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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487화 (487/956)

코미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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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에서 울음을 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글쎄? 딱히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어떻게 하면 돼? 뭘 하면 되는 거야?”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큰 눈동자가 단유를 바라보았다.

“······.”

“왜 아무 말도 안 해? 무슨 말이라도 해봐, 해보라고!”

부탁과 협박의 중간 쯤을 줄타기하는 말투에도 단유는 입을 열지 않았다.

****

“여기 사인 좀 해주세요.”

“사인이요?”

도연은 의외의 부탁에 펜을 드는 대신 단유의 눈을 바라보았다. 진심일까?

“네.”

도연은 머뭇거리다가 항상 챙기고 다니던 펜을 집어 단유가 건넨 ‘리본소녀’ 싱글 앨범의 재킷에 ‘To’라고 썼다.

“거기 명수에게 라고 써주세요.”

“네?”

“명수, 요. 밝을 명, 빼어날 수.”

그렇게 말한들 한자를 잘 모르는 도연으로서는 그게 무슨 글자인지 모른다. 하지만 한자를 모르는 거지, ‘명수’라는 한글을 모르는 건 아니다.

“부탁받으신 거예요?”

“네. 지난번에 같이 왔었던 친구요.”

“아.”

지난번에는 촬영이 끝난 후에 워낙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사인을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명수는 단유에게 따로 부탁했다. 그 부탁을 하려고 일부러 리본소녀의 싱글 앨범을 사기까지 했다.

도연은 멋들어진 사인을 한 뒤, ‘만나서 반가웠어요’라고 시작해서 ‘많이 응원해주세요’라는 말로 싸인 멘트를 마무리했다.

“여기요.”

“고맙습니다. 괜찮으시면 한 장 더 해주실 수 있나요?”

“네.”

도연은 다시 건넨 앨범을 받아서 ‘To’라고 썼다.

‘김단유? 단유? 단유씨?’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상미에게, 라고 써주세요.”

“···상미요? ···그때 왔었던 여자 친구?”

“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도연은 잠깐의 머뭇거림 뒤에 다시 멋들어진 사인을 써내려갔다. ‘저보다 예쁘신 거 같아요’라는 말이 들어간 싸인 멘트를 쓴 뒤, 하트를 그리며 마무리를 짓고 단유에게 건넸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는 단유. 도연은 단유의 등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일중은 금일 촬영할 콘티북을 살피면서 관자놀이 부근을 엄지로 꾹꾹 눌렀다.

“여기 커피요.”

“어, 고마워.”

강준이 건넨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일중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뒤 강준을 돌아보았다.

“애들은?”

“대기 중입니다.”

“···도연 씨는 어때?”

“계속 콘티만 보고 있어요.”

일중은 절로 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하며 콘티를 내려놓았다. 강준이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오늘은 2회분을 모두 끝내야 하는데, 가볍게 가시죠?”

“배우가 연기를 못해도, 책임은 감독이 져야 하는 거야. 이번 일 제대로 마감 안 하면 앞으로 이 일 따내기 어렵다는 거 알잖아?”

“그래도···감독님이 너무 신경을 쓰시니까 그러죠.”

일중은 그래도 오래 봤다고 나름 신경 써주는 강준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씀씀이에 고마워할 여유가 없었다. 까놓고 말해서 관공서 홍보영상이란 건 별로 돈도 안 되는데 괜스레 까다롭기만 한 것이었다. 굳이 비유하면 가시 많은 꽁치를 정성스레 구워서 가시를 하나하나 발라낸 뒤에 손님에게 내줘야 하는데, 수고비라도 두둑이 받으면 모를까, 엄한 트집이나 잡지 않을까 걱정만 하고 마는 일이었다.

‘그래도 손님 떨어질까 두려워서 감히 손을 놓지도 못하지.’

“됐고, 30분 뒤에 슛 들어가도록 하자.”

“네.”

강준이 물러난 후, 일중은 마른세수를 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촬영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며 콘티를 조정해 볼 생각이었다.

매니저는 수첩을 뒤적거리며 일정을 살피다가 고개를 들었다. 중얼중얼대며 콘티 속 대사를 암기하는 도연은 집중하느라 주위의 시선 따위는 의식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실 저런 모습을 자주 본 매니저는, 그래서 도연이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었다. 가수 데뷔 조에 들 때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그랬지만 도연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 집중을 했다. 가사를 빨리 외우기도 하고 안무를 빠르게 습득하는 능력도 다른 멤버보다 빨랐다. 독하게 공부하는 모습도 그렇고, 회사에서 일부러 스케줄을 빼지 않는 한 군소리 없이 착실하게 스케줄을 소화해내는 모습도 그랬다.

다만 그런 태도와 무관하게 카메라 앞에서 작아지는 도연이었다. 음악프로 무대에 서기 위해 회사 내에서 수십 번의 카메라 리허설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카메라 앞에서 어색함을 드러내는 도연이었다.

‘오프 행사나 사인회에선 끼가 넘쳐나는 아인데···.’

하물며 지금껏 해본 적 없는 연기라면 더더욱 힘들 터.

도경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매니저는 회사의 허락 하에 초단기 연기 레슨을 준비했다. 카메라도 문제지만 우선은 연기에 자신감을 붙여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사전에 취소하지 못한 행사도 다른 멤버들과 소화해야 했던 도연은 누구보다 바쁘고 힘들게 일주일을 보냈다. 그런데도 역시나 군소리 없이 묵묵히 따라온 도연이 매니저는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저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도 다 알아야 하는데.’

알기만 하면 저 매력에 흠뻑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앨범을 한 장이라도 더 사고 싶고, 응모권을 더 많이 확보해서 사인회에 참석하고 싶어질 것이다.

매니저가 상념에 빠져있던 사이 도경이 슬쩍 다가와 매니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으응?”

“앉아서 꿈꿨어요?”

“무슨···. 왜?”

“30분 뒤에 촬영이라고 하던데, 이제 메이크업 좀 손봐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아, 그래.”

매니저는 다시 도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콘티만 들여다보는 도연이었다. 이미 저 콘티 속 대사들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외우고 있을 도연이었지만, 여전히 자신감이 부족해서 거듭 콘티를 들여다보며 대사를 입으로 익히고 있었다.

도연이 도경의 부름에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은 본 뒤에야 매니저는 생각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오늘의 촬영장소는 학교 운동장 근처였다. 지난주 촬영한 곳과 다른 장소였지만 운동장만 나오는 장면이라 문제는 없었다. 오전 10시지만 따뜻한 봄날의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중이라, 일만 아니라면 아무 풀밭에나 드러누워서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고픈 마음이 드는 날씨였다. 물론 그냥 누우면 안 된다. 자리라도 깔아서 옷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비싼 옷이니까.

“오늘 화장 잘 먹었다.”

도경이 브러쉬를 든 채로 미소 가득한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도연은 거울로 이리저리 살피더니 도경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힘내. 잘할 거야.”

“네, 언니.”

도연은 콘티북을 들고 카메라가 세팅된 곳으로 이동했다. 화창한 봄 햇살에 운동장이 살짝 데워질 정도였지만, 촬영할 벤치는 푸른 나무가 우거진 그늘진 곳이라 시원했다. 그래서 연기를 하기에는 좋아 보일 것 같지만, 촬영하기에는 그늘이 짙어서 불가피하게 조명 2개를 따로 설치해야 했다. 가끔은 이렇게 대낮에도 조명을 써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반사판도 카메라 앵글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촬영팀 스태프 한 명이 이리저리 각도를 조정해서 들고 있어야 했고.

벤치에는 이미 단유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잘 부탁드려요.”

도연이 먼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아, 네.”

단유도 일어나 인사를 받았다.

“너희는 나이도 비슷한데, 왜 그렇게 서먹해?”

촬영감독이 앵글을 맞추다가 장난투로 물었다.

“단유가 말을 놓긴 어렵죠. 1살이라도 많으면 어른인 데다가 대스타인데.”

촬영팀 스태프 한 명이 웃으면서 감독의 말을 받았다. 그냥 하하 웃으면 그만일 테지만, 어쩐지 ‘대스타’라는 단어가 가슴에 와 닿는다. 그렇다고 정색을 할 수만은 없는지라 도연은 설핏 미소를 지어본다. 힐끗 바라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일중을 바라보며 슛 사인을 기다리는 단유의 모습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참 특이한 소년이었다. ‘소년’이라고 표현하긴 해도 어쩐지 ‘오빠’ 같은 느낌이 물씬 드는, 그래서 ‘청년’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드는 소년이었다. 게다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민망한 일이지만 자신에게 사인을 요청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정 PD도 자신에게 사인을 부탁했는데―아마 회사 홍보용으로 쓸 모양이지만 그런 것은 흔한 일이었다―단유는 친구의 사인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것을 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싸인 필요하지 않으세요’라고 대놓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냉정하게 돌아서는 이에게 묻기는 구차한 질문이었다.

‘잘 생겼지?’라고 도경이 운을 뗀 적이 있는데, 못생기진 않았다. 워낙에 잘 생긴 사람들이 많은 바닥에서 지내고 있다 보니 원빈 같은 탑 급 연예인 정도가 아니고서야 잘 생겼다는 감흥도 없다. 그래도 ‘일반인’들 중에서는 괜찮은 외모이니 아마도 자신이 잘생겼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자 친구도 많겠지.’

그러니 어쩌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계산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부러 차갑게, 사무적으로 대하는 것인지도.

‘나쁜 남자 컨셉?’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그의 시선이 자신을 벗어나 있다. 자신이 그를 훔쳐보는 정도로도 자신을 보지 않는 단유였다. 그렇다고 도연이 단유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같이 연기할 상대역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호기심 때문이야.’

도연은 자신의 관심과 생각을 그렇게 정리했다.

“컷!”

일중은 모니터 옆에 놓인 전자담배를 집어 입에 물었다. 버튼을 누르자 코일이 열을 뿜어내며 액상이 기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숨을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내뱉자 연막탄 같은 하얀 연기가 허공으로 뿜어져 올라간다.

강준이 한 걸음 뒤에서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강준아.”

“네, 감독님.”

“쉬었다 가자.”

“네. 10분 쉬었다 갑니다!”

여기저기서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린다.

“정 PD도 딱하네. 웬만하면 그냥 가지, 왜 저런대? 예술 영화 찍을 것도 아니고 말이야.”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고정해놓은 나사를 풀고 위치를 옮길 준비를 했다. 옆에서 돕던 스태프가 감독의 말을 받았다.

“워낙 심하니까 그렇겠죠. 대충 찍었다가 퇴짜 맞으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요.”

“아니면 그냥 CG로 떡칠을 하든가. 요새 CG가 워낙 좋잖아? 들어보니까 윗사람들은 그런 거 좋아한다던데.”

“이번에 오더 내릴 때요, 되게 깐깐하게 주문하더란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발주를 한 교육부에서 이번 작품에 기대가 크다는 이야기였는데, 촬영감독은 그게 이렇게 깐깐하게 촬영해야 할 정도인가 싶었다. 고개를 슬쩍 들어보니 도연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자리를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벤치에 앉아서 묵묵히 콘티북을 살피는 단유.

“쟤는 카메라로 찍을 때나 안 찍을 때나 똑같네. 그냥 원래 성격인가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연기가 자연스럽겠죠.”

“그건 성격이 비슷한 거랑 연기랑은 다른 문제야. 특히 카메라 앞에서 정해진 대사를 하는 건 다른 거라고.”

입에 쉽게 붙지 않는 대사를 적당한 어감으로 뱉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단유도 그런 점에서 보면 다소 발음이 어눌해지거나 버벅거리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이채로운 점은 몇 번 연습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변한다는 것. 말은 일종의 습관과도 같아서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일류 배우들 중에서도 현장에서 지적받은 내용을 한두 번 만에 고치는 경우가 많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단유는 연기가 처음이라면서도 고쳐낸다.

“배우의 끼가 있거나, 아니면 아나운서 쪽으로 준비를 하거나.”

“왠지 아나운서는 억지 같은데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실없는 농담으로 낄낄거리며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촬영팀이었다.

“단유 씨.”

자리에서 벗어났던 도연이 다시 단유에게로 향했다. 콘티를 들고 있던 단유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도연이 말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어요?”

또?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할 말은 없지만 들어주기만 하는 건 문제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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