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93화 (493/956)

상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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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의 연습은 서로 자유롭게 연기를 하는 식으로 마무리를 했다. 연기를 마쳤을 때는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심하게 운동을 하거나 계속 뛰어다닌 것도 아닌데 머리와 몸을 함께 쓰는 일이어서 그런지 꽤 많이 지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쉬운 일이 아니구나.’

배우는 사람은 물론이고 가르치는 사람도 땀에 젖을 정도로 열정적인 수업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이번 주 목요일에 봅시다.”

“네, 선생님.”

단유와 도연이 선생님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저기 탈의실 먼저 사용하실래요?”

“아뇨. 전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요. 그냥 가볼게요.”

“아···.”

“먼저 갈게요. 수고하셨습니다.”

“아, 네. 수고···하셨어요.”

뒤돌아서서 가는 단유.

‘끝내 묻지 못했네.’

왜 말을 다시 높이기 시작했는지, 왜 그렇게 데면데면 대하는지를. 괜히 섭섭한 마음이 드는 도연이었다.

****

6회에 걸친 레슨을 받은 후, 그러니까 3주가 지난 뒤 두 사람은 다시 촬영에 들어가게 되었다.

“오케이.”

도연의 울렁증은 여전했지만, 이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특히 단유와 투샷(two-shot)으로 잡힐 때면, 도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안정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래도 레슨을 받아서인지 연기가 훨씬 좋아진 거는 사실인가 보네요.”

도경의 말에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 암기야 기본이고 발음, 발성도 나쁘지 않다. 가끔 표정이 어색하거나 대본에 주어진 지문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긴 해도, 경험만 쌓이면 충분히 대성할 가능성이 보인다. 매니저는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맛있다, 이거.”

도경은 도연이 건넨 간식거리를 먹으며 감탄을 했다. 도연의 팬이 준 마카롱이었는데 입에서 살살 녹는 달달한 느낌에 도경은 곱씹으며 맛을 음미했다.

지난 촬영장 사건으로 도연이 원치 않게 주목받은 후, 리본소녀의 팬카페에서는 도연을 위로하는 글들이 많이 올라왔다. 데뷔 1년 차인 리본소녀에서 가장 막내인 도연의 첫 연기가 당연히 어설플 수 있다는 옹호의 글과 그런 사정도 이해 못 하고 막말을 쏟아냈다는 업체 사람들에 대한 비난의 글이 쏟아졌다.

그런 사연이 도연 개인에 대한 응원으로 이어졌고 리본 소녀의 전체 스케줄이 있을 때나 도연의 스케줄이 있을 때 따라다니는 팬들의 수가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도연아! 파이팅!”

흔히 말하는 ‘출근길’에도 팬들이 따라와 도연을 응원하는 구호를 외치기도 하고, 더러 도연에게 선물이 든 가방을 건네기도 했다.

“고맙습니다.”

도연은 미소를 지으며 팬들의 성원에 감사해 했고, 그런 미소에 또 팬들은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오늘의 촬영장에도 미리 알고 찾아온 팬들이 도연의 ‘출근길’에 카메라와 선물 가방을 들고 기다렸었고, 도연이 오자 큰 함성과 응원으로 반겨주었다. 도경이 먹은 마카롱은 그 팬들이 건넨 선물 중 하나였다.

도경이 맛을 음미하다 대기실로 사용하는 교실 한쪽에 얌전히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단유를 발견했다.

“쟤도 하나 주지?”

도연이 힐끗 본 뒤, 도경에게 말했다.

“언니가 가져다 줘요.”

“왜? 네 거잖아?”

도연이 머뭇대자 도경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바라보았다.

“너 혹시···.”

“네? 아,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뭐라고 했는데 아니래? 내가 뭐라고 할 줄 알고?”

도연이 발끈하며 말했다.

“언니가 이상하게 쳐다봤잖아요?”

“뭘 이상하게 쳐다봐? 너야말로 이상하다? 괜히 열 내고?”

“아이참.”

도연은 입술을 삐죽이다가 변명했다.

“별로 안 친한 데 가서 주기가 뭣해서 그러죠.”

“야, 누나가 동생한테 먹을 거 챙겨주는데 친하고 말고가 어딨니? 게다가 지난번에는 서로 말놓고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다며?”

“그런데, 이번에는 다시 존대를 하더라고요.”

“아, 그래서 서먹했던 거구나.”

도연은 대답 대신 마카롱이 들어간 상자만 들었다 놨다 했다. 도경에게 준 마카롱 외에는 아직 입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친해지려면 네가 먼저 나서야지.”

“제가요?”

“누나잖아?”

도경의 익살맞은 웃음이 조금은 불편한 도연이었다.

촬영 중간 잠시 정비 시간을 가질 때, 단유는 대기실에서 틈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다. 솔직히 최근처럼 바쁘게 지냈던 날이 있었던가 되짚어 볼 정도로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던 단유였다. 당장 학교에서도 반장이라는 직함을 받아 생각지 못한 수업 외 활동과 직무를 수행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학교 밖에서는 번역 일과 교육부 홍보 건으로 시작된 연기 레슨 등을 받느라고 바빴다. 그러다 보니 방과 후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책상에 앉아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마음껏 책에 집중할 수 있었던 그 시간이 그리웠다.

더군다나 한 달 전에는 중간고사도 있어서 시험공부를 하느라고 시간을 많이 뺏기기도 해서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시간이 부족했다. 그런 이유로 단유는 최근 대중 교통을 이용해 움직일 때나, 짜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무슨 책 읽어요?”

단유가 고개를 들었을 때 볼을 빨갛게 물들인 도연이 상자를 든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양 물리학이라는 책이에요.”

“물리학?”

“물리학 일반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쓴 책이에요.”

물리학계의 유명한 학자들, 케플러에서 아인슈타인에 이르는 학자들에 관한 이야기와 그들의 이론이 소개되었음은 물론, ‘전하’, ‘엔트로피’, ‘불확정성 원리’, ‘슈뢰딩거 방정식’, ‘핵에너지’, ‘쿼크와 하드론’ 같은 이론들까지 가볍게(?) 이해할 수 있게 쓴 책이었다.

복잡한 이론과 증명은 없지만, 말 그대로 ‘교양’을 위해 쓰인 책이라 머리를 가볍게(?) 하기에 충분했다. 요즘처럼 바쁠 때 여유를 갖고자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아, 그렇구나.”

뭔가 물어보려 해도 아는 게 없어 물어보지도 못하겠다 싶어 도연은 화제를 돌렸다.

“이거 먹을래요?”

“뭔데요?”

“마카롱인데 제 팬이 선물해 주신 거예요. 하나 드세요.”

단유는 상자의 든 것들 중 하나를 집었다.

“잘 먹을게요.”

“더 드세요.”

‘하나’ 드세요, 라고 권해놓고선 더 먹으란 건 무슨 뜻일까?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이거면 충분해요.”

하지만 도연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앞에 계속 서 있었다. 단유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보다가, 손에 든 마카롱을 보는 앞에서 먹어보란 뜻인가 싶어 한 입 깨물었다.

우물우물 씹어 맛을 음미한 단유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맛있네요.”

도연이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란 표정이었다. 단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곧 고개를 들어야 했다. 단유 앞에 선 발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나 싶어 바라보니, 도연이 붕어처럼 벙긋거리다 소리를 냈다.

“그런데 왜 다시 말을 높이는 거예요?”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그때, 촬영할 때만 그러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감정 잡는 데 도움이 될 거 같다고 하셔서.”

그렇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말을 또 그렇게 곧이곧대로 듣는 법은 또 뭔가.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안 하셔도 잘하시잖아요? 아니면 아직 힘든 부분이 있으세요? 만약 필요하다면 도와드리고요.”

말을 놓는 게 ‘도와주는’ 행위로 인식된다니 참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어쩐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도연은 상자를 든 채로 우물쭈물 거리다 다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게 있나요?”

“네?”

“혹시 제가 저도 모르게 불편하게 했다거나.”

“아뇨, 그런 거 없어요.”

“그런데 너무 매정하게 구는 거 아니에요?”

‘매정하다’라. 어떤 의도인지 몰라도 도연이 선택한 단어가 단유에겐 불안한 감정으로 다가왔다. 단유는 한숨을 내쉬며 도연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제가 지금은 여유가 없어서 그럴 거예요.”

“여유요?”

도연의 눈썹이 위로 살짝 올라갔다.

“요즘 좀 바쁘다 보니 주위에 신경을 잘 못 쓰고 지내요. 아마 저보다 더 바쁘실 테니 아실 거 같은데요.”

‘아, 그 여유.’

도연은 그럼 그렇지, 라는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하긴 단유가 아무리 바빠 봐야 도연만 하겠는가. 그렇지만 그게 ‘매정’의 이유는 되지는 않잖아?

“뭐하니?”

도연이 뒤를 돌아보니 매니저가 교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 오빠.”

매니저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도연은 뭔가 들키면 안 될 것을 들킨 사람처럼 마음이 시끄러웠다.

“이거, 마카롱이요. 이거 하나 드시라고···. 오빠도 하나 드세요.”

빠른 걸음으로 매니저에게 다가간 도연이 상자를 내밀었다. 핑크색 마카롱을 하나 집어든 매니저가 짧게 ‘고마워’라고 인사를 했다. 도연은 곧바로 도경에게로 향했고, 도경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걸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촬영은 잘하고 있어?”

매니저는 받은 마카롱을 다 먹은 뒤에 단유에게 다가와 물었다.

“네. 덕분에요.”

“덕분에?”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매니저에게 단유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매니저님이 연기 레슨받도록 해주셨잖아요.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랬다니 다행이군.”

그리고 잠시 끊어지는 이야기.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하실 말씀이라도?”

“아, 다름이 아니고,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이 되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오늘 저녁에요?”

매니저는 호주머니에 찔러 뒀던 오른손으로 귀 뒤를 긁으며 말했다.

“우리 회사 대표님이 좀 보자고 하시네.”

“저를요?”

“그래. ···사실을 말하면, 내가 너를 추천했어.”

“추천, 이라뇨?”

“내가 보기에 넌 딱 연예인 관상이거든. 몸도 균형이 잘 잡히기도 했고. 연기도 옆에서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네 연기가 나쁘지 않다고 하니까. 그런 이야기를 대표님께 했더니 한번 보자고 하시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대표를 만날 필요는 없었다.

“전 연예인 할 생각 없는데요.”

“그래, 알아. 지난번에 그렇게 이야기했었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말이야. 사람 인생이라는 거 어찌 될 줄 모르는 거잖아? 지금은 싫어해도 나중엔 좋아할 수 있는 일이고.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내가 대표님께 네 이야기를 많이 했어. 그래서 너한테 관심이 가셨나 봐. 아, 물론 오늘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서 널 꼭 연예인 시키겠다는 건 아냐.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면서 회사 들어오라고 꼬실 일은 없으니까 걱정 놓고.”

“그냥 밥만 먹는 자리인가요?”

“그래, 밥만. 뭐 밥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겠지만 절대 연예인을 하라거나, 우리 회사로 들어오라거나 강요하는 자리는 아닐 거야.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도 싫다면 어쩔 수 없고.”

“알겠어요. 저녁에 뵙도록 하죠. 아, 그럼 집에 연락을 먼저 해야겠네요.”

“아, 그럼. 그래야지.”

매니저는 그렇게 이야기를 전하고 돌아섰다. 자신을 훔쳐보다 얼른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우는 도연과 도경이 눈에 들어왔다. 미간을 좁히며 바라보니 도경이 헤헤, 하고 웃음을 지었다.

“오빠, 맛있죠?”

“그래, 맛있다.”

눈짓으로 도연을 가리키니 도경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시치미를 뗐다. 마치 ‘난 아무것도 몰라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일전에 단유에게 부탁했던 일을 떠올리며 매니저는 도경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자, 이번에는 단유 바스트샷부터 찍자.”

“네.”

“저기 앉아봐. 응, 거기. 서린아 준비 다 됐어? 다 됐냐고. 그래? 화이트밸런스는?

단유는 카메라 앵글이 잡힐 위치에 서서 숨을 가다듬었다. 매니저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했던 말은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레슨이 많은 도움이 되었고, 특히 사람의 감정에 관한 분석과 이해라는 측면에서 단유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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