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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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장!”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단유를 부르는 소리에 단유가 시선을 돌렸다.
“응?”
하얀색 커버가 인상적인 헤드폰을 목에 걸친 소년이 책상에 걸터앉아 있다가 단유와 시선이 마주치자 폴짝 뛰어내렸다.
“너 도연이랑 촬영한다던데 사실이야?”
“응.”
“와, 그걸 여태 말 안 했어?”
뭐 무슨 중요한 비밀이라고 감출까. 외계인을 만나고 온 것도 아니고 일개(?) 연예인과 일(!)을 하고 왔을 뿐이다. 자랑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저 떠벌리지 않았던 것인데, 소년은 마치 큰 배신이라도 당한 양 볼을 부풀렸다.
“내가 리본 소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당연히 모른다.
가끔 생각하는 것인데, 반 아이들이 자신을 무슨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시험공부 기간에는 쉬는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힘들 정도로 찾아와서 문제집을 들이밀었는데,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우리 학교 뒤에 있는 산 이름이 뭐지?”
이 정도는 가끔 생각이 안 나서 물어볼 수도 있다.
“전화를 최초로 만든 사람이 누구야?”
“안토니오 무치.”
“아, 그렇구나.”
그래, 여기까지는. 상식 정도니까.
“이번 챔피언스 결승에서 누가 이길 거 같냐?”
그건 너무 객관적이지 않은 답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친구 사이에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단유는 도박사가 아니니, 대답은 ‘모른다’였다.
“조선 시대에 머머리는 상투를 어떻게 틀었어?”
“머머리?”
“대머리 말이야.”
왜 그걸 모르냐는 소년을 바라보며 단유는 미간을 좁혔다. 은어는 둘째치고 질문 내용 자체를 단유가 어떻게 알 거라고 생각한 걸까?
“상투는 머리를 위로 올려 동곳을 꼽고 망건을 두르는 방식이잖아. 대머리, 라고 통칭해서 부르지만, 보통은 윗머리가 벗겨지지 밑머리는 남아 있을 테니까 그 밑머리를 길러서 위로 추켜 올려 동곳을 꼽는다면 상투를 트는 일이 어렵지 않을걸? 주변머리도 없이 완전히 탈모가 진행된다면 상투 없이 망건만 두르고 그 위에 탕건이나 갓을 썼겠지.”
“와, 역시.”
질문을 던진 소년은 감탄했지만, 단유로서는 웃을 수 없었다.
“내 추측일 뿐이니까, 다를 수도 있어.”
“반장이 말한 건데 맞겠지.”
그 대답을 들으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반장, 내일 비 오냐?”
그런 질문은 그냥 들고 있는 핸드폰을 이용하라고 단유는 ‘충고’했다. 물론 ‘비 온다는 뉴스는 들어보지 못했어’라는 답도 덧붙여주긴 했다.
“반장, 이빨도 뼈야?”
“반장, 컴퓨터가 느린데 어떻게 해야 돼?”
“반장, 이거 칼로리가 얼마야?”
“반장, 여기서 대학로까지 얼마나 걸려?”
단유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나라에는 인터넷이라는 훌륭한 통신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고, 너희들은 모두 인터넷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핸드폰을 들고 있잖아. 그리고 너희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포털에는 그런 질문을 하라고 섹션이 만들어져 있고, 굳이 그 섹션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간단한 주제어 검색만으로 너희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은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아이들은 피식 웃었다.
“인터넷은 돈 들잖아.”
지금 단유가 촬영하는 홍보 내용 중에도 있지만, 교육부는 조만간 초중고등학교에 와이파이 인프라를 설치할 예정이었다. 디지털 학습자료를 활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정보화진흥원(NIA)과 교육부가 업무 협약을 체결했는데, 과거에 시행하려다가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서 잠정 중단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산 확충과 장비 호환성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기에 곧 시행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각자의 핸드폰 통신을 이용하여 인터넷을 해야만 했고, 무시무시한 통신 요금 폭탄을 부모님께 안겨드리고 등짝이 부서지는 안타까운 상황은 피하고자 아이들은 무료 사용량 이상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했다.
“인터넷으로 찾는 것보다 네가 더 빠르잖아?”
그렇다. 아이들은 단유를 값싼 성능 좋은 검색기로 활용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가 리본소녀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단유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러다간 ‘우리 집 식탁에 숟가락이 몇 개게?’라는 물을 것만 같아 걱정스럽다.
“나도 사인 좀 받아주면 안 되냐?”
‘나도?’
단유는 고개를 돌려 뒤에서 따라오던 명수를 쳐다보았다. 명수는 단유의 시선을 피해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찾아갔다. 리본소녀의 팬이라면 촬영장이 어디인지 알고 찾아올 정도니, 상대가 단유라는 것도 어쩌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은 이전에 사인을 받은 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니, 당연히 범인은 사인을 받아주었던 명수이리라.
“내가 자랑하지 말랬지.”
“아니, 그게. …미안해.”
“으휴.”
유명인의 사인을 받는 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수집행위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라 해도 ‘수집’은 ‘자랑’이나 ‘과시’를 위한 행위이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면 수집의 의미가 없다.
그러니 명수를 이해한다.
“이해는 하지만, 벌은 받아야겠지?”
“단유야.”
“일주일 동안 설거지 담당.”
“야, 너무 심하잖아!”
지켜보던 자칭 ‘도연빠’가 단유와 명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런 건 너희 집에서 이야기하고. 반장, 싸인 받아줄 수 있지?”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힘든데?”
“왜? 같이 오래 촬영했다며? 자주 만났으면 친할 거 아냐?”
단유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명수를 째려본 뒤, ‘도연빠’에게 대답했다.
“별로 안 친해.”
“그런데 명수건 어떻게 싸인 받았는데?”
“처음 만났을 때 부탁한 거니까 예의상 받아줄 수 있는 거지. 친하지도 않은데 계속 뭐 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이해하지?”
“그럼 명수랑 반장 거만 받았어?”
“단유는 안 받았어, 사인.”
명수가 끼어들었다.
“응? 왜?”
“말했잖아. 안 친하다고.”
“아무리 안 친하다고 해도 그렇지, 리본 소녀의 도연인데 사인을 안 받아?”
마치 태양계의 중심이 태양이 아니라 달이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쩌면 저런 반응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도경도 자신에게 은근히 물어봤던 거겠지.
“미안하지만 그 부탁은 들어주길 힘들 거 같다. 이해해 줘.”
도연빠는 아쉽다는 듯 단유를 보다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긴 몇 번 만났다고 친해지겠어.”
모태 솔로에게 여자는 두어 번의 만남으로 친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천상천하 유일 여신 도연‘님’ 아닌가. 묘한 이유로 단유의 설명을 납득한 ‘모태 솔로’, ‘도연빠’는 손을 저었다.
“어쩔 수 없지. 아, 맞다.”
본인의 자리로 갔다가 돌아온 도연빠의 손에는 작은 가방이 하나 들려 있었다.
“이거 좀 전해줄래?”
“뭔데?”
“도연님한테 주는 선물이랑 편지.”
“네가 직접 전해줘. 거기 너처럼 선물 들고 오는 사람 많던데.”
“주말에만 촬영한다며? 난 주말에 가족 행사가 있어서 가기 어려워.”
단유의 손에 억지로 가방을 쥐여주고 헤벌쭉 웃음을 지었다.
“반장, 꼭 전해줘야 한다. 알았지? 믿는다, 반장?”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그제야 ‘광팬’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자리로 갔더니, 앉아서 구경하던 명수가 히죽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떨려고 했다.
“무조건 일주일.”
“아… 단유야. 응? 미안.”
단유는 시치미를 떼고 가방을 정리했다.
“반장, 굿모닝?”
마침 교실에 들어오던 급우 한 명이 단유를 보고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마주 손을 들어 인사하면서 생각해보니, 요즘처럼 자신이 많이 불린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틈만 나면 ‘반장’, ‘반장’ 외치는 것도 그렇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단유’라는 이름을 부르는 대신 ‘반장’이라고 호명하기를 즐기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때도 한 학기지만 반장을 했던 경험을 떠올리면, 그때는 지금처럼 많이 불리지 않았었다. 워낙에 반장이 할 일이 없기도 했지만, 반 아이들도 ‘단유’나 ‘석고’라고 불렀지―90% 이상은 석고라고 불렸다―‘반장’이라고는 부르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들 ‘반장’이라고 불렀고, 단유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선생님마저도 ‘반장, 이리와 봐’, ‘반장 자율학습 시켜’라고 명령하니 명수 외에는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반장’이라고 불리는 것이 어색했다. 하지만 몇 번 반복되니 이것도 적응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복도에서 다른 반 아이들이 ‘반장’하고 불러도 저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가며 부른 이를 찾곤 했다.
어릴 때는 반장을 ‘반장’이라고 부르기보다 누구누구야, 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만약 상대가 직급이나 특별한 호칭을 지닌 이라면 그 호칭을 부르는 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이것도 교육의 영향일까?’
딱히 반장을 ‘반장’이라고 부르도록 명령받은 적도 없고, 교육받은 바도 없지만 그렇게 부르는 관습을 교육받았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호칭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떠올린 것은 바로 ‘선생님’, 하은이었다. 어릴 때부터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그녀는 늘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혹시 그녀는 이름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학원에서도 하은은 ‘선생님’이라고 불릴 테고, 집에서도 ‘선생님’이다.
고작 몇 개월에 불과하지만 이름 대신 ‘반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 때문에 생각이 많아진 단유다. 하물며 몇 년 동안이나 이름 대신 ‘선생님’으로 불리는 하은은 어떤 마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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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은 단유의 질문에 손등으로 턱을 괴고는 흥, 콧소리를 냈다.
“별로. 아무 생각 없는데.”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말 그대로. 어떻게 부르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네가 뭐라고 부르든, 아, 쟤가 날 부르는구나, 하고 뜻만 통하면 그만이지.”
“너무 단순한 거 아니에요?”
마치 단유가 고민했던 것들이 다 부질없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 네 생각은 뭔데?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거야? 뭐, 그냥 이름이라도 부르게? 집에서 단유야, 하은아, 하고 부르자고? 맞먹자는 거니? 너 요새 번역한다고 영어 원서 붙잡고 있더니 생각도 서구식으로 바뀐 거야? 말 트고 지내고 싶어? 그래? 그게 네 생각인 거야? 한 번 그래 볼까? 응? 그러면 편할 거 같니?”
어디쯤에서 하은의 폭주를 멈춰야 하는 걸까 간을 보다가 그만 타이밍을 놓쳤다.
“요즘 단유 네가 바빠서 힘든 거 같아 잠시 모른 척했더니 이렇게 건방져졌구나. 선생님은 참으로 가슴이 아퍼. 이래서 중2병 사춘기 아이들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고 하는 거구나. 어릴 때는 선생님, 선생님 부르면서 콧물 질질 흘리며 졸졸 따라오던 애가 이제는 머리 좀 컸다고 선생님이랑 맞먹으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사람이 변하니? 아, 알겠다. 너 요즘 돈 번다고 유세 떠는 거구나. 그치? 지갑에 돈이 쌓이니까 선생님이 이제 우습게 보이는 거지? 만만해 보이지? 그래, 알았어. 네가 정 원한다면 허락해줄게. 그냥 이름 불러. 불러봐. 선생님보다 돈도 잘 버는 단유가 이름을 부르고 싶다는데 부르게 해줘야지. 그치? 이제 편하게 불러. 그게 네 마음이 편해지는 길이라면 불러.”
“알았어.”
“…알았어?”
“알았어, 하은아.”
“…….”
어리벙벙한 눈으로 단유를 보던 하은이 별안간 손을 뻗었다. 이미 달아날 준비 중이던 단유가 늦지 않게 몸을 뒤로 쑥 빼더니 거실 바닥에서 몸을 한 번 굴러 거리를 뒀다. 그리고 엎드린 채로 하은을 보며 씨익, 짓궂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야!”
“I’m sorry.”
“너 잡히면 가만 안 둬!”
단유를 잡으려고 소파에서 일어난 하은의 손을 피해 단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김단유! 문 안 열래?”
“선생님, 층간소음이요! 조용히 하셔야죠. 민폐예요.”
“김단유!”
볼을 부풀리던 하은은 닫힌 방문을 보다 피식 웃었다.
“너 안 나오면 설거지 당번 시킬 거다.”
“괜찮아요. 일주일 동안 명수가 설거지 당번 하기로 했어요.”
“명수가? 왜?”
“약속을 어겼어요.”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럼 거실 청소!”
“그건 제가 늘 하는 거잖아요.”
“그럼 아침 식사 당번!”
“제가 만들어도 돼요?”
안 되지. 안 되고 말고. 다 떠나서 단유에게는 요리를 시키지 않겠다 마음먹은 하은이었다. 그건 그냥 재료를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이, 정말! 너 왜 그렇게 못 됐어!”
“선생님이 먼저 장난치셨잖아요!”
“그렇다고 진짜 맞먹니? 응?”
“I’m sorry!”
“야!”
오늘도 단유네 집은 평화롭고 화목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