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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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사람의 생김새와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수명이나 운명 등을 점치곤 했다. 관리를 선발할 때도 관상을 보고 ‘길상(吉相)’의 인재를 뽑기도 했고, 얼굴에 나타난 ‘흉(凶)’을 파악하여 위험을 피하고자 하기도 했다. 신라시대 때 들어와 조선 시대에 유행한 관상은 지금까지도 ‘관상학’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신뢰하고 의지하는 부분이 있다.
서양에도 관상은 있었다. 중세에는 관상학을 학문의 한 분야로 여겼으며 동양이 전체적 조화를 중시한 반면, 서양은 개별적인 부분의 해석을 더 중시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는 과학이 급격히 발달하면서 비과학적 분석학인 관상은 발붙일 데가 없어졌다.
비록 예언적, 분석적 관상학은 사라졌지만, 심리학적 페이스 리딩(face-reading)은 다른 의미로 발달했다. 눈동자나 입술의 움직임, 눈썹이나 코의 씰룩임, 얼굴색의 변화 등이 그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는 요소로 발전했다.
얼굴에 존재하는 두 개의 근육만으로 300가지 표정을, 세 개의 근육으로는 4,000가지, 5개의 근육으로 1만 가지의 표정을 조합해서 만들 수 있다는 연구도 나왔다. 이를 통해 얼굴 표정만으로 상대의 심리와 생각을 읽는 방법이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그동안 단유는 많은 사람들을 관찰했다. 교실 안의 사람들은 물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관찰했다. 처음의 의도야 ‘경계’였지만, 이후 ‘심리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의도로 말을 하는 것인지를 파악하기 위한 실험적 관찰이 주가 되었다.
그 경험들이 고스란히 단유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자, 이번에는 친구가 고민거리를 너에게 털어놓으며 상담을 할 때로 가정해보자. 성적 고민일 수도 있고, 이성 친구에 대한 고민일 수도 있겠지. 넌 그 친구들의 고민에 공감하며 조언을 하는 역할이다. 알겠지?”
연기 레슨을 할 때 선생님은 임의의 상황을 설정하고 그에 맞는 역할을 지시했다. 단순히 대본을 읽고 그 대본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모호한 상황을 설정한 뒤, 그 상황 속에서 자유롭게 연기하는 것이다. 하나의 연기를 보이면, 그다음에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또 다른 연기를 보여주는 것. 그렇게 다양한 연기를 연습하는 것이 연기의 즉흥성과 유연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었다.
지금까지의 단유가 보여줬던, 즉 평소의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은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혀 다른 모습이라면?
단유는 기억 속에서 어떤 인물을 소환했다.
“뭐, 그런 걸 가지고 고민해? 그거 나중에 시간 지나면 아무것도 아닐걸? 우리 할아버지가 그러는데 인생무상이랬어. 원효대사 님도 그랬잖아?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원효대사 님이 한 말은 그런 말이 아닌 거 같은데?”
“아니면 말고. 그게 뭐가 중요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넘어가자는 모습. 단유는 지태를 떠올리며 지태의 말투와 표정을 ‘연기’했다. 선생님은 단유의 연기에 몇 가지를 지적했다.
“말투에 비해 목소리는 여전히 단유 평소의 너와 크게 다르지 않아. 만약 가벼운 느낌의 사람을 표현하고 싶었다면, 말을 조금 더 빠르게 한다거나, 목소리 톤을 조금 더 올리는 방법도 좋을 거야. 그리고 가벼움을 좀 더 연기적으로 표현하려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몸이 움직여야지. 팔을 막 휘젓는 연기를 하란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가볍게 다리를 떨거나, 고개를 이렇게 까닥까닥 움직이는 게 좋지.”
단유는 지태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보면 지태도 자주 다리를 떠는 모습을 보이곤 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지태는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저 가볍기만 했다면 상대의 고민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지만 지태는 가벼울지언정 유쾌함이 있었다. 그 순간에 ‘유쾌하다’라는 기분을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지태는 자기 나름대로 친구를 돕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을 표정으로, 비언어적인 몸짓으로 드러내 보였던 것이리라. 그 감정이, 진실한 속내가 ‘유쾌함’과 어우러져 친구의 기분을 풀어주었던 것이 아닐까?
“헤이, 브라더! 우리 스트레스나 풀러 가지 않을래?”
단유의 너스레 ‘연기’에 선생님이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그 후에도 단유는 표정, 움직임, 말에 기억 속 대상들을 이식시켜 연기를 해 보였다. 때로는 공부에 지친 급우들의 모습을, 때로는 지하철에서 지친 얼굴로 창밖을 보던 아저씨의 모습을 연기했다. 그리고 그런 연기를 하면서 동시에 그 사람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어떤 감정으로 그런 말과 표정을 지었던 것인지를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연기는 상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히 상대가 이렇게, 혹은 저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순간 그 행동에 어떤 감정과 생각이 깃들어있는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연기인 것이다.
‘연기’는 단유에게 표층적인 관찰 너머의 세계를 보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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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 이야, 점점 표정이 좋아지는데?”
“고맙습니다.”
“빈말이 아냐. 안 그러냐, 길중아?”
카메라 감독도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척 내밀었다.
“너 와봐라. 같이 모니터 해 보자.”
감독은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단유를 불러 옆에 세워놓고 모니터를 보여주었다. 조금 전 촬영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보는 게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곧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니, 어설프긴 하지만 자신이 표현하려 했던 모습이 드문드문 보이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좀 더 숙달되면, 드문드문 보이던 저 연기가 좀 더 자연스럽게, 자신이 표현하려 했던 인물인 양 보일 것이다.
“너 배우 해라. 배우 좋다, 좋아. 응?”
감독이 턱을 엄지손톱으로 긁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케이 컷으로 갈까요?”
스크립터의 물음에 감독이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자. 오케이로 해.”
“그럼 단유 바스트는 끝났고, 도연이 차롄가? 도연이 좀 불러와.”
“제가 부를게요.”
“아, 그래. 넌 그럼 가서 좀 쉬고 있어.”
“네.”
“잘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자?”
“네.”
단유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 돌아섰다. 그 뒤를 감독이 힐끗 바라보다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쟤는 연기할 때랑 카메라 앞에서랑 똑같네요.”
조감독이 감상을 털어놓자, 감독이 눈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옹이구멍 같은 눈이 바로 네놈 눈이구나. 네 눈엔 저게 같은 거로 보이냐?”
“비슷하지 않나요? 그래서 자연스러운 거 같은데?”
감독은 쯧, 혀를 차고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여 조감독을 바라보았다.
“저놈 표정이 달라.”
“표정이요?”
“평소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이야. 아이답지 않게 깊은 눈빛도 그렇고. 그런데 카메라 앞에서는 아니야. 그냥 흔한 남자아이, 라는 느낌이라고. 왜 그런 줄 알아? 눈빛이 달라서 그래. 눈빛이.”
조감독은 오히려 더 모르겠다는 듯,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미세하게 변하는 표정과 눈빛이 사람을 전혀 다르게 보도록 한다고. 이그, 네가 그러니까 아직까지 내 밑에서 조연출이나 하는 거야. 너 언제 독립할래? 응?”
“아, 왜 갑자기 이렇게 저격하십니까? 계속 그러시면 저 서러워서 일 못 합니다.”
“허 참. 누가 말리니? 가고 싶으면 가? 아니 제발 좀 독립해라, 너도. 내 밑에서 일했던 놈들 중에 네 출석부가 제일 두꺼워, 아냐?”
“에이, 그래도 저 없으면 힘드실 겁니다. 솔직히 제가 일은 제일 잘하지 않습니까?”
“잡일 잘해서 뭣하게? 뭐에 써먹어? 빨리 독립해서 스튜디오 하나 차리라고 몇 번을 말해? 응?”
“때가 되면 어련히 하지 않겠습니까?”
“진짜 못난 자식 둔 애비 마음이 꼭 이러지 싶다.”
“아드님이 지금 속을 많이 괴롭히나 봅니다.”
“내 아들놈이 너처럼 굴었으면 가만 안 뒀어. 능글맞기나 하고 말이야.”
조감독은 헤헤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다음에 이어질 도연의 촬영을 위해 챙길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 찍었어요?”
“네. 이번에는 도연 씨 차례라고, 나와서 준비하시래요.”
“···아, 그래요.”
또 ‘도연 씨’라고 부른다, 이 아이. 이제는 은근히 불쾌하다. 왜 계속 거리를 두려고 하지? 무시당하는 느낌까지는 아닌데, 무시하려고 간을 보는 것 같아 살짝 기분이 좋지 않다. 도연은 그에게 건넨 마카롱이 아까워지려 했다.
도연이 나간 뒤, 도경이 단유에게로 다가왔다.
“너 일부러 그러지?”
“뭐가요?”
“쟤랑 일부러 거리 두는 거 맞지? 그치?”
은근한 도경의 물음에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솔직히 그렇잖아. 요즘 대세 아이돌. 예쁘고 어리고 애교 많은 여자아이를 싫어하는 남자가 어딨어? 왜 네 취향이 아니야?”
“거기에 ‘취향’이 왜 들어가요?”
“그래서 싫어?”
“싫긴요.”
“그럼 좋아하는 거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럼 왜 그러는데? 내가 진짜 이해가 안 가서 그래.”
“꼭 친해지려 하고 그래야 하나요? 누나가 일하면서 만나는 사람들한테 모두 다가가서 친해지려고 하지는 않잖아요?”
“난 하는데?”
“여기 촬영장에서 일하는 스태프들이랑 다 친해요?”
“에이, 그건 비유가 이상하지. 적어도 이 대기실에서 같이 지내는 사람들끼리는 친해져야 정상이잖아?”
“글쎄요.”
“그럼 일부러가 아니란 소리야? 진짜 관심 없어?”
“포기를 모르시는군요.”
“궁금해서 그러지. 너 같은 남자애도 있구나 싶어서.”
“누나가 아는 남자는 어떤데요?”
“예를 들면, 저기 ‘출근길’에 나와서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고 하는 애들?”
“편견이네요.”
“에이, 그렇게 빼지 말고. 솔직히 말해 봐. ···일부러 관심 없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관심이 없는 거야.”
“존중하는 겁니다.”
“존중?”
“존칭, 존대법은 상대를 존중하는 표현이에요. 아시잖아요.”
“그냥 존중만 한다? 이성적 관심은 전혀 없다?”
“네.”
“정말?”
단유는 한숨을 툭 내쉬었다. 아마 지금의 대화는 도연에게 흘러 들어갈 공산이 크다.
“일로 만난 거예요. 친해지면 좋겠죠. 하지만 굳이 친해지자고 오버할 필요는 없잖아요?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게 좋으니까요. 하지만 이번 일이 끝나면 저랑 도연 씨가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요? 게다가 도연 씨는 연예인인데 괜히 저랑 친한 척하는 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좋지 않잖아요.”
“그걸 네가 왜 걱정해? 걱정해도 본인이 걱정해야지?”
도경은 손뼉을 치며 놀란 눈으로 단유를 보았다.
“알았다! 너! 일부러 그러는 게 맞구나. 도연이랑 친해지면 도연이가 곤란해질 거 같으니까, 도연이가 걱정돼서 일부러 선을 긋는 거구나. 마음을 숨기고 말이야.”
단유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 매니저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테지. 그래서 가끔 대기실에 들어와 슬쩍 경계심을 드러내 보이는 것일 테고 말이다.
마치 인터넷 연예기사에 올라오는 댓글을 보는 기분이었다. 단편적인 조각만 맞춰서 틀을 짜고, 그 틀에 자신만의 양념을 추가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남녀 연예인이 나란히 찍은 사진 아래에 ‘했네, 했어’ 같은 댓글을 다는 것이나, 남자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한 이가 ‘남자 연예인’의 기사 아래에 음험한 스토리를 조작해서 댓글을 다는 게 다 이런 식이 아닐까?
하지만 얼마나 많은 조각이 나뉘어있는지 모르고 몇 개의 조각만으로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건 ‘망상’이고 ‘편견’이다.
단유와 도연, 두 사람 관계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조각들이 숨어 있었다. ‘매니저’라는 조각도 있고, ‘나윤’이라는 흐릿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조각도 남아 있었다. ‘도연’에 대한 단유의 개인적 ‘부담감’도 분명히 존재했고, 적당히 선을 지키는 관계에서 오는 심적 여유도 보이지 않는 조각 중의 하나였다. 과거에 ‘구설수’와 ‘댓글’의 피곤함을 겪었던 일도 있었고.
도연과 친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야 지금과 같은 답답한 문답도 나눌 일이 없을 것이고. 지금은 그냥 책이나 읽으며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아!
“전 혼자가 편하네요.”
“혼자?”
“네. 지금은 그냥 혼자인 게 편해요.”
“아웃사이더니?”
단유는 고개를 갸웃하다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그리고 옆에 놓인 책을 집으며 대화의 마침표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