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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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야 뭣도 모르고 그랬다 하더라도, 점점 나이가 들면서,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게 되면서 드는 생각은 어린아이가 어른과 동등한 시선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단유의 지난 시절,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다른 어른들에게 좀처럼 좋게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러는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화가 나게 했을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저쪽 세계에 비하면 양반이긴 했다. 적어도 어린이날이라도 만들어주니까. 하지만 이곳도 저쪽 세계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점도 있다. 무엇보다 ‘대화’가 안 된다. ‘대화’를 할 준비가 안 된 어른들이 많았다.
“나 참. 기가 막혀서.”
일중은 이런 꼬마에게까지 우습게 보이는 현실이 개탄스러웠다.
“네가 그런 말 안 해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그만 가보지?”
단유는 고개를 돌려 도연을 바라보았다. 도연도 단유를 보고 있던 참이라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수차례 경험한 사실이지만, 대화의 준비가 안 된 사람과 대화한다는 것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4박 5일 동안 사막을 건너는 일 만큼이나 고된 일이었다. 이성과 합리로 설득하려 해도 상대는 감성과 억지로 방어벽을 단단히 두르고 모욕과 멸시의 창으로 찔러댈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은 약점이지만 동시에 그들의 선입견에 기대어 무자비한 독설을 날릴 수도 있는 강점이다. 기껏해야 철이 없다느니, 혹은 싸가지가 없니 하는 소리만 들을 뿐이니 그 정도만 감내한다면 속 답답할 일은 없다.
“물론 감독님은 현명한 어른이시니 잘 처리할 겁니다.”
상대가 자신을 깎아내리려 해도 같이 어울려서는 안 된다. 적당히 상대의 위신을 세워주는 것은 싼값에 물통을 마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비굴하다고 여길 일도 아니다.
“지금 감독님은 갑작스러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 것이잖아요? 그런데 한 사람은 감독님의 스태프 중 한 명이죠. 방금도 그분의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고요. 제가 ‘학교’에서 배운 바로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최대한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니 이해관계가 얽힌 지금은 그런 객관성이 과연 유지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지 않나요?”
또 하나의 요령이랄까? 어떤 토론에서든 ‘원칙’과 ‘기본’은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그것은 훌륭한 명분이 되며, 상대의 논리를 밑바닥에서 흔들 수 있는 유용한 무기이다. 비유하자면, 목을 축일 수 있게 해주고, 물통을 시원하게 만들며, 흥분한 머리를 식혀주는 얼음과도 같다.
단유는 상대의 반응을 적당히 살피면서도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굳이 따지면 매니저님은 감독님에 비해 을이잖아요. 최소한의 변호도 정황상 못할 가능성이 높죠. 그냥 미안하다고 할 가능성이 커 보이는데요? 그러면 당장은 문제가 덮어질 순 있겠지만, 매니저님이나 혹은 저기 저분 같은 경우에는 억울할 수 있다고 봐요. 저분도 단지 ‘막내’라는 이유로 ‘소란’을 피웠다는 외형에만 초점을 맞춰 비난하실 게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어떤 부분이 감정을 상하게 했는지를 소상히 듣고 판단하셔야 억울한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주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상대가 반박할 틈을 주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특히 상대가 자신보다 어른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웃기는 녀석이네. 너 지금 누구 앞에서 잘난 척이야?”
물론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
“잘난 척이 아니라, 그저 걱정이 들어서 드린 말이에요.”
“허, 나 원 참. 살다 살다 중학생한테 훈계를 다 듣네. 야, 오지랖 떨지 말고 들어가라. 응? 좋게 이야기할 때 들어.”
“실례했습니다.”
단유는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한 후 교문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을 바라보는 도연의 시선이 느껴지지만 단유는 모른 척했다. 괜히 더 시간을 끌면서 미적대는 건 감독의 심기를 어지럽혀 좋지 않다.
단유의 말이 당장 감독을 설득시킨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감독이 ‘아, 그렇구나. 내가 생각이 짧았네’라고 반성할 거란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단유도 거기까지 바라지는 않았다. 다만 매니저나 도경과 같은 이들이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했으니, 단유가 이야기한 ‘원칙’은 모두의 의식에 깊이 새겨졌을 것이다. 단지 ‘원칙’을 상기시켜 놓음으로써 그들은 원칙을 벗어나기 힘들다.
“빨간 불에는 건너지 마세요.”
라는 이야기를 들은 직후에 ‘난 빨간 불일 때 건너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더구나 건널목 앞에 선 이들이 모두 ‘빨간 불일 때는 건너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경우라면, 그 원칙을 어기고 일탈을 범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단유가 교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감독이 시선을 돌려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짧은 헛기침을 뱉은 후,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었습니까.”
도연은 이 모든 일이 다 자기 탓이라는 생각에 오들오들 떨었다. 자신이 연기만 잘했어도, 욕심만 덜 부렸어도 오늘의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괜찮니?”
도경이 도연의 어깨를 짚으며 물었다. 측은한 표정. 아마 도경도 사실은 자신을 책망하고 있을 것 같았다.
“괜찮아요. 저기 혼자 좀 있고 싶어요.”
도경은 얼른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적당한 자리를 찾다가 물었다.
“차에 가 있을래?”
“키가 없잖아요.”
“아, 참.”
자동차를 키를 든 매니저는 지금 감독과 함께 따로 면담 중이었다.
“그럼···뭐 마실래? 아까 보니까 학교 밖에 편의점 있던데 뭐라도 마실 거 사다 줄게.”
“아뇨, 괜찮아요.”
“그러니? 그럼, 나라도 마실 거 좀 사와야겠다. 그래도 되겠니?”
“그러세요.”
도경은 도연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 준 뒤 뒤돌아섰다. 멀지 않은 곳에 단유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단유가 고개를 들어 도경임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좀 걸을래?”
손가락이 향하는 교문을 한 번 바라본 단유는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일어섰다. 뒤를 슬쩍 보며 도연이 혼자 있는 것을 확인한 단유는 별다른 말 없이 도경과 나란히 서서 걸어갔다.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뭐가요?”
“너 아니었으면 아무 말 못 하고 그냥 혼만 났을 거 아니니.”
“설마요. 제가 별말 안 했더라도 매니저님이나 누나가 한마디 했겠죠.”
“야, 그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니? 나 그렇게 억센 여자 아니다? 네가 보기엔 내가 무슨 여장부 스타일로 보이든?”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할 말은 꼭 하실 것 같은데요.”
“아냐 아냐. 나 의외로 소심해서 그런 말 잘 못 해.”
그런 분이 단유를 처음 만났을 때, 인생에 대한 조언을 해줬었다.
“아무튼, 고마워.”
“네.”
“그런데 너 정말 되게 똑똑해 보이더라. 너 공부 잘한댔지? 만약에 나중에 판검사 같은 거 하면 정말 잘하겠더라.”
“고맙습니다.”
괜히 판검사는 생각이 없어요, 같은 말을 꺼내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단유는 감사 인사로 대체했다.
“그런데 진짜 넌 연예인 생각 없어?”
“네.”
“왜? 넌 하면 되게 잘할 거 같은데? 솔직히 지금까지 촬영하면서 별로 혼난 적도 없었잖아? 뮤직비디오 촬영 때도 그렇고. 너 정도면 먹고 살 정도가 아니라 빌딩 2~3개는 살 수 있을 정도로 벌 수 있을 거 같은데.”
단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가만 보면 사람들의 직업을 고르는 기준이 참 단순하다. 공부를 잘하면 의사, 변호사, 검사. 얼굴이 잘생기고 끼가 많으면 연예인. 얼굴이 잘생겼으면 모델. 운동을 잘하면 운동선수, 운동을 못 하면 공부. 수학을 잘하면 수학자. 옷을 좋아하면 디자이너.
공부를 잘하더라도 뜻이 없으면 의사, 변호사, 검사 대신 디자이너가 될 수도 있고, 얼굴이 잘생긴들 꿈이 있으면 승무원이나 선생님이 될 수도 있다. 운동을 잘해도 군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수학을 잘해도 경찰이 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마치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만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애를 쓴다는 냥 의식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아니, 요즘은 공무원이라던가?
게다가 직업 선택의 기준은 돈이다. 돈을 잘 버는 직업.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사람의 재능과 꿈이 제각기 다르고, 돈보다 얻는 성취감과 행복이 모두가 다르게 마련인데 세상은 점점 하나의 기준, 하나의 생각으로 통일되는 듯하다.
“스타일리스트는 꿈이 아니었어요?”
“꿈, 까지는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니 된 거지.”
막상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려니 어색했던 모양이다. 도경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도연이랑 친구 먹었다며?”
“촬영하는 동안만요.”
“촬영하는 동안?”
단유는 간단하게 사정을 밝혔다.
“너 예전에 수련이나 나윤이랑 친하게 지냈잖아? 그것처럼 친하게 지내면 되지.”
단유는 얼굴을 굳혔다. 사실 수련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모르는 일이고, 스스로도 밝힐 생각은 없었다. 변명할 일도 없고. 이렇게 두 사람이 친했던 과거를 아는 사람을 만날 기회가 얼마나 된다고 변명 따위를 준비하고 지낼까.
“요즘도 연락하고 지내니?”
“수련 누나요?”
“응.”
“아뇨.”
“왜? 아, 요즘 수련이가 바쁜가?”
도경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단유를 보니 단유의 표정이 밝지가 않았다. 눈치가 전혀 없지는 않아 도경은 입을 다물었다.
태호, 수련, 그리고 그 외 갤럭시즈 멤버들. 특히 태호가 단유와의 관계를 빌미로 재훈에게 돈을 받아간 순간부터 그들과의 관계는 끊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 때문에 재훈이 단유와 명수의 보호자 역할을 포기했다, 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었다. 마치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축구 전쟁과 같다. 단유에겐 아무런 언질도 없이 벌어진, 두 사람 간의 사소한 돈거래였지만, 결과적으로 단유는 재훈은 물론 수련과 갤럭시즈 멤버들 전부와 연락을 끊게 만든 일이었다. 그들을 미워하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과 연락할 마음이 있냐고 묻는다면, 역시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용 당했다? 그런 건 아니다. 단지 그들의 이기적인 행동 하나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상황들이 단유로 하여금 그들과 만나기를 꺼리게 만들었다. 특히 나윤이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던 모습을 기억하는 한은 그들과 편하게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상념에 빠진 단유의 어깨를 친 도경. 단유가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도경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제야 소란스러운 움직임과 고함 소리가 단유에게 다가왔다.
“놔, 씨발. 내가 진짜···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씨발!”
“야, 놔 봐라. 내가 오늘 저 새끼 멱따고 내 발로 경찰서 갈라니까, 놓으라고.”
“아, 형님 왜 그러세요? 참으세요.”
“놓으라니까!”
“놔!”
“이 새끼가. 정신 안 차려?”
뒤죽박죽으로 들려오는 고함 소리들은 또 다른 난장판을 예고하는 것일까? 도경은 저도 모르게 단유의 팔을 붙잡았다.
교문 밖에서 싸움을 벌인 건, 비록 막내가 드러나긴 했지만 같이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공범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막내가 유난스럽게 화를 내며 매니저와 맞짱(?)을 뜰려고 했고 이를 말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을 뿐이다.
하지만 정 PD가 교문 밖에서 소란을 진정시킨 후, 막내를 데리고 교내로 들어온 조명 감독은 그 사실을 몰랐기에 막내를 쥐잡듯이 잡았다. 막내는 억울하다며 분해하다가 분을 참지 못하고 또 상스런 욕을 입에 담았고, 어이가 없는 상황에 조명 감독이 불같이 화를 냈다.
“씨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래요, 정말! 아, 진짜 열 받아서 못 해 먹겠네.”
“이 새끼가. 누구 앞이라고 욕이야? 응?”
“야, 경덕아. 왜 그러냐, 참아.”
“아, 진짜. 형님도 그러시는 거 아니죠. 형님도 같이 있었잖아요? 우리가 무슨 틀린 말 했어요? 우리가 무슨, 씨발, 패드립치고 섹드립 날렸어요? 뭘 했다고 이런 대접을 받냐고요.”
“새끼야. 그래도 형님 앞에서 그러는 건 아니지.”
“아놔. 진짜.”
침을 뱉는 막내의 불손한 태도에 조명 감독은 꼭지가 돌았고, 손바닥이 날아가 막내의 머리를 쳤으며, 막내가 눈을 꼴아 보며 ‘쳤어요? 지금 나 쳤어요? 응?’이라고 대드는 일이 벌어졌다. 조명 감독이 동생들을 뿌리치고 한 대 더 때리는 순간, 받아치는 막내 때문에 싸움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진짜 주먹질이었다.
‘우습다.’
단유의 솔직한 감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