 성공에 취해 무리하거나 안주하면 더 높은 곳으로 오르지 못한다. 더 조심하고 주의해야 할 시기다.
다행이라면 단유가 잘 ‘협조’해 줘서 불편한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매니저는 며칠 전의 상황을 잠시 떠올렸다.
****
단유는 매니저의 뒤를 따라 번화가에 있는 어떤 식당에 들어갔다.
“예약하셨나요?”
머리를 곱게 빗겨 넘긴, 하얀색 유니폼의 단정한 여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예. 심태성이란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을 겁니다.”
“잠시만요.”
곧 직원은 두 사람을 데리고 안내를 시작했다. 홀을 지나니 어슴푸레한 조명의 좁은 복도가 나타났고, 직원은 가장 안쪽 방을 향해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두 사람을 모셨다.
“더 오실 일행 계신가요?”
“예. 조금 있다 한 분 더 오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벨을 누르시고요,
직원이 인사하고 나간 뒤, 단유와 매니저는 검은 원목 식탁의 한 편에 나란히 앉았다. 아마 맞은편은 회사 대표님이 앉으실 자리라서 미리 비워둔 것이겠지.
“이런 곳은 처음이지?”
“아니요.”
으레 처음일 거라고 생각했던 매니저가 살짝 놀랐다는 듯 단유를 돌아보며 물었다.
“언제?”
그러고 보니 그때도 엔터 기획사의 대표랑 가졌던 식사자리였는데, 또 이렇게 되었다. 잘 얻어먹는 복이라도 타고난 모양이다.
“작년에요.”
“아, 그래. 나름 잘 나가는걸?”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다른 직원이 물과 컵을 건네주고 떠났다.
“어, 저기 물어볼 게 있는데.”
매니저는 목이 탄다는 듯 물을 한 번에 벌컥 마신 후, 단유를 돌아보았다.
“도연이 말이야. 혹시 두 사람 별일 없지?”
단유는 빤히 매니저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없어요.”
“의심해서 물어본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실 도연이는 어렸을 때부터 회사에서 키웠어. 그래서 남자도 잘 모르고···.”
단유는 매니저에게서 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돌의 매니저란 사람들은 저 멘트를 똑같이 외우도록 교육을 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 걸 생각하면, 나윤이 꽤 과감했던 셈이다.
“매니저님. 저 정말 관심 없어요. 연애 별로 하고 싶지도 않고요.”
“아, 뭐, 그렇다면 다행인데.···그런데 요즘 도연이가 부쩍 널 의식하는 것처럼 보여서 말이야. 아무래도 남자에 대한 환상도 많이 가질 나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널 좋게 봤던 거겠지. 이해하지?”
전혀 이해가 안 된다. 남자에 대한 환상과 본인이 어떻게 결부될 수 있는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사람처럼 멋있는 척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늘 같은 교복에 짧은 머리로 나타나는 단유였으니,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연애 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왜요?”
“뭐, 그게,···자칫 다른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말이기도 하고···.”
16살의 새파란 남자아이가 연애에 관심이 없어요, 여자에 관심이 없어요, 라는 말을 하면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만약 생각이 모자라거나 배려가 없는 인간이었다면 ‘너 남자 좋아하니’ 같은 질문을 던졌을 테지만, 자신은 사려 깊은 어른이고 이 자리는 대표님이 나오실 자리였다. 혀끝에 맴돌던 질문은 꿀꺽 삼키고 점잖게 충고하는 선에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잠시 후 말끔한 인상의 40대 젊은 대표가 나타났다.
“심태성이라고 한다.”
“반갑습니다. 김단유라고 해요.”
이후 식사자리에서 대표는 단유를 떠보며 연예계 쪽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냐고 물었고, 단유는 그럴 의사가 없음을 재확인 시켜줌으로써 싱거운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아쉽네. 말로 듣는 것보다 훨씬 재능이 넘쳐 보이는데.”
“고맙습니다만, 정말 생각이 없어요. 아직은요.”
“그래, 혹시 나중에라도 생각이 생긴다면 우리 회사에 연락을 한 번 해주겠니? 우리 이 매니저한테 연락해도 좋고.”
“알겠습니다.”
“에이바운스에 연이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는데, 우리 회사가 에이보다 훨씬 큰 회사인 거 알지? 만약 성공하고 싶다면 우리 회사를 선택하는 게 좋을 거야. 아, 이번에 그 회사에서 가디스R이 컴백한다고 하던데 들었나?”
“예전에 듣긴 했는데, 언제 컴백하는지 까지는 들어보지 못했어요.”
“이번 주에 컴백한다고 하더군.”
나윤 누나가 드디어 컴백을 하는구나. 뭔가 미묘하고 복잡한 심경이 들끓었다.
****
드디어 마지막 영상 촬영이 끝났다. 그리고 단유는 홍보용 사진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로 갔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리본 소녀 전부를 만나게 되었다.
“반갑습니다. 리본 소녀입니다.”
시끌벅적한 스튜디오 안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그녀들을 보며 단유는 예전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곧 지워버리고 도경에게로 갔다.
“오늘이 진짜 마지막이네?”
“그러네요.”
도경은 서비스라며 단유의 얼굴에 분을 찍어 발랐다. 마치 재작년의 그 날처럼. 단유는 눈을 감고 도경의 손에 얼굴을 맡겼다. 도경은 익숙한 솜씨로 도구를 바꿔가며 촬영용 메이크업을 완성 시켰다.
“어떠니?”
“좋네요. 고맙습니다.”
“언제 우리 따로 만나서 밥이라도 같이 해야 하는데 말이야. 늘 스케줄이 있어서 같이 식사를 못 했어.”
“다음에 기회가 있겠죠.”
도경은 슬쩍 주변을 살핀 뒤,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 같이’ 식사 한번 하자고.”
‘다 같이’에 포함되는 이가 단유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다면 별로 내키지 않을뿐더러, 왜 이렇게 끈질기게 선을 닿게 해주려는 건지 궁금해진다.
“애가 너무 섭섭해하더라고. 보기 안타깝잖니? 사귀라고는 말 못해도 그냥 식사 정도는 괜찮지 않겠어?”
“그건 매니저님이 허락하셔야 할 문제 같네요. 도연 씨 스케줄은 매니저님이 관리하시는 거잖아요.”
“그렇지. 그렇긴 한데, 일단 네가 허락을 해야 매니저에게도 물어볼 수 있지.”
단유는 이차 관문, 매니저는 최종관문 같은 거다.
“불편해요.”
“불편해?”
“싫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부담스럽죠. 마주 보고 있는 것도 점점 부담스러워져요. 제가 그 마음을 받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뭔가 느끼한 걸 한 병 마신 기분이야. 속이···.”
도경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싫다는데 어쩔까. 오히려 같이 있게 되면 단유 뿐만 아니라 도연도 불편해질 것이다. 후회할 수도 있고.
‘그래, 어차피 연예인인데 차라리 시작을 안 하는 게 맞는 거겠지.’
드디어 도경의 오지랖도 끝이 났다.
모든 촬영이 끝나고 ‘다정하게’ 사진도 찍었다. 단유가 찍고 싶어서 찍은 게 아니라, 연예 신문 기자가 와서 찍자고 부탁을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두 사람이 영상 주인공이죠? 두 사람은 앞에 나란히 앉고, 뒤에는 언니분들이 서주실래요?”
도연은 다리를 가지런히 접어 단유의 옆자리에 앉았다. 볼이 살짝 붉어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게 나름 애교스러운 외모와 맞물려 사진 기자의 흥분을 끌어냈다.
“한 장만 더 찍어요! 표정 좋아요!”
그 사진은 곧 인터넷 연예면에 올랐고, ‘교육부 홍보모델 리본 소녀’라는 해쉬태그와 함께 SNS 상에서 복제되어갔다.
단유네 반에서 ‘도연빠’라고 했던 소년은 핸드폰 속의 사진과 벽에 걸린 사인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했고, 리본 소녀의 팬이 아닌 이들도 SNS에서 떠도는 사진을 보며 ‘입덕’을 했다.
“어쩌면 표정이 이렇게 예뻐?”
“그런데 얘네 둘 너무 잘 어울리는데?”
“남자애도 잘생겼어. 둘이 잘 어울려.”
“혹시 이미 사귀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겠다. 한 달 넘게 같이 촬영했으니까 그 사이에 같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하다 보면서 친해졌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 사진을 우연히 보게 된 이가 또 있었다. 핸드폰을 뺏겨서 이제는 이메일이나 유선 전화로 주변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나윤은 이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다 우연히 포탈 메인에 걸린 연예기사를 보게 되었다.
‘단유야.’
마우스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한동안 잘 잊고 지냈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뜻하지 않게 얼굴을 보니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뭐하니?”
“아, 실장님.”
“아, 그거.”
실장은 매시간 새로 나온 연예 뉴스를 살피는 게 일인지라, 나윤이 보던 그 뉴스도 몇 시간 전에 봤었다.
“쟤는 말만 연예인 안 한다고 하면서 하는 건 연예인보다 더 많이 나오는 거 같애.”
“······.”
나윤의 소리 없는 대답을 곁눈질로 확인 후, 실장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나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려가자. 연습해야지. 다 쉬었지?”
“실장님.”
“응?”
“저 한 번만 보러 가면 안 돼요?”
“안 돼.”
“실장님.”
“너네 끝났잖아? 나윤아. 컴백 얼마 안 남았어. 지금 스트레스받고 힘든 거 아는데, 걔 만난다고 스트레스가 풀릴 거 같니? 다시 만난다고 너희가 잘될 거 같아? 안 그래. 전에도 말했잖아? 이제 현실을 보라니깐? 그리고 같은 여자로서 해주는 충곤데, 여자가 그러는 거 남자들 싫어한다? 질척거린다고 되게 짜증 내고 그래. 헤어졌으면 쿨하게 헤어져야지, 다시 보고 싶다면서 찾아가고 전화하고 그러는 거 꼴불견이야.”
나윤이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옮길 생각을 못하고 있자, 실장이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좋은 기억만 남았다며? 그럼 너도 그 사람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지 않니?”
이윽고 나윤은 천천히 걸음을 떼어 지하 연습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