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485화 (485/956)

코미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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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랬어.”

“······.”

어깨를 밀치는 여린 손에도 상체가 크게 휘청거렸다.

“왜 그랬냐고!”

“······.”

저항할 의지가 없는 몸이 밀면 밀리는 대로, 당기면 당기는 대로 흔들렸다. 마지막 한 잎이 바람에 흔들리듯 하얀 손에 붙들려 흔들렸다.

“대답해 봐! 왜 말을 못 해!”

“······.”

뺨이라도 올려붙일까 싶었는데, 차마 때리지는 못하는지 그저 옷깃을 아슬아슬하게 붙잡고만 있는 손이었다.

“나쁜 새끼.”

단유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그저 하얀 손을 쳐다볼 뿐이었다.

****

드디어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첫 로케이션 장소는 학교였다. 오늘 찍을 내용은 간단했다. 교실에 앉아 몇 줄 안 되는 대사를 주고받으면 끝이었다. 활달하고 호기심 많은 여학생과 무뚝뚝한 남학생. 두 사람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밝은 미래를 꿈꾸는 여학생과 사사건건 부정적인 말로 여학생을 상심케 하는 남학생의 대화. 그리고 CG로 메시지를 전한다.

「커리어넷에서 당신의 미래를 응원합니다.」

교육부 내 진로상담서비스의 홍보 메시지가 나오는 것으로 끝.

“간단하지?”

콘티를 들추며 설명하던 일중의 말에 단유와 도연은 가볍게 대답했다.

“네.”

하지만 내용이 가볍다고 촬영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단유의 이미지는 평소의 단유와 보기 좋게 맞아 떨어진 터라, 카메라 테스트 때도 일중은 오케이를 외쳤었다.

오늘도 단유의 단독 컷씬에서는 오케이가 쉽게 나왔다.

“연기가 좋네!”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무심하게 있을 뿐인 연기라 칭찬인지 흉인지 알 수 없었지만, 촬영 콘티 상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지니 다른 스태프들도 고개를 끄덕였던 단유의 연기였다. 반면, 활달한 이미지에 맞게 다양한 표정을 구사해야 하는 도연은, 표현해야 하는 성격과 무관하게 카메라 연기가 어색했다. 너무 과장되거나 혹은 너무 소심하게 보이는 표정 연기에 촬영감독이 먼저 카메라에서 눈을 떼는 경우가 생길 정도였다.

“정 PD. 괜찮아?”

촬영감독이 혀를 차며 말할 정도니, 일중이라고 다를까? 일중이 고민하던 걸 보더니 넌지시 말하는 촬영감독.

“그냥 넘어가자. 오늘 이거만 찍을 거 아니잖아?”

적당히, 라는 촬영감독의 말에 일중의 귀가 솔깃했다. 진짜 드라마를 찍는 것도 아니고 고작 3분짜리 홍보영상인데 무슨 퀄리티를 따질까. 그래서 솔직히 그냥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자기도 못한다는 걸 아는 도연은, 그래서 안타까움을 담아 눈빛으로 일중에게 부탁한다. 자기 때문에 같은 컷을 몇 번을 찍고 있으니 미안하긴 한데, 어물쩍 넘어가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냥 눈 딱 감고 ‘오케이’를 외치지 못하는 일중과 ‘컷’ 소리에 일중을 향해 젖은 눈빛을 보내는 도연. 대충하고 가자는 말이 막상 나오지 않는 이유였다.

“한 번만 더.”

“···그래.”

촬영감독이 다시 앵글을 조정하는 동안, 일중은 주변 분위기를 보다 강준이를 불렀다.

“10분만 쉬자.”

“10분만 쉴게요!”

강준의 목소리가 교실이 떠나가도록 울린 뒤, 일중은 도연을 불렀다. 조금 전의 촬영 화면을 모니터로 확인하면서 몇 가지를 알려줄 생각이었다. 연기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선생님은 아니라도 몇 가지 디렉션은 해줘야 방향을 잡고 가지 않겠는가.

어쨌든 이 영상의 메인은 도연이었고, 도연의 연기가 영상의 퀄리티를 좌우한다. 이제 첫 촬영인데, 처음부터 쉽게 넘어가 버리면 이후의 촬영이 고단해질 것이다.

“도연씨, 여긴 말이죠.”

일중은 콘티를 모니터 옆에 펼쳐두고 설명을 시작했다.

“단유야, 이거 마셔.”

“고마워.”

“근데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

명수가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통은. 촬영 준비하는 시간이 제일 길고, 본 촬영은 하기에 따라서는 길어질 때도 있고 짧을 때도 있고 그래.”

뮤직비디오 촬영 때도 그랬지만, 컷이 바뀔 때마다 카메라 위치를 재조정하게 되면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카메라만 바뀌는 게 아니라 조명도 옮겨야 하는데, 보통 적게는 3~4개에서 많게는 6~7개의 크고 작은 조명 기기들이 움직이며 적절한 위치를 잡느라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만약 카메라에 트랙이라도 깔아야 하는 경우면, 동선에 맞춰 트랙을 까느라고 또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니 촬영이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다. 그나마 변수가 통제되는 스튜디오 촬영의 경우에는 낫다. 지금처럼 교실에서 찍는다든지, 야외에서 촬영하는 경우라면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햇빛의 변화, 섭외된 장소의 렌탈 시간 등에 쫓기며 제한된 시간 내에 촬영하기 위해 다들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배우가 NG라도 내면 감독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스태프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다. 시간에 맞춰 촬영을 끝내기 위해 욕먹고 진땀 흘려 가며 바쁘게 서둘렀는데 기껏 고생했던 게 무색하게 배우의 NG로 시간을 낭비하니 말이다.

단유는 명수가 건넨 생수를 마시며 촬영장을 둘러보는 명수 뒤를 바라보았다.

“상미야, 안 심심해?”

“음, 조금?”

처음에야 들뜬 마음이었지만, 시간도 지체되고 현장 분위기도 점점 싸늘해지는 것 같아 상미는 구경하고 있기가 힘들었다. 명수야 분위기도 모르고 그저 바쁘게 눈동자를 굴리며 구경하느라 바쁘지만, 상미는 스태프들의 굳어지는 얼굴과 같이 대기하는 스태프들의 투덜거림을 흘려 넘길 수 없었다.

‘괜히 따라왔나?’

그런 후회가 들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명수 붙잡고 돌아갈까, 진지하게 고민도 했다.

****

6시간 전, 새벽 운동을 하러 공원엘 나온 단유와 명수는 모처럼 새벽에 나온 상미와 함께 가벼운 달리기를 했다.

“너도 운동 좀 해야 돼. 맨날 게임만 하니까 그렇게 체력이 떨어지잖아?”

“운동하면 종아리 굵어진댔어.”

“웃기고 있네. 며칠 운동했다고 종아리 굵어지면 남자들이 땀 흘려서 헬스장 갈 이유가 없네요.”

자신에게 핀잔을 던지는 명수의 등을 퍽, 소리 나게 때린 상미는 단유에게 물었다.

“너 촬영 간다는 게 오늘이지?”

“응.”

“그럼 나도 따라가서 구경해도 돼?”

“구경? 왜?”

“왜는. 그냥 궁금하니까 그러지.”

상미의 말에 등을 문지르던 명수도 단유에게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나도 갈까?”

“너까지?”

“왜? 가지마? 가면 안 되나? 혹시 방해되나?”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니, 방해가 아니라, 허락받지 않은 외부인이 가면 출입을 못 하게 할지도 몰라.”

“허락 필요하구나.”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상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손바닥을 주먹으로 치며 물었다.

“거기 매니저 같은 사람들은 옆에서 기다리고 그러지 않아?”

단유는 잠깐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오늘 일일 매니저 할게.”

“응?”

“너 매니저 없잖아? 그러니까 내가 오늘 매니저로 너 따라갈게.”

상미는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명수를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넌, 로드 매니저 해라.”

“나 운전 못 하는데?”

“누가 운전하래? 그냥 직급이 로드라는 거지. 싫으면 스타일리스트 하던가.”

“야, 하려면 네가 스타일리스트 해. 내가 매니저 할게.”

“너 남녀 차별하니?”

명수가 발끈했다.

“야! 이게 무슨 차별이야?”

“그게 차별이야.”

의미도 없는 싸움을 계속 듣고 있기가 힘들어 단유는 손뼉을 쳐서 두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그만해, 둘 다. 그리고 상미야. 미리 허락받지 않으면 어려울 거야.”

“그건 가서 보자고. 만약에 거기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그때 그냥 돌아오면 되지. 나간 김에 명수랑 놀다 들어가도 되고. 그렇지?”

“그럴까?”

히죽 웃는 명수를 보며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여우를 닮아가는 친구와 속도 없이 헤벌쭉 웃는 친구를 번갈아 바라보니 그저 웃음만 나온다.

결국 세 사람이 함께 촬영현장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응? 아, 왔구나. 도연 씨는 아직 안 왔는데.”

오늘도 진한 담배 냄새를 풍기는 강준이 단유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촬영준비를 하느라 바쁜 모양인지, 한 손에는 콘티북과 슬레이터, 다른 손에는 두꺼운 전선을 돌돌 말아 들고 있었다.

“저기 가 있을래?”

턱으로 옆 교실을 가리킨 강준에게 단유가 물었다.

“그런데요.”

“응? 뭐?”

돌아서던 강준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단유는 친구의 ‘견학’이 가능한지 물었다.

“친구?”

그제야 단유 뒤, 멀찍이서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는 소년과 소녀를 보았다.

“야, 여기가 함부···.”

말을 잇다 만 강준이 가만히 두 사람을 보더니 미간을 좁히고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일단 같이 대기하고 있어 볼래? 좀 있다가 다시 이야기하자.”

“그럼 옆 교실에서 같이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

결과적으로 명수와 상미는 촬영장에서 견학이 허용되었다. 허용만 된 것이 아니라 함께 촬영하기로 했다. 배역은 엑스트라. 카메라 앵글 끝에 살짝 걸릴 정도겠지만, 교실에 앉아만 있는 정도니 무리가 없겠다는 촬영감독과 총감독의 허락도 받아냈다. 어차피 교실 학생들을 연출하기 위해 섭외한 엑스트라들이 있었기에 두 사람 정도가 추가된들 문제는 없었다.

잠시 후, 도연이 현장에 나타났다. 주변 사람들에게 애교 있는 표정으로 싹싹하게 인사하는 도연과 매니저. 곧 두 사람도 단유가 대기하고 있던 교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도연과 단유는 고개를 숙이는 정도로 예의를 보이며 인사말을 나눴다.

“쟤들은?”

매니저의 시선이 단유 옆 친구들에게 옮겨지자, 단유가 사정을 이야기했다. 연출부 스태프가 가져다 준 교복을 입어보며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두 사람을 보던 매니저가 말했다.

“넌 친구들도 다 멋있고 예쁘네. 특히 넌 연예인 해도 되겠다.”

“고맙습니다.”

상미가 배 앞에 손을 모으고 허리를 푹 숙이며 인사했다. 하지만 딱히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은 아니었다. 듣기 좋은 말 해줘서 고맙다는 정도? 그래도 외모와 키를 보니 잘만 가꾸면 꽤 괜찮은 ‘상품’이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매니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럼 다들 중학교 3학년?”

“네.”

명수의 씩씩한 대답에 매니저가 또 한 마디 건넸다.

“학생은 되게 남자답게 생겼네. 아, 혹시 두 사람···?”

“아뇨, 그냥 친구예요. 이렇게 세 사람.”

“아, 그래.”

얼굴을 붉히는 명수를 보며 매니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대충 인사가 마무리되었다 싶은 매니저는 도연에게로 돌아섰다.

“도경이는?”

“화장실 갔어요.”

“얘는 시간 없는데.”

마침 도경이 급한 걸음으로 뛰어 들어왔다.

“시간 없는 거 알고 뛰어왔으니까 거기까지 해요. 단유도 벌써 와 있었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도연아, 메이크업부터 하자.”

“네, 언니.”

도경은 책상 위에 메이크업 박스를 내려놓고 의자 하나를 따로 빼서 도연을 앉혔다. 상미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슬슬 다가가니 도경이 ‘누구?’라고 물었다. ‘제 친구예요’라는 단유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도경은 다시 도연에게로 집중했다.

“쟤도 여자라고 저런 게 궁금하긴 한가 봐.”

명수의 속삭임에 단유는 피식, 실소를 흘리며 돌아섰다.

“너도 궁금하면 가봐.”

“내가? 내가 왜? 나 안 궁금해.”

“너 눈 돌아가는 소리가 아주 시끄러워 죽겠어.”

명수는 어울리지 않게 몸을 꼬면서 부끄러운 척을 했다.

“그래도···. 솔직히 넌 자주 봤겠지만, 난 아이돌 처음 본단 말이야.”

“엄밀히 말하면 나윤 누나도 아이돌이다?”

“그 누나는, 조금 다르지.”

“어떻게 다른데?”

“그냥, 데뷔하기 전부터 알던 사이라서 그런지 아이돌이라는 느낌이 덜했지만··· 쟤는 진짜 아이돌이잖아? TV에서만 보던.”

“리본소녀 좋아해?”

“솔직히 너 빼고 우리 또래에서 리본소녀 안 좋아하는 애 없을걸?”

리본소녀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명수의 ‘아이돌 구분법’이 단유에겐 조금 안타깝게 느껴졌다.

‘부디 나윤 누나도 빨리 진짜 아이돌이 되길.’

그렇게 속으로 빌어보는 단유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화장을 고치는 도연을 바라보았다.

지난 주, 카메라 테스트 때의 도연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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