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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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와의 이야기가 끝나고 단유는 번역회사로 이동했다. 3월에 받았던 번역의 완역은 이미 이메일로 보낸 터라 무언가를 준비해서 갈 필요는 없었다. 빈손으로 들어간 단유는 두 권의 책을 들고 나왔다. 한 권은 새로 번역을 맡은 책의 원서였고, 또 다른 책은 자신이 번역한 책의 출판본이었다. 원래 번역할 때는 책이 아니라, 편집이 가능한 워드 파일로 받기도 하는데, 단유가 원서를 보며 번역하고 싶다는 희망을 드러냈더니 회사에서 매번 원서를 구해다 주었다.
지하철에 앉아서 원서를 펼쳐 들었다. 이번의 책은 경영에 관한 서적이었는데, 내용은 경영보다 사회과학적인 시선이 많이 담긴 책이었다. 주제는 희귀 자원(rare resource)의 효율적 관리를 통해 성공한 글로벌 기업 모델의 연구였다.
현대 사회는 만성적인 자원 결핍을 겪고 있으며, 체감하진 못해도 수많은 자원들이 점점 바닥을 향하고 있다, 고 얼마 전에 배우기도 했다. 3학년 사회 교과서에 <에너지 자원과 지역 갈등>이 나오는데, 당시 선생님은 자원을 둘러싼 지역 갈등의 발생 과정과 전개 양상에 대해 핏대를 세우며 설명했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여러 분쟁이 벌어지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잘 아는 중동은 물론이고 아프리카의 수단이나 콩고 같은 나라에서도 연일 싸움이 벌어지고 수많은 사상자와 피난민들이 생기죠. 그 싸움이 대부분 한정된 자원을 소유하기 위한 갈등에서 생긴답니다.”
자원의 편재성, 매장량 감소, 채굴 조건 악화, 가격 상승으로 불안해지는 공급 때문에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졌다.
“자원의 수출을 중단하거나 가격을 인상하는 등으로 자원을 무기화하는 경우도 생겼죠. 오일 쇼크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
에너지 자원의 확보와 이로 인한 갈등으로 국가 간에 첨예한 대립이 이어지자 ‘자원 민족주의’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했다.
단유가 이번에 번역할 책은 그와 관련된 기업에 관한 이야기였다. 거시적으로 보면 국가 간의 대립이지만, 직접적으로 자원을 개발하고 채굴하여 판매하고 유통하는 일은 기업이 맡는다. 그래서 몇몇 기업은 독점적인 위치에 오르기도 하면서 세계의 지탄을 받기도 한다.
심지어는 씨앗과 같은 종자를 개발, 생산하여 재배 농가에 보급하는 종자 산업마저도 기업에 의해 움직인다. 글로벌 10대 종자 기업이 세계 시장의 75%를 점유하는 과점 현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불과 며칠 전 시험을 치기까지 했었던 내용을 우연히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단유는 흥미를 느끼며 원서를 읽어나갔다. 단유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단유가 정신없이 빠져 읽는 책을 흘깃 보며 남몰래 감탄하기도 했다.
‘요즘은 어릴 때부터 영어 공부를 한다더니, 이런 책도 읽는구나.’
‘나도 영어 공부 좀 해야겠는데.’
‘누구는 토익 800점을 못 넘어서 허덕이는데. 하아, 어릴 때 공부 좀 할걸.’
‘외국인인가?’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읽던 단유였지만 내릴 역을 지나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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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단유는 다시 매니저를 만났던 장소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 장소 근처에 있는 연기 학원을 찾아갔다. 뭐든 경험해보는 게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하은의 조언도 있었지만, 최근 단유가 ‘감정’이라는 것에 대해 관심을 둔 영향도 있었다.
“연기는 단순히 어떤 사람을 흉내 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아요. 배역 속 인물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켜야만 자연스럽고 보기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있어요.”
연기 학원의 원장이 단유를 맞이하며 꺼낸 이야기였다.
“학생은 소속사가 없다고요?”
“네.”
“그런데도 거기서 돈을 대신 내주겠다고 했다면서요?”
“네.”
“그쪽에서 학생을 잘 봤나 보다.”
원장은 단유가 곧 기획사 연습생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혜택이 주어질 리 없으니까.
“우리 학원이 이 바닥에선 꽤 유명해요. 강사님들도 유명하시고, 현직 배우들도 가끔 와서 레슨을 받거든요.”
원장의 팔불출 같은 자기 자랑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이랑 목요일이고요, 시간은 6시부터 7시 반까지예요. 괜찮죠?”
“네.”
사실 여기에는 단유의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학교를 마친 이후의 시간이라 상관은 없지만, 전적으로 도연의 스케줄에 맞춘 시간이라 단유가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오늘은 학원 구경만 하시고요, 다음 주 월요일부터 수업할게요.”
“알겠습니다.”
“학생 보니까, 되게 침착해 보이네요.”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끼가 많은 사람이 연기를 잘할 거로 생각하지만, 연기는 굉장히 이성적인 창조행위에요. 침착하고 차분한 사람이 연기를 더 잘할 확률이 높아요.”
단유는 저 멘트가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활달한 성향의 사람이 오면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 연기에 더 몰입을 잘할 거라고 이야기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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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단유가 학원에 갔을 때, 도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었다. 먼저 연습실에 들어간 단유는 나윤이 연습하던 안무 연습실과 비슷한 구조와 인테리어의 실내를 구경하다 한쪽 벽에 있는 접이식 의자에 앉아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전과 달리 원서를 번역할 때는 최소한 두 번을 정독하고 번역을 했다. 첫 번째는 내용을 알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한국어로 번역할 때 더 자연스럽게 표현 가능한 단어들을 떠올리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원서를 읽고 있을 때, 도연이 매니저와 함께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단유가 먼저 일어나 인사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뒤이어 도연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매니저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얼굴을 보니 반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단유는 마치 처음 만난 사람마냥 딱딱하게 인사를 했다.
“우리 친구 하기로 하지 않았어요?”
라는 말이 입속에서 맴돌기만 했다.
야구모자에 하얀 마스크를 끼도 있던 도연은 혹시 모자 자국이 남지 않았을까 조심스러워하며 모자를 벗고는 벽면에 붙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아직 레슨이 시작되기 전이기에 잠깐이라면 상관이 없을 것이다. 단유는 매니저의 부름에 연습실을 나갔다. 그 뒤를 거울을 통해 훔쳐보는 시선이 따라갔다.
원장실 옆 상담실을 양해를 구해 들어간 매니저와 단유는 책상에 마주 앉았다.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학원에서 일하는 직원이 먼저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아, 고맙습니다.”
“커피로 드릴까요?”
“아, 네. 커피 부탁드릴게요.”
“그쪽은?”
“전 그냥 물이면 돼요.”
잠시 후, 따뜻한 커피를 손에 든 매니저가 잔을 들어 올려 향을 맡은 뒤 입을 축였다. 그래 봐야 일회용 믹스커피일 뿐인데.
“다름이 아니라, 부탁할 게 있어서 그러는데.”
단유는 물을 마시는 대신 매니저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사실, 도연이한테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에서 너랑 같이 레슨을 받게끔 하긴 했지만, 알지? 이게 전부 일 때문이란 거. 네가 아직 학생이고 연예계 활동을 전문으로 하는 게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경험이 전혀 없는 건 아니잖아? 무슨 말인지 알지?”
단유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매니저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럼요. 매니저님 말씀 이해했어요.”
“역시. 똑똑한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 아무튼, 일이니까 말이야, 사적인 감정이 안 생기도록 주의해 줬으면 좋겠어. 이런 걱정 하는 게 너무 앞서나가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거든. 내 새끼 자랑 같지만, 도연이는 잘나가는 아이돌 가수잖아. 아무래도 구설수 걱정도 안 할 수가 없어.”
“걱정 마세요. 매니저님. 매니저님이 걱정하시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매니저는 씩 웃었다. 단유는 상담실 유리창 너머로 레슨실로 들어가는 선생님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슨 시작하는 거 같으니 먼저 일어날게요.”
“그래, 그래. 아, 그리고 혹시 뭐 물어보고 싶은 게 있거나, 부탁할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해줄게.”
“네.”
단유는 목례를 하고 상담실을 나갔다.
“절대, 라고?”
매니저는 단유가 단호하게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조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본인이 원했던 일이니 좋아야 했지만, 또 막상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하니 도연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모름지기 아이돌이란, 어느 누구에게나 ‘우상’과도 같은,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도연 씨는 지난번에 잠깐 인사를 했었고, 여기 잘 생긴 친구는?”
“김 단유라고 합니다.”
“연습생?”
“아뇨. 그냥 일반 학생인데요.”
“그래요? 혹시 연극 같은 거 해요?”
“아뇨. 그런 것도 안 해요.”
“아, 그래요.”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 이상 깊게 파고들진 않았다. 호기심은 수업 외 시간에 만나서 풀어도 될 일이다.
처음 온 단유를 배려하는 의미에서, 그리고 도연에게 연기에 대해 다시금 숙지시킨다는 의미에서 간단한 연기론을 설파한 선생님은 두 사람이 함께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연기를 시도하도록 지시했다.
“두 사람은 연인이에요. 나이에 맞게 학생 간의 연애로 해볼게요.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연애도 나이에 따라 대사와 행동이 달라져요. 엉큼한 생각은 하지 말고?”
웃기지도 않는 농담에 웃음이 나올 리가 없어, 단유는 덤덤한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다소 머쓱한 표정이 찰나 간에 지나간 뒤 선생님은 상황을 연출해 주었다.
“두 사람은 만난 지 세 달 된 학생 커플이야. 그런데 여학생이 주말에 시내로 나갔다가 어떤 여자랑 걷는 남자 친구를 보게 된 거야. 자, 이때 여학생은 어떻게 행동할까? 도연이는 여자 친구, 단유는 남자 친구. 오케이? 자, 스탠바이. 컷!”
도연은 쭈뼛대며 단유와 선생님을 번갈아 보았다.
“연애해 본 적 없어?”
“···네.”
“한 번도? 입 꾹 다물고 있을 테니까, 한 번도 없어?”
“없어요.”
“그래도 몰래 좋아한 적은 있지?”
“···네.”
선생님은 접이식 의자를 끌어다 앞에 놓고 그 위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가끔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상황을 연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이를테면 내가 너희들에게 40대 중년 부부가 주방에서 같이 요리하는 장면을 연기해 봐, 라고 하면 어떻게 할래요? 경험해 본 적도 없는데 할 수 없나요?”
도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사람의 경험은 몸으로 직접 한 것만이 경험이 아니에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간접 경험들도 모두 경험인 거야. 그러니 그 모습을 상상하고, 거기에 자신을 오롯이 대입해보는 거지. 그런데 그저 본 대로 들은 대로 하면 그게 연기가 될까?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행동을 했는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를 연기해야 한다고 했죠? 그래서 연기는 상대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와 공감해야 연기가 가능해지는 거죠. 아시겠죠?”
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 숙련도가 낮기 때문에 일부러 학생 커플로 설정한 거예요. 생각해봐요. 친구들이나 주위 사람들이 연애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나요?”
“아니요.”
본 적이야 있다.
“그럼 그 기억들을 떠올려봐요.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생각하고, 자신이라면 어떤 감정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를 궁리해요. 그리고 그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아시겠죠?”
도연은 단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라면···그 자리에서는 모른 척했다가 나중에 따로 만날 거 같아요.”
“좋아요. 그럼 나중에 다시 만난 남자 친구에게 걸어가는 순간부터 연기해보도록 하죠.”
도연은 몇 걸음 떨어진 뒤, 조금 과장되게 발을 굴리며 다가왔다. 화가 났다는 뜻이리라.
“왜 그랬어?”
수줍은 목소리.
“목소리가 작아요. 연기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목소리와 발음이 또렷해야 한다고 했었죠?”
“왜 그랬어!”
“감정이 너무 1차원적이야. 나 지금 화났어, 라는 감정을 그저 목소리를 키우는 것만으로 표현하려 하면 보는 사람은 식상해. 적당한 크기로, 하지만 발음은 정확히? 오케이? 다시.”
“왜 그랬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갔다. 단유는 대사를 뱉은 후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도연을 지켜만 보았다. 지금 자신의 역할은 상대의 연기를 받아주기만 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스톱. 갑자기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분위기가 되는데, 말했듯이 10대 학생 커플이에요. 방금 건 10대 여학생이 보일 수 있는 감정이라기보다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20, 30대 여주인공 같은 느낌이에요. 나이에 맞지 않는 연출은 관객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거든요? 조금 전의 이미지와 맞지 않고.”
도연은 다시 숨을 가다듬고, 대사를 뱉었다.
“왜 그랬어.”
“감정을 다스리려고 하지 말고, 토해내요. 발산해. 너무 눌린 느낌이야.”
“왜 그랬냐고!”
도연이 단유의 어깨를 밀었다.
“좋아! 그 정도는 괜찮아요.”
도연은 단유의 어깨 부근을 붙잡더니 흔들며 소리쳤다.
“왜 그랬어!”
“······”
“대답해!”
“······”
“나쁜 새끼.”
도연은 말로 뱉고는 얼른 입을 가렸다. 말이 너무 과하게 나왔다.
“컷! 마지막이 제일 좋았네. 거봐요. 몰입하면 된다니까?”
선생님은 손뼉을 마주치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