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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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가 따라오는 것을 확인한 도연은 멀지 않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돌아섰다. 녹음이 푸르러 그늘마저 푸르게 느껴지는 시원한 곳이었다.
“저 좀 도와주세요.”
도와달라고 해도 단유로서는 막막하기만 하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데, 도연은 어떤 부탁을 하려는 것인지 머뭇거림이 길었다.
“사실은 최근에 연기 연습을 받았는데요.”
도연은 그저께 연기 레슨을 받던 중의 일을 떠올렸다.
“가수라서 그런지 발성은 좋네.”
“고맙습니다.”
“대사도 잘 외우고. 그런데 연기란 건 그냥 목소리만 내는 게 아냐. 사실 가수도 무대 위에서 연기를 펼치는 건 마찬가지라지만, 카메라 앞에서 대본에 따라 연기하는 건 또 다른 거거든.”
“네.”
“지금 당장 메소드 연기법 같은 걸 배운다고 실천할 수도 없는 문제니까, 간단하게 이야기할게. 일단 액팅(Acting)을 한다는 건, 지금의 너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뜻이야. 대본이나 혹은 기타 디렉션에 따라 꾸며진 모습을 과장해서 보여주는 행위지. 그런데 이 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뭘까? 아까 말했던 발성도 중요하고, 감정도 중요하고, 동작도 중요하고 그렇겠지? 하지만 난 ‘자연스러움’이 가장 중요하다고 봐. 자연스럽게, 보는 이로 하여금 위화감이 들지 않게 하는 것. 이게 가장 중요해. 감정, 행동, 발성 같은 건 그런 ‘자연스러움’을 위한 부수적인 것들이야.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서 감정을 다스려야 하고, 행동이 과하지 말아야 하며, 꾸민 듯한 발성이 나오면 안 되는 거지.”
선생님은 연습에 지친 도연에게 땀을 닦으라며 수건을 건넸다. 그리고 말을 계속 이었다.
“네가 카메라 앞에서 어색한 건 마음의 문제야. 그건 당장 어떻게 해줄 수 없어. 하지만 조언을 하자면, 혼자 연기하는 것이 아닌 상대 배역의 도움을 받길 바랄게. 물론 상대도 초보라면 문제가 있겠지만, 그래도 네 연기가 개선될 여지는 있어.”
“어떻게요?”
“감정을 주고받아.”
“감정을요?”
“우리 몸은 정직해. 자신이 품은 감정에 따라 좌우되지.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눈빛이 변하고, 목소리의 톤이 변하고, 움직임이 변해. 그러니까 먼저 감정을 가져.”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해요?”
“그건 대본에 따라 다르겠지. 만약 상대가 연인이라면,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품는 거야. 그 마음을 계속 되뇌면서 상대의 이름을 부르고, 상대의 눈을 바라보고, 상대의 연기를 받는 거야. 만약 상대가 부모님의 원수다, 그러면 원수를 향한 마음을 가지는 거야. 무슨 뜻인지 알겠니?”
“몰입이 어려울 거 같아요.”
“그래, 당연히 어렵겠지. 그런데 적어도 네 가슴 속에서 그 마음을 계속 되뇌는 게 중요해. 계속 되뇌면서 카메라를 잊는 거야. 널 바라보고 있는 카메라와 시선들을 잊고 오로지 상대에게 초점을 맞추는 거지. 그리고 대사를 떠올려. 암기한 대사들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게 하는 거야.”
말은 굉장히 쉽게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울 리가 없었다.
“만약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도움을 받는 것도 좋아.”
“어떻게요?”
“상대 배우에게 부탁해. 감정을 잡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물론 이런 어설픈 방식은 전문 배우를 꿈꾸는 이들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초단기로 연기 레슨을 받겠다는 도연에게는 극약 처방이 될 수 있다고 선생님은 판단했다.
“친구처럼요?”
“네. 친구처럼 이야기를 좀 나누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해서요.”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 효용성에 대해선 의심이 들었다. 가수나 배우라고 해도 모두가 감성적인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감정이 아닌 기술이 필요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기술이나 감정이나 연습이 부족한 단유가 그나마 연기를 할 수 있는 것도 평상시 단련된(?) 무표정과 무감정이 도움이 된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단유가 본 도연은 그런 감성적 접근이 유용하지 않을 것 같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도연은 자신과 비슷한 유형이었다. 감성보다 이성으로 접근하는 케이스. 카메라가 두렵다지만, 그것도 다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서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단유였다.
그러나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깃든 도연을 보니 굳이 그렇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지 싶었다. 게다가 만약 단유가 잘못 판단한 것이라면, 도연의 선생님이 말한 방법이 도연을 도울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돼요?”
“일단 설정상 동급생이니까 말을 놓을···까요?”
“그래요.”
“그럼 먼저 놓으세요.”
“도연 씨가 먼저 놓아요.”
“아, 그, ‘도연 씨’라는 호칭도 바꾸죠. 친구끼리 무슨 씨 하는 건 이상하잖아요.”
“그럼···.”
“···그냥 도연이라고 불러요.”
단유는 도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알았어. 도연아.”
망설임 없이 나오는 단유의 대답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어, 단···유야.”
“응.”
“너, 넌 저기 말이야.”
비록 자신이 먼저 말을 놓자고 했지만, 영 어색했다. 반면에 단유는 뭘 해도 자연스럽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꺼내지? 친구 사이에 할 말이 뭐가 있지?“
“너, 저기, 여자 친구 있어?”
본인이 말을 꺼내고 놀란 도연. 그리고 그런 도연을 덤덤히 바라보는 단유. 도연은 자신을 바라보는 단유의 눈빛이 마치 ‘왜 이렇게 한심하니’라고 타박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없어.”
“아, 그렇구나.”
서둘러 대답한 도연은 빨리 화제를 바꿨다.
“공부 잘하니?”
“응.”
“응?”
“잘한다고.”
워낙에 많이 들은 말이고, 스스로도 남들과 비교해서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냥 잘한다고 대답했을 뿐인데 도연은 미처 생각지 못한 대답을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아, 그렇지. 전교 1등이라고 했지. 지금 중간고사 기간 아냐?”
“이번 주에 시험이 끝났어.”
“아, 진짜? 좋겠다. 난 다음 주가 시험인데.”
“시험공부 해?”
“응. 해야지. 난 공부 많이 해야 하거든.”
“왜?”
“시험 성적 안 좋으면 가수 그만두기로 했거든.”
“재미있네.”
“뭐가?”
“내가 아는 누나는 가수 하느라고 학교 성적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었거든.”
“아, 그래.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학업과 동시에 병행하려면 많이 힘들겠다.”
이런 질문을 많이 들은 도연은 거의 공식화된 답변을 내놓았다.
“가수가 꿈이었기 때문에 몸은 조금 힘들지만 괜찮아.”
단유는 도연의 대답에서 익숙한 데자뷔를 느꼈다.
“슛 들어갑니다, 스탠바이 하세요!”
강준의 소리가 들리고 여기저기 쉬고 있던 스태프들이 다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이 좋아서 그런지 금방 긴장이 풀리네요.”
스크립터와 함께 기록을 확인하던 일중은 강준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배우들도 긴장을 풀면 좋겠는데.”
강준은 슬쩍 배우, 라고 지칭된 도연과 단유를 바라보았다. 10분 동안 저쪽 그늘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던 강준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결국 애구만.’
일에 집중을 못 하는 이유가 혹시 단유라는 남자애한테 흑심을 품어서 들떴기 때문일까? 괜히 어색한 모습을 보이던 지난주엔 그저 처음 만난 터라 서먹해서 그런 걸까 싶었는데 오늘 도연을 보니 어쩐지 다른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어쩐지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어쨌든 ‘연예인’이니까.
다시 슛이 들어가고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연기가 시작되었다.
“아, 날 좋다.”
양발을 쭉 뻗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는 도연.
“나 들어가서 공부해야 돼.”
단어장을 넘기며 투덜거리는 단유.
“야, 이렇게 날이 좋은데 교실에만 처박혀 있을래?”
그런 단유에게 애교스럽게 핀잔을 던지는 도연.
“날이 좋든 안 좋든 학생은 공부를 해야 돼.”
심드렁한 단유.
“맨날 공부, 공부. 공부 말고는 할 게 없어?”
어깨로 단유를 밀치는 도연. 하지만 단유는 여전히 단어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학생이 공부를 안 하면 뭘 하냐?”
“학생도 사람이야. 사람은 가끔 쉬어주기도 하고, 취미생활도 해야 한다고.”
학생도 사람, 이란 말에 도연을 바라보는 단유,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젓는다.
“그런 건 사치야. 학생은 원래 죽어라 공부만 해야 한다고.”
말을 조금 버벅거렸지만, 무사히 넘어갔다.
“치, 맨날 똑같은 공부. 솔직히 지겹지 않니?”
본래는 단유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 은근히 묻는 어조여야 했지만, 어쩐지 콧소리가 많이 들어간 애교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지겨워도 해야지.”
단유는 어쩔 수 있나, 하는 표정으로 다소 허탈한 느낌을 주는 대사를 읊어야 했다. 하지만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은 기계적인 반응. 하지만 본래 정해진 이미지와 어색함이 덜해서 일단 또 무사통과.
“지루해.”
동의를 얻지 못해 삐친 척을 하며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는 도연. 그리고 곧 두 사람이 고개를 들고 위를 쳐다보면 CG로 글자가 나온다.
「즐겁고 신나는 공부, 꿈과 끼를 찾는 수업, 행복한 교육을 꿈꿉니다.」
“컷.”
일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연의 긴장이 옆자리에 앉은 단유에게 느껴졌다.
“아까보다 많이 좋았어. 그냥 이대로 써도 될 거 같은데?”
일중이 미소를 지었다. 억지 미소 같지는 않아 도연도 한시름 놓았다.
“그럼 이제 각자 개인 바스트 컷 몇 개 찍고 넘어가자. 강준아.”
“예.”
뒤에서 대기 중이던 강준이 발 빠르게 다가와 촬영 감독에게 위치 세팅을 이야기해주고 순서를 정했다.
“누구 먼저 할래요? 도연 씨? 아니면 단유?”
“니가 먼저 할래?”
“난 상관없어.”
“그럼 먼저 해. 난 좀 있다가 찍을래.”
도연은 단유에게 우선권을 주고 물러났다.
“너희 언제부터 말 놓았냐?”
“아, 조금 전 쉬는 시간 때요.”
“이야, 빠른데? ···소문 안 낼게.”
무슨 소문을 내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감독에게로 돌아가는 강준의 뒷모습을 보다가 촬영감독의 부름에 단유는 다시 벤치에 앉아 지시에 따라 자세를 고쳐가며 촬영 준비를 했다.
“수고했다. 도연아.”
“저 잘했어요?”
“그래. 잘했어.”
도연은 자신의 연기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하는 동안 내내 머릿속으로 ‘내 친구야, 내 친구야’를 백 번은 더 되뇌었던 것 같았다. 계속 단유를 훔쳐보며 단유의 모습을 가슴에 담으려고 애를 썼다. 다행히 감독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걸 보면 무사히 넘어간 듯하니 선생님의 조언이 무쓸모는 아니었다.
“이렇게 잘하는데 말이야. 괜히 사람들이 걱정했어. 그렇지?”
“잘하긴요. 지금도 가슴 떨리는데.”
“아냐, 잘했어. 처음 하는 연기치고는 잘한 거야. 이거 나중에 드라마 캐스팅도 한 번 알아봐야겠는데? 우리 막내 연기자로 성공할 수 있게?”
“아이참. 놀리지 말아요, 오빠.”
매니저는 시답지 않은 농담으로 조금이나마 마음을 풀어주려 애를 쓴 뒤, 감독에게로 향했다.
“감독님.”
“아, 네. 매니저님.”
“저희 도연이, 괜찮았나요?”
그 전에 5번의 테이크가 있었고, 그 테이크의 대부분이 도연 때문이었음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물어서 영상이 잘 나올지 확인하는 것도 매니저의 역할이었다.
“네. 괜찮았어요.”
턱을 괴고 모니터를 바라보는 일중은 매니저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고 대화를 마치려 했다.
“잘 봐주세요, 감독님. 저희 도연이, 처음이잖아요.”
“그러고 있어요.”
“···그리고.”
감독은 미간을 좁히며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개인 바스트 샷은 찍기에 따라서 인물의 이미지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부디 잘 찍어달라고 부탁을 할 참이었던 매니저는, 하지만 눈살을 찌푸리는 감독의 표정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감독님. 더우신데 수고하시라고요.”
“수고하고 있어요.”
“아, 네.”
현장에서는 어떤 감독도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촬영시간이 지체되는 와중이라면 말이다. 그 와중에 매니저란 작자가 와서 속을 살살 건드리려 하니 좋은 소리가 나올 턱이 없다. 물론 촬영이 끝난 후에는 적당히 관계 개선을 위해 좋은 말로 무마할 생각이 있다. 하지만 아직은 촬영 중이니 약간 신경질을 부려도 된다.
물러난 매니저는 ‘자식 가진 부모가 약자’라는 심정으로 돌아섰다. 도연이 도경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다가 방향을 바꿔 학교 밖으로 향했다. 어쩐지 속이 타는데 밖에 나가서 음료수라도 사와야 할 것 같았다. 사는 김에 스태프들 것까지 사서 돌리기도 해야겠고.
시멘트로 포장된 갓길을 뚜벅뚜벅 걸어 교문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