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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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마지막 촬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일중은 내부에서 조용히 수습되길 원했지만, 사건은 교육부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 애들끼리 의견 충돌이 생겨서 조금 목소리가 커졌을 뿐입니다. 절대 큰일은 아니었어요.”
뉴스에도 나오지 않을 만큼 사소한 문제고, 촬영을 못 한 부분은 차후에 다시 스케줄을 잡아서 촬영하면 될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비록 주말이라 하더라도 연예인이 나와서 촬영을 한다는 게 인근에 알려지면서 구경하러 나온 이들이 많았다. 이들의 눈을 모두 가릴 수도 없었고, 입을 막을 수도 없었다. ‘누구 촬영하는 촬영장에서 싸움이 있었더라’ 하는 말이 SNS를 타고 흘러간 것은 순식간이었다.
“위약금 배상하시고, 기존 촬영분은 전량 폐기하세요.”
“이 담당관님! 이 담당관님! 그러지 마시고, 일단 설명을···.”
담당관은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리본소녀 도연, 촬영장에서 싸움에 휘말리다]
일중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런 경우를 스노우볼(snow ball)이라고 하던가? 조그만 눈 뭉치가 구르고 굴러서 몸집을 키워가다 마침내 손으로 막지 못할 정도의 큰 덩치가 되는 것. ‘작은 구멍이 댐을 무너뜨린다’는 격언도 이런 경우에 쓰일 것이다.
“요즘 길에 조경이 잘 되어 있잖아? 약을 안 치면 나무에 온갖 벌레들이 생기기도 하지. 그런데 벌레가 꼬이는 곳에 보통 거미도 생기거든? 마침 새벽에 거미가 나무에서 거미줄을 쳐.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가며 거미줄을 치지. 그런데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그 거미줄 사이를 지나간 거야. 보이지 않는 끈끈한 거미줄이 얼굴에 붙으니까 얼마나 불쾌하겠어? 얼굴에 붙은 걸 떼어내려고 손을 휘젓지.”
거미줄이 얼굴에 붙는 상상만으로도 찝찝한 기분이다.
“그런데 또 마침 그 사람의 뒤에서 길을 걸어가던 이가 있었어. 앞사람이 갑자기 크게 손을 휘저으니까 놀라서 멈칫한 거지. 그랬더니 또 출근 중이던 한 여자가 핸드폰을 보느라고 그걸 못 본 거야. 부딪쳤어. 핸드폰을 떨어뜨렸지. 여자랑 앞에 멈춰 선 이가 동시에 핸드폰을 주우려고 허리를 숙이다가 여자가 풀썩 쓰러져. 저혈압이었거든. 남자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당황하다가 119를 불렀어. 구급차가 일찍 도착하려고 속도를 내 보지만 아침 출근 시간이라 차가 좀 막히네? 그래서 차선을 넘나드는 위험한 곡예 운전을 했지. 그러다가 사거리에서 사고가 나고 만 거야. 노란 불에 빨리 지나가려고 악셀을 밟은 자동차와 크게 부딪친 거지.”
사고 현장으로 긴급출동하는 구급차의 추돌사고는 뉴스에 종종 나오는 레퍼토리였다. 그럴 때면 ‘시민의식’이라는 단어가 댓글에 등장하곤 했다.
“자동차와 구급차가 크게 부딪치면서 서로 옆으로 튕겼고, 승용차는 빙빙 돌다가 인도를 덮쳤어. 출근 시간대라 인도에는 사람이 많았으니 당연히 부상자가 있었겠지. 그 부상자 중 한 명이 재정부 장관의 손자였어. 아침에 출근한 장관이 손자의 변고를 듣고 놀라서 나왔는데, 마침 그때 결제해야 했던 예산안이 결국 결제를 받지 못하고 만 거야. 그 예산안은 복지부에 배당될 예산이었는데, 예산 편성이 불발되었어. 복지부는 당장에 쓸 돈이 필요했는데 예산을 편성 받지 못해 오래 준비했던 기획을 포기해야 했어. 그 기획이 바로 전국 초중고 무료급식이었어. 결국 무료급식은 다음 추경안이 편성될 때까지 연기되었고, 전국의 학생들은 그동안 무료급식을 먹지 못했어. 결국 급식비를 내지 못해 굶는 아이도 생겼지.”
“말도 안 돼.”
말이 될 리가 있나. 그냥 생각나는 대로 지어낸 말인데.
“학생들이 급식을 먹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1번, 장관 때문에. 2번 노란불에 과속한 차량 때문에. 3번 거미 때문에. 4번 거리 조경수에 약을 치지 않고 내버려 둔 시청 때문에. 정답은?”
“거기에 정답이 어디 있어?”
“내가 지금 그 상황이다. 정답이 없는 상황.”
일중은 소주를 입안에 털어놓고는 안주 대신 고추를 된장에 찍어 씹었다. 아삭하고 매콤한 고추가 얼얼한 입안을 자극했다.
누구를 탓할까. 개념 없는 조명팀 막내라는 놈을 조진다고 상황이 해결될까? ‘고작’ 말 몇 마디 들었다고 미친놈처럼 달려들었다는 매니저를 욕할까? 연기를 존나게 못해서 촬영을 지연시킨 아이돌을 탓할까? 아니면 별거 아닌 홍보 동영상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깐깐하게 컷을 불렀던 자신을 탓해야 할까?
일중과 같이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는 같은 업계에서 종사하는 감독이었다. 일중과 달리 화보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데,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그런 잡지 화보가 아니라 조그만 광고 전단에 들어갈 사진이나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는 화보들을 찍는 감독이었다. 사실 일중의 동영상 작업이 끝나면 지면 광고용 사진을 찍을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물 건너간 일.
“꼴에 감독이라고 스토리는 뚝딱 만들어내네. 그걸로 영화 찍어라, 영화. 아주 대박 나겠어.”
“헛소리 그만하고 술이나 마셔라.”
허탈한 일중의 목소리에 친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일중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차가운 소주가 목을 타고 넘어가니 절로 크, 하는 탄식이 나온다.
“어차피 그쪽 매니저랑 문제가 생겼으니 더 촬영도 힘들었어. 촬영 스케줄 잡으려면 또 얼마나 시간을 보내야 하겠어? 그쪽은 요즘 잘나가는 걸그룹인데, 시간을 내기가 쉽겠어?”
“···야.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거냐?”
“그러니까 그만 털어내라고. 이런 위기를 극복해야 사람이 단단해지는 거야. 알잖아?”
“위기가 곧 기회다? 웃기시네. 기회가 곧 위기다, 이 자식아.”
부득이한(?) 사정으로 제작사를 긴급히 교체해야 했던 교육부였지만, 프로젝트 자체를 없었던 일로 돌리지는 않았다. 어쨌든 무조건 해내야 하는 프로젝트였고 제작사만 바꾸면 다소 시일이 걸릴지언정 문제는 없다, 고 판단했다.
당연히 도연의 소속사 측에서는 불편한 마음이 컸다. 새로 스케줄을 조정해야 하는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다시 촬영한들 도연의 문제가 또다시 반복될 염려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매니저가 의견을 냈다.
“같이 출연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와 함께 레슨을 받도록 하는 게 어떨까요?”
“레슨을? 우리가 왜?”
“사실은 그 친구가 호흡을 맞췄을 때, 도움이 됐었습니다.”
매니저는 레슨 선생님의 조언을 따른 도연이 단유와 ‘일시적’이나마 친구가 되어서 연기를 했을 때 도움이 되었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비싼 돈을 내고 레슨을 시켜줄 이유가 있어? 아니 그보다 지금 도연이한테 연기 레슨이 필요해?”
솔직히 말해서 도연이는 그냥 이대로, 가수로서 활동에 전념해도 문제가 없다. 아니, 가수로서 활동에 전념해야 할 때이다. 연기를 전혀 배울 필요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 그렇게 문제로 삼을 일인가 싶은 게 대표의 생각이었다.
“애초에 도연이를 거기에 출연시키려 했던 것도 내 욕심이었던 건지도 몰라. 그 때문에 괜히 애 자존감만 낮춘 게 아닌가 싶어.”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처럼 지금은 보컬이나 안무 레슨받는 것만도 벅찬 스케줄이죠. 하지만 전 이 기회가 오히려 도연이한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잖습니까? 도연이 카메라 울렁증. 이 기회에 완전히 고칠 수 있다면 좋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자주 카메라에 노출될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고 하지 않습니까? 도연이 성격 아시잖아요? 이번 일만 넘기면 분명히 성장할 겁니다.”
소속 연예인의 성장은 소속사의 기쁨이고 수익이다.
“게다가 말입니다. 같이 출연했던 그 친구, 꽤 탐나는 친구입니다.”
“이야기는 들었어. 그런데 그렇게 괜찮아?”
“제 마음 같아서는 A&R에서 한 명 데리고 가서 보여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확실히 재능이 있는 친구입니다.”
“그래? 듣기로는 에이바운스 쪽이랑 선이 닿았다고 들었는데? 유니 엔터랑도 관계있다고 하는 것 같고.”
“유니 엔터의 장 대표가 에이바운스 매니저 시절에 알게 되었다고는 하는데,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거기까진···. 그런데 그런 것보다 중요한 건 그 친구가 아직 무소속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탐이 날 정도의 인재라면 왜 에이바운스에서 가만히 있냐는 말이지. 에이 바운스의 박 이사가 회사는 못 키워도 애들 보는 건 좋다는 거 다 아는데 말이야.”
“그게 실은···연예인 쪽으로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관심이 없어? 그러면 우리도 못 먹는다는 소리잖아?”
“대표님, 그런 친구가 어디 한 둘입니까? 그런 친구들 설득해서 성공할 수 있게 돕는 게 우리 일 아닙니까?”
그 뒤로도 매니저는 끈질기게 대표를 설득했고, 결국 대표는 한번 만나는 보자고 이야기했다. 물론 단유와 도연의 합동 레슨도 통과되었다.
“네···.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죠? 아, 예. ···예. 그럼 거기서 뵙고 이야기 나누죠. 오신다고요? 아뇨, 그러실 것까진 없고요.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아뇨, 괜찮아요.”
“뭔데?”
명수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있다가 물었다.
“도연 씨 회사 매니저 형인데 좀 보자고 해서.”
“또?”
“응.”
명수는 아이스크림을 아득 씹으면서 멍하니 운동장을 보다가 말했다.
“뭐, 시험도 끝났으니까 바쁜 일은 없잖아?”
“그렇기도 하고, 마침 그쪽으로 갈 일도 있으니까.”
“뭐?”
“번역회사에서 보자고 해서.”
“···이럴 때 보면 넌 학생이 아닌 거 같아.”
“학생이 아니면?”
“영업사원? 부르면 달려가는 슈퍼맨?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달려가는 로봇?”
명수가 읊은 세 가지의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 한 호흡에 쏟아져 나오니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아침에는 교장 선생님이 부르고, 점심때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전화 오고, 정말 바쁘다 바뻐, 김단유.”
“그러게.”
“그런데 왜 보자는 거야?”
“이유는 모르겠어. 그냥 일 때문이라고 만나서 이야기 하자던데.”
“설마 또 앨범 내자고 하는 거 아니겠지? 그럼 너 완전히 가수 되는 거 아냐?”
“그럴 일도 없고, 그러지도 않을 거야.”
“뭐 어때? 솔직히 차트 1위 하면 지금 버는 것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다잖아?”
단유는 명수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다 먹은 아이스크림의 빈 막대만 쪽쪽 빨던 명수가 단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말했지? 돈은 문제가 아니라고.”
“야, 솔직히 돈이 문제가 안 될 수는 없지. 내가 비록 프로축구선수가 되려는 이유가 축구를 좋아해서라지만, 그렇다고 돈을 포기할 순 없잖아? 돈도 중요한 고려 조건이야.”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어쩐지 설득력이 상당히 떨어진 기분이지만, 맞아. 네 말이. 그래도···돈 걱정은 하지 마.”
“왜? 너야 지금 돈을 잘 벌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돈은 많이 벌 수 있어.”
“어떻게?”
미성년자는 귀금속 제품을 사들일 능력이 없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귀금속을 판매할 때도 장물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더군다나 감정서가 없는 귀금속이라면 특히나 판매 절차가 복잡하고 어렵다.
그러니 만 20세가 지나면, 그래서 귀금속 판매에 제약이 사라지면, 단유는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명수에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나 똑똑하잖아.”
“와, 재수 없어!”
단유는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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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레슨을 받지 않겠냐는 매니저의 말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게다가 레슨을 받게 되면 제가 공부할 시간도 줄어들어서 힘들 거 같아요.”
매니저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레슨은 우리 회사가 있는 곳이 아니고, 여기 근처에서 할 거야.”
“여기 근처요?”
되묻는 단유의 앞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아주는 매니저였다. ‘고맙습니다’라고 짤막하게 대답하는 단유에게 미소를 보인 후 대답을 이어나갔다.
“연기 학원에서 수업을 받거든. 도연이도 이쪽으로 와서 수업을 받아야 하고. 이왕에 너희 둘 같이 연기를 해야 하는데 미리 호흡을 맞춰놓으면 좋지 않겠니? 물론 우리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도연이 때문이야. 도연이가 지난번처럼 불편한 시선을 받으며 촬영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야. 그리고 네가 도와준다면 한결 좋아지지 않겠어?”
매니저의 단유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고 느끼는 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매니저는 단유가 그저 어린, 다른 또래들과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았고 인지했다. 그래서 정직하게, 그리고 나이와 상관없이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단유는 사소하지만 매니저의 어투와 행동에서 그런 마음을 느꼈고, 그래서 고마움도 느꼈다. 적어도 이 매니저는 함부로 사람을 무시할 사람은 아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