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89화 (489/956)

코미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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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 때문에 축구에 관심이 생겨서 이것저것 찾아보던 때가 있었다. 방과 후 보육원으로 돌아가기 전, 학교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려 보던 시절의 이야기다.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2천여 명의 사망자, 만 이천여 명의 부상자, 5만여 명의 피난민이 발생한 전쟁이었다. 2차 대전도 아닌 1969년, 대한민국에서는 한참 제 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시행되던 때였다.

엘살바도르가 온두라스를 먼저 침공한 이 전쟁은 약 100시간 동안 벌어졌으며, 짧은 시간에 많은 희생자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전쟁의 이유가 재미있다. 물론 당사자인 두 나라에겐 중대한 이유였겠지만 외부에서 보기엔 너무 ‘사소한’ 문제라 여길 만한 이유였다.

전쟁의 원인은 1970년 월드컵 예선에서 맞붙은 두 나라의 축구 시합 때문이었다.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물론 이전부터 두 나라 간에 월경(越境)이나 토지문제 등으로 다툼이 있었으나, 축구가 기폭제가 되어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사소한 이유’가 큰 싸움의 원인이 되는 경우는 종종 볼 수 있다. 별거 아닌 사소한 말 한마디에 형제끼리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주먹질을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쩌다 나온 말 한마디에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 부부도 있다.

형제나 부부가 그럴진대, 생판 남이면 어떨까? 타인이기에 더 조심스러울 수도 있지만, 서로를 모르기에 ‘어떤 말’은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실수’라고 넘기거나 용서를 구하고, 사과를 받으며 끝나는 상황이라면 점잖은 편이다.

“당신 뭐랬어!”

“뭐? 당신? 당신?”

“어린 놈의 자식이 어디 눈을 시퍼렇게 뜨고 쳐다 봐?”

“봐? 봐? 와, 그냥 말 까네? 댁이 날 언제 봤다고 말을 까? 응?”

시작은 뭐였을까? 하지만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면서, 모두가 그 싸움을 인지했을 때쯤에는 싸움의 원인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던 모양이다. 상대가 자신의 자존심을 건들였고, 본인은 잠깐 이성을 잃었을 뿐이고, 이성을 잃은 순간 입에서 통제를 벗어난 말과 단어가 튀어나와 상대를 자극했으며, 흥분한 상대가 거품을 물고 주먹을 치켜 올리며 칠 듯한 자세를 취하면, 상대에게 얕보일 수 없다는 본능이 울컥 치밀어 올라 함께 멱살잡이를 시작한다. 대부분 그렇게 시작한다.

그나마 이성이 있다면, 그리고 이성을 가진 주변인들이 옆에 있다면 싸움은 거기서 대치 형국으로 이어지거나, 혹은 타의에 의해 서로 떼어지면서 눈을 부라리는 정도로 마무리될 것이다. 하지만 주변인의 이성이 함께 안드로메다로 갔던지, 아니면 싸움을 말려야 한다는 이성의 목소리를 들을 귀가 없다면 싸움은 본격적이 될 것이다.

단유가 본 싸움은 바로 그 본격으로 넘어가기 바로 전 단계였다.

“새끼가 어디라고 행패야?”

“새끼? 말 다했어? 오냐 오냐 해주니까 아주 막 나가자 이거네? 응?”

“오냐오냐? 이게 미쳤나? 당신이 뭔데 오냐 오냐를 해? 당신이 뭔데?”

단어의 취사선택이 가히 상스러운 경지에 오르기 전, 억센 억양과 거친 파열음이 터지는 순간이다.

“아, 왜들 그래요? 애들도 보는데.”

“뭐해요? 말려요, 얼른.”

말리는 이들이 붙잡은 건 조명 스태프 중 한 명이었다. 나이가 많지 않은 이였는데, 보통 드센 성격이 아닌지 선배들이 잡고 있는데도 ‘놔요, 이거 놔 봐요!’라며 저항하며 눈을 뒤집고 있었다.

한편 상대는 고작 한 사람만 그의 팔을 붙잡고 있는데, 다름아닌 도경이었다.

“매니저님 참아요. 왜 그래요?”

“놔 봐! 저 어린 놈의 자식이 싸가지 없게···.”

듣던 어린 놈이 눈을 뒤집었다.

“뭐? 어린 놈? 싸가지? 이게!”

어린 놈이 잡고 있던 팔을 뿌리치며 달려들었다. 장정 세 사람이 안고 있는데도 힘을 막을 수 없다. 그냥 시늉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칠 기세인지라 다른 이들이 얼른 달려와 둘 사이를 막는다.

“야, 오광철! 뭐하는 짓이야!”

굵은 팔뚝을 드러내며 등장한 조명 감독이 귀청이 나갈 정도로 큰 소리를 질렀다.

단유의 바스트 샷을 찍다가 교문 근처가 소란스러워지면서 사람들이 몰리는 분위기라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사람들.

“강준아.”

책망하는 기색이 역력한 부름에 강준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 진짜.”

도대체 밑의 애들은 뭐하길래 촬영장 통제도 못 하고 있는가 답답한 마음에 강준은 구시렁거리며 교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강준이 가고도 소란이 쉬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카메라를 잡고 있던 감독도 집중을 못 하고 교문 쪽을 향해 힐끗거렸다. 일중의 신경이 날카롭다 못해 이마에 핏줄이 곤두설 때쯤 강준이 아닌 다른 스태프 한 명이 달려왔다.

“싸움이 났는데요?”

“싸움? 누가?”

“조명 팀 막내랑 도연 씨 매니저요.”

“뭐? 막내랑 매니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조합이었다. 온갖 궂은일은 다하면서도 찍소리 하나 못 내야 정상일 막내가 감히 싸움판을 벌였다는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연예인의 매니저가 자기 연예인의 일터에서 싸움을 벌인다? 상식적이지 않다. 상식적이지 않으니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다. 일중은 스크립터에게 모니터와 장비를 지키도록 지시한 후 교문으로 향했다. 그 뒤를 촬영감독과 촬영팀 스태프들이 우르르 따라갔다.

싸움이 났다고 해도 어른들의 일이었고, 그들만의 사정이 있을 테니 단유가 끼어들 이유는 없었다. 끼어들 틈도 없을 테고. 그래서 단유는 제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며 쉬려고 했다. 도연과 도경이 황급히 교문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

짧은 순간이지만 갈등했다. 솔직히 말해서 도연과 단유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비록 몇 시간 전에 도와달라고 해서 친구인 양 말도 놓고 사적인, 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대화 몇 마디를 나눈 게 전부다. 그리고 오늘의 촬영이 끝나면, 소소한 지면 광고 촬영 외에는 만날 일도 없을 관계다. 남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과 달리 가슴에서는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왜냐하면 도연은 이 현장에서 소수이자 약자이기 때문이었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제외하면, 나이 어린 여자에 불과한 데다가 자기편이라곤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 뿐인데, 그 매니저가 싸움의 당사자이니 도연을 지켜줄 이는 스타일리스트 뿐이다. 그런데 상대는 조명팀. 그 사람이 이 현장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는지는 몰라도 굳이 세력을 구분하면 몇 사람을 제외한 현장의 모든 사람이 그의 편이다.

그러니 도연은 그 싸움의 현장에서 소수고 약자다.

‘참나.’

단유는 자신이 내린 결론의 억지를 비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유가 바라본 싸움은 그랬다. 이성을 상실한 감정의 대립. 주먹질 일보 전까지 갔지만, 두 사람 다 싸움을 해결하려는 이성적 움직임은 없다. 감정적인 말과 행동, 조금이라도 상대를 깎아내리려는 저열한 말들만 오갈 뿐이었다. 감정이 앞서니 더더욱 화를 부추기고 대립은 첨예하게 부딪힌다.

“오빠, 그만 해요.”

매니저를 붙잡은 도경과 그 옆에서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도연. 그리고 조명팀 막내의 팔과 허리 등을 감아서 잡고 말리는 중인 사람들.

역시나 단유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애들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거리야! 여기 촬영장인거 몰라?”

아무리 자기가 박찬욱 같은 유명한 영화감독도 아니고 국내 굴지의 광고기업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촬영장에서, 자신의 눈이 닿는 곳에서 싸움이 벌어질 정도로 권위가 무시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왜 싸운 거야!”

싸움의 두 당사자가 서로 노려보는 가운데,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조명팀의 한 사람이 겨우 입을 열었다.

“막내가 조금 불평을 했어요. ···촬영이 지연되는 것 때문에요. 그랬더니 저 매니저가 달려들어서는 막내를 몰아붙였고, 막내도 이성을 잃었는지 같이 말을 주고받다 보니···이렇게 됐습니다.”

다른 거 다 떠나서, 막내가 촬영 지연을 불평할 정도로 촬영장의 군기(?)가 빠졌다는 사실에 열이 받은 일중이었다. 막내를 노려보는 일중의 고리눈에 막내가 매니저를 삿대질하며 변명했다.

“저 새끼가 먼저 달려들었다니까요?”

“새끼라니! 저게 진짜···.”

매니저가 욱하는 표정으로 달려드는데, 도경의 손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너 말조심해, 내부인도 아니고 외부인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막내는 답답하다는 듯 허리에 손을 얹고 탄식을 쏟아냈다.

“존나 열 받네.”

“네가 먼저 뭐라고 했으니까 이런 일이 벌어졌을 거 아냐!”

같은 편끼리 보호해주진 못할망정, 자기만 잘못한 사람인 양 몰아세우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막내였다.

“별말 안 했어요!”

그 말에 매니저가 침을 튀기며 소릴 질렀다.

“안 해? 안 했다고? 이 씨발 놈이 사람을 완전히 갖고 노네?”

“오빠!”

“뭐? 씨발?”

세 사람을 달고도 한 걸음 내딛으며 달려들려는 막내. 다시 사람들이 달라붙어서 ‘왜 이래’ ‘야, 그만해’ ‘진정해’ 같은 말들이 요란스럽게 오갔다.

단유는 그 형편없는 행태들을 눈에 담았다.

매니저는 학교 근처에 있던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서 스태프들에게 나눠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교문을 향해 걸어가던 중이었고.

그런데 교문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스태프들의 이야기가 담을 넘어 들렸다.

“연기 ×도 못하지 않아요? 그러면서 왜 연기를 하겠대?”

“요즘은 개나 소나 연기한다고 나서잖아?”

“가수만 해서는 돈을 못 버니까 그래. 이제는 연예인도 멀티 뛰는 시대라고.”

매니저는 순간적으로 혈압이 올라 현기증이 나는 느낌이었다. 누구는 제 놈들 수고한다고 음료수라도 사줘야지, 생각하는 판인데 정작 그들은 흉이나 보면서 깔보고 있다.

“그쪽 회사는 애들 연기도 안 가르치고 보낸 거야, 뭐야.”

“민폐지. 그게 민폐야.”

“얼굴만 반반하면 다들 연기 한 번씩 해보겠다고 깝죽대는 꼴이라니.”

“우리가 영세하다고 깔보는 거 아냐?”

“에이, 그럼 지들은요? 지들이 무슨 JYP야, SM이야?”

빡(?) 돈 매니저가 불같이 화를 내며 교문을 벗어났고, 당연히 그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욕을 들으면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기분이 나쁘다. 특히 혈기 왕성한 20대 막내는 분기를 참지 못해 앞에 섰다.

“갑자기 뭐야! 당신이 뭔데 지랄인데?”

“뭐, 지랄? 이 새끼가···.”

“뭐? 새끼?”

말꼬리를 주욱 늘리며 기분 나쁘다는 티를 한껏 낸 막내가 눈썹을 추켜 올리며 이죽거렸다.

“씨발, 매니저가 이 모양인데···.”

뒷말은 듣지 않아도 도연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주먹질 일보 직전까지 갔다.

“당신도 여기가 어디라고 소란을 피워! 내가 우스워?”

감독이 매니저에게 소리쳤다. 그래도 차마 감독에게만큼은 큰 소리를 낼 자신이 없었던지, 아니면 사람이 몰리면서 이성을 찾은 것인지 매니저는 입술을 꾹 다물고 감독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아니, 여전히 막내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리고, 강준이.”

“네.”

“애들을 어떻게 관리하길래, 막내가 이런 소란을 피우도록 내버려두는 거야? 응?”

일중이 강준의 가슴을 주먹으로 말뚝 박듯 찍어 쳤다. 맞은 통증과 부끄러운 마음이 섞여 강준은 맞은 자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얼굴을 가득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응? 개판으로 만들래? 만들고 싶어? 날 잡아서 복날 개 잡듯이 해야 되겠어?”

“아닙니다.”

“아니면 잘해야 할 거 아냐! 말로만 떠들지 말고 잘하라고 새끼야!”

일중은 강준을 혼냈다. 모든 스태프와 외부인들이 보는 앞에서 욕먹는 강준의 심정이야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이렇게 해야 했다. 그래야 질서가 선다고 생각했으니.

“다들 안 돌아가고 뭐 해? 촬영 안 할래? 다 접을까?”

일중의 호통에 다들 학교로 뛰어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도경과 도연, 그리고 단유는 자리에 남았다. 도경과 도연이야 매니저를 말리느라고 있는다지만 단유는 왜?

“너도 들어가 있어.”

차마 단유에게까지 큰 소리를 낼 순 없었지만, 여전히 분히 풀리지 않은 감독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단유는 일중의 호통에 매니저와 막내를 돌아보았다.

“왜 안 들어보세요?”

“뭐?”

“왜 이분께는 여쭙지 않느냐고요.”

일중은 이제 이 어린 꼬마까지 자신을 우습게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한숨을 내쉰 뒤 귀찮다는 표정으로 턱짓을 했다.

“그냥 들어가서 대기하고 있어라.”

조용히 얘기할 때 들어라. 뭐 이런 뜻이리라.

“들어갈게요. 그래도 대답은 해 주세요.”

“뭘?”

“이 분께도 사태에 대해 청취하시겠다고요. 한쪽의 말만 듣고 상황을 이해하시는 건 올바른 처사가 아니라고 봅니다.”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 상황을 마무리 지을 사람은 감독밖에 없었고, 그 감독이 한쪽의 말만 듣고 상황을 넘기려 하면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겠는가? 적어도 억울하지는 않게 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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